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72화 (172/656)

제 172화

“예? 뭘요?”

“제과제빵 체험 강의요.”

서울에서 조금 외곽으로 나왔을 뿐인데 순식간에 도로가 뻥 뚫렸다. 힘차게 액셀을 밟으며 유키코가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수녀님이 사람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데, 진혁 씨도 시간 내실 수 있겠어요? 쪼끄만 제자들이 잔뜩 생기는 거라구요.”

“어린 제자가 잔뜩 생긴 다라…….”

진혁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처음 그를 가르쳐 주었던 대주는 결국 그에게 죽었다. 진혁이 처음, 정식으로 받아들인 제자 역시 그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제과제빵은 다르다. 일봉에게 빵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즐거웠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쏙쏙 빨아들여 익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신이 난다. 가끔 진희가 빵을 만들다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전화로 물어보는 것에 대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진혁이 너 바쁜데 이런 데 시간 투자해도 되겠어?”

백진영이 걱정하며 묻자 진혁이 대답했다.

“…… 흔히들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하잖아?”

임진혁이 일월신교의 교주 위를 대리인에게 위임하고 차원 이동의 비술을 찾기 위해 강호를 주유하던 때의 일이다. 그는 우연히 들른 시골 무관에서 재능이 뛰어난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무관의 아들로 외공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으나 내공 중심의 수련을 하며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다시 만날 일 없는 소년에 대해서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기에, 진혁은 바로 소년에 대해 잊어버리고 다시 혈교의 술사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곧 소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일월신교 내에서 진혁을 추적할 수 있는 실력자면서 동시에 하오문과 관계가 좋은 고수는 많지 않다. 기껏해야 광안마와 혈도객 정도인데, 광안마는 교주의 대리자로 활동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혈도객은 인간 전서구가 되어 진혁을 쫓아다녀야 했다. 진혁이 지나간 후 시골 무관은 인근 산적의 습격을 받았다. 소년은 부모를 잃고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만렙 오지라퍼 혈도객이 소년을 구출했다.

혈도객 녀석은 산적에게서 양민을 구출하거나 납치당한 여자를 구해주거나 하는 와중에 정파의 협객으로 오해받아(사용하는 초식부터 행동거지까지 정파의 것이 아닌 것이 없었기에 정파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십여 년 전부터 ’무명검(無名劍)’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죽기 직전 무명검의 독문 초식을 알아보았다.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며 죽은 남자의 마지막 소원을 거절하지 못하고, 혈도객은 소년을 데리고 진혁을 쫓아왔다. (소년은 놀랍게도 나중에 혈도객이 일월신교의 일원임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던 혈도객은 소년을 가르치면서 빛과 같은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재능이 넘쳐 광안마보다 실력이 좋았는데 순식간에 한참 위로 뛰어올랐다. 자신과 체질이 비슷한 제자에게 가르치면서 무학에 대한 이론을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보육원에서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진혁 역시 혈도객과 소년과 유사한 관계의 제자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진혁도 일봉이나 아버지에게 자신이 만든 레시피를 가르치면서 호흡을 맞추어보았다. 어느 정도 레시피를 정리할 수 있었지만 당시의 혈도객처럼 순식간에 자신의 무공을 정리하면서 또 다른 단계로 도약하지는 못했다. 아버지나 일봉은 진혁과는 빵을 만드는 기획 자체가 다르다. 자신과 유사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 그 제자로 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끝내는 제자로 시작해서 진정한 지음(知音)이 될지도 모른다. 진혁에게나, 그 사람에게도 좋은 기연이 될 것이다.

“어머. 그런 장점도 있군요!”

유키코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진혁 씨 솜씨에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센스가 더해지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평범한 대중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될 거고요.”

“잠깐, 지금 손님들이나 우리는? 내가 얼마든지 시식해 줄 수 있다고.”

백진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거기 아이들이 너나 빵집 직원들보다 <일반 대중>의 시선에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 아닐까?”

“그건 두고 봐야…….”

유키코가 능숙하게 주차하며 웃었다.

“도착했습니다-.”

보육원에 도착해서 빵을 전달하고, 서류에 사인하는 것은 금방 끝났다. 단지 제과제빵 체험 강의 일정을 조율하는 것이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아이들은 보지도 못하고 빵만 건네는 시스템이다.

“유키코 씨, 괜히 오신 거 아니에요?”

“어차피 체험 강의 일정 조율하려고 했으니까요.”

그녀가 머쓱해 했다.

“사실은 이제 체험 강의를 전처럼 자주 할 수가 없어요. 병간호를 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해서요.”

“광주에 있는 병원이라고 하셨죠? 오가기만 해도 힘드실 텐데.”

백진영이 걱정하는데 유키코가 씩 웃었다.

“그래도 임진혁 씨도 같이 해준다고 하셔서 솔직히, 한시름 덜었어요. 진혁 씨도 마음이 따뜻한 분이시니까요.”

“어서 빨리 회복했으면 좋겠네요.”

백진영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진혁이 실제적인 것을 물어보았다.

“광주의 병원이라고 했었죠?”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배려해주는 동료의 짐을 조금 덜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이 여자, 눈빛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 십만 대산 산골 마을의 촌부 같은 느낌이야…….’

진혁이 바라보는 유키코는 항상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는 느낌으로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선배 제빵사다. 일월신교에 정식으로 입교하지는 않았으나 진혁을 존경하고 따르는 촌무지렁이 아낙네 같다. 일월신교 바깥에 있는 외부 마을의 노인들은 험난한 세상에서 지켜줘서 고맙다며 산에서 캔 풀이나 나물 따위를 교에 갖다 바치곤 했다. 그들도 유키코 같은 눈빛으로 초롱초롱하게 진혁을 바라보았다.

진혁은 유키코가 자신이 챙기는 사람의 범위에 들어와 있는 것을 자각했다.

“예. 광주에서는 제일 큰 병원이에요.”

진희가 일했던 병원이자, 진혁이 입원했던 병원이다.

“어딘지 알겠군요.”

“여동생이 일했던 병원이구나.”

진영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면회할 때마다 불편하지는 않고요?”

임진혁의 질문에 유키코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이 부모님이 돈을 좀 쓰셔서, 1인실에 입원하고 있어요. 7층에는 하나밖에 없는 1인실이죠.”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다. 진혁이 미소지었다.

“그렇군요.”

◈          ◈          ◈

저녁에는 소망시에 들렀다. 샌드위치 가게 문을 막 닫으려던 어머니가 화색을 띠며 진혁을 반겼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 오늘은 무슨 보육원에 간다더니?”

“그냥, 아버지에게 조언 구할 것도 있고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주방 안쪽에서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무슨 조언을 구하려고?”

가족들은 평온한 가운데 조금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약간 들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기에 계시네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표정이.”

“저녁에 일 도와주러 들렀지. 보육원에 빵을 기증한다면서? 정흠이한테 들었어.”

아버지는 왜 기분이 좋은지 이야기해주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진혁은 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는 샌드위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건 새로 만드신 신제품인가요?”

“그렇지. 먹어볼래?”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않고 바로 내려왔다. 기차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만든 샌드위치는 오랜만이네요.”

“진혁이 왔어? 나한테 인사부터 해야지!”

낭랑한 목소리가 주방 안쪽에서부터 울려 나왔다. 아버지 뒤를 따라 나온 진희가 활기차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진혁은 진작부터 진희가 안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놀란 척 맞춰주었다.

“그래, 그래.”

“아버지가 만든 게 아니야. 내가 만든 신제품, 돼지갈비 샌드위치라고.”

오랜만에 온 가족이 전부 모였다. 진혁은 샌드위치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간장과 꿀, 생강으로 재웠나.’

“먹어봐도 돼?”

“당연하지.”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든 빵을 먹게끔 해오던 진혁은 다른 사람이 만든 빵을 먹을 일은 많지 않다. 그래도 최근에는 좀 늘어난 편이다. 그가 샌드위치를 들어 포장을 벗기며 생각했다. ‘가장 최근에 맛본 다른 사람의 빵은…… 리처드 베이커 쉐프의 잭 프로스트 케이크도 맛있었지. 유키코 쉐프가 만드는 봉래산 케이크도 괜찮고.’

호밀빵 사이에 양상추, 그리고 익힌 양파 볶음과 양념해 구워낸 돼지 갈빗살.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다.

“음.”

진혁이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오븐에서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호밀빵 다음에는 양념에 적셔져 부드러운 돼지갈비가 쫄깃하게 씹힌다.

순식간에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푹 익어 몰랑몰랑한 양파는 양념에 흠뻑 젖어 든 채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 스러진다. 신선한 양상추가 양파와 돼지갈비와 함께 어우러지며 입안에서 아삭아삭 소리를 낸다. 돼지갈비 소스가 빵과 양파, 돼지갈비와 양상추를 전부 어우르며 이루어낸 조화에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진희 네가 만들었다고?”

“저번에 내가 밑반찬으로 만들어 놓은 돼지갈비를 보고, 아빠가 이건 빵이랑 같이 먹어도 맛있겠다고 하시더라고.”

진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일봉 매니저님도 내가 만든 샌드위치, 괜찮다고 하셨어. 어때?”

“괜찮지 않은데.”

“뭐?”

진희가 미간을 찡그리며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아주 좋아.”

“너 이 자식! 사람을 갖고 놀긴?!”

“아버지, 이건 원가가 어떻게 되는데요?”

“일단 돼지갈비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데…… 지금처럼 진희가 일일이 만들면 당연히 기존에 나가던 햄치즈샌드위치나, 베이컨 샌드위치보다는 가격이 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진혁이 진중하게 말했다.

“들었지? 가게에서 새 메뉴를 내놓을 때는 단지 맛있는 것만으로는 안 돼. 원가율과 이익, 매출을 고려해야 한다고.”

얼마 전에 리처드 베이커가 다시 상기시켜준 것이다.

아버지가 똑바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 잘 알고 있구나. 잘 배웠어.”

‘아버지는 전부터 제가 이걸 알기를 바라셨죠.’

어머니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진혁의 손을 잡았다.

“H & J 베이커리 앤 카페에서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있나 보구나. 백씨 집안에서 잘해주나 봐.”

“…… 나름 잘 해주고 있죠.”

진혁이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버지가 진희에게 말했다.

“네가 만들어준 돼지갈비 샌드위치는 아주 맛있어. 하지만 지금 우리 가게 시스템에서는 아직 대량 생산을 할 수가 없는 메뉴지. 손이 너무 많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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