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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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유키코가 운전하는 차 뒤에 백진영과 임진혁, 두 명이 끼어 탔다. 전부터 백진영이 가자고 했던 가톨릭계 보육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간다 간다 하더니 이렇게 늦게 가게 됐네.”
“네가 바빴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가는 게 어디야.”
트렁크에는 이미 구워둔 빵이 가득 실려 있고, 향긋한 냄새가 풍긴다. 삼백 개가 넘는 빵을 추가로 구웠고, 재료비는 백진영이 개인적인 돈으로 부담했다.
“돈은 내가 나눠서 내도 되는데.”
“넌 빵을 만들잖아. 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돈으로 하는 거지.”
“흠.”
“수녀님이 기부 영수증 처리해 주신댔어.”
“그럼 당연히 형 돈으로 해야지.”
유키코가 운전하며 웃었다.
“그럼요, 당연히 기부 영수증 처리해 주실 거예요. 꼼꼼하고 성실하신 분이에요, 제가 따로 영수증 처리해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제가 드린 기부금 전부 처리해주셨거든요.”
아무도 모르는 일본 동요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그녀가 즐겁게 말했다.
“진혁 씨가 만든 빵, 애들이 정말로 좋아할 거예요.”
평일 이른 오후, 경기도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에는 의외로 꽤 차가 많았다. 두 사람 몫은 아니지만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게 된 리처드 베이커와 김은동, 그리고 전부터 바리스타 일을 배워 이제 모든 음료를 만들 수 있게 된 서창덕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 원래는 유키코도 가게를 지키게 할 셈이었는데, 생각보다 리처드 베이커가 손이 빠르고 솜씨가 좋아서 맡길 수 있었다. 또 그녀가 보육 시설에 꼭 같이 가고 싶다고 단호하게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도로는 주차장처럼 자동차로 가득하다. 회색과 검은색, 은색 차량의 흐름을 지켜보던 임진혁이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그런데 며칠 전 리처드 베이커 쉐프가 한 이야기 말이야. 유키코 쉐프하고 진영이 형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솔직한 의견을 들어봐도 될까…… 요?”
리처드 베이커의 의견을 종합하자면 ‘자신을 바꾸기보다 더 큰 시장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나. 미국으로 와라!’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시장이 넓고 다양한 사람이 많으니 진혁의 케이크처럼 별난 음식을 원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라는 논지였다.
“가긴 어딜 가. 나랑 같이 한국에서 일하기로 했잖아.”
백진영이 잘라 말했다.
“한국으로 가느냐, 미국으로 가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지. 리처드 베이커 쉐프도 그렇고, 형도 내 케이크가 일반 대중에게 먹히지 않는다고 했잖아.”
미국 진출을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족들이 한국에 있으며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족들은 데리고 가면 되고, 영어는 공부하면 된다. 하지만 진혁은 자신이 ’자신의 케이크를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것을 추천받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실 내내 자신의 케이크는 괜찮다고 믿어 왔다. 맛에는 자신 있다. 일단 한 번 맛본 다음에는 진혁의 케이크를 먹는 것을 더 멈출 수 없다.
‘무인은 외모가 아니라 실력으로 승부하지.’
여기에 독보무림하는 고수가 한 명 있다고 해 보자. 거지같은 넝마를 걸쳤건, 키가 작건 크건, 외모가 추하거나 잘생겼던간에 아무것도 상관없다. 일전을 벌여 보면 이 고수의 실력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자신에게 진짜 실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고수는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비무를 거절한다면 어떨까?
‘스텔라 위스커스는 디저트 자체를 혐오스러워했지. 먹고 싶어 하지도 않았어.’
이번에는 대회 심사라는 특이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강제로 빵을 먹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 케이크를 아예 먹지 않으면 맛을 알려줄 수도 없다.
익숙하고 유쾌한, 맛있어 보이는 형태의 빵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 보기에 너무 강해 보이면 친선 비무라도 거절당하기 마련이지. 그렇다고 너무 약하고 어설퍼 보이면 비무는 커녕 세가 안에 입장조차 못 하고 쫓겨나게 되어 있어. 적당히 괜찮은 옷을 입고 실력이 있지만 이길 수는 있을 정도 급으로 보여지는 것이, 비무를 허락받는 데는 더 용이하지.’
빵과 과자, 케이크가 손님에게 ‘맛’을 보여주려면 ‘맛있어 보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전에 아버지나 일봉이 지적했을 때에는 일단 알겠다고는 했으나,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은 실력이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등장한 다른 쉐프들의 실력이 생각했던 것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번 테마 <바다>에서 대회 심사위원들은 신랄하게 외형에 대해 비판하였다. 하지만 케이크를 맛본 후에는 맛에 대해서 극찬을 하고 심사를 끝냈다. 그러나 케이크를 맛보지도 않은 유키코가 경쟁자인 임진혁을 염려했다. 유키코는 제빵 계에서는 실력 있는 이로, 상업 제빵 분야에서 다양한 결과를 내왔다. 리처드 베이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그의 케이크가 ‘일반적이지 않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정말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진혁은 자신이 제과제빵 계에서 숨겨진 고수, 진정한 강자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진정한 강자는 다른 사람의 평가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일류 고수는 태양혈이 튀어나오고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 그 누가 보더라도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임진혁처럼 높은 경지의 무인, 절정을 초월한 무인은 반박귀진의 경지에 달해 겉으로 봐서는 무공을 익힌 것조차 알 수 없다. 진혁은 자신의 케이크가 ‘반박귀진의 경지’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봐서 맛있어 보일 필요가 없는, 임진혁이라는 브랜드 이름만으로도 맛을 보장하는 케이크라고 믿었다.
“조금 특이할 뿐 먹을만한 걸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맛있기만 한데, 다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유키코는 진심으로 임진혁의 ‘페이스트리 쉐프로서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다. 리처드 베이커는 진지하게 해외로 진출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진혁은 국내에서 위치를 굳히고 해외로 나갈 생각이지, 특이한 것들을 좋아하는 고객들을 찾아 해외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진심 어린 충고에 대해 돌이켜 보다 진혁은 문득 생각했다.
‘유키코 쉐프에게 이모저모 신세를 졌어.’
“유키코 쉐프, 요즘 일하면서 힘든 건 없습니까?”
“힘든 거요?”
유키코가 웃었다.
“은동 씨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고, 진혁 쉐프가 발전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데요. 손님들 얼굴 직접 보는 것도 좋습니다.”
“…… 그렇습니까.”
“재민 씨가 일어났으면 좋겠지만요.”
진혁이 웃었다.
“그렇군요.”
백진영이 품에 안은 빵 봉지를 껴안으며 냄새를 맡았다.
“하나 먹고 싶다. 임진혁, 넌 이렇게 빵을 잘 만들면서 왜 진짜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 곳에서는 엉뚱한 짓을 하는 거야?”
다시 진혁의 ‘잔인한 케이크’로 화제가 돌아가 버렸다. 유키코가 심각하게 말했다.
“이번에 쇼에서 만드신 케이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계산을 잘했죠. 실제 혈액이 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며 물들어가는 데 신경을 썼습니다. 붉은색이 보랏빛이 되었다가 마침내 남색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애썼는데…….”
“그런 짓까지 했냐!!!”
백진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느라 얼굴을 숙이며 빵을 세게 껴안아 버려서 빵 일부가 뭉그러졌다. 진영이 이크크 하면서 빵이 가득 담긴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투덜거리는 말도 잊지 않았다.
“케이크에 왜 혈액이 필요해? 수혈하는 것도 아니고.”
“예술적으로 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실제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고.”
진혁은 조금 풀이 죽었다. 백진영이 다시 물었다.
“맛있어 보이게 한다는 생각은 없어?”
“일단은 대회니까, ‘맛있어 보이게 한다’라는 명제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하던데. 개인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편이 좋다고.”
이것은 맨 처음에 아버지가 조언했던 부분이다.
“개인의 정신세계도 정신세계 나름인데…….”
유키코가 웃다가 팔꿈치를 움직여 뭔가를 건드렸는지 라디오가 켜졌다. 뉴스 방송이 흘러나왔다.
〔최근 탑골 공원에서 발견된 변사체의 신원이 밝혀졌습니다. 택시 기사로 일해오던 이 씨는 최근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흉흉한 뉴스를 듣고 그녀가 놀라 말했다.
“죽은 사람이 살인죄를 뒤집어쓴 건지, 아니면 뉴스에서 말하는 대로 살인을 하려다가 죽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네요.”
“밤늦게 술 취한 20대 남자들만 죽였다더니, 직업이 택시 기사였단 말이야? 나도 저번에 택시 탔는데. 위험할 뻔했네.”
’내가 없었으면 죽었겠지. 너무 약하고 순진해.‘
임진혁은 백진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멍하니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약하고 자기 보호 본능이 없는 현대인, 백진영은 맹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혁아, 너 이런 뉴스 좋아하냐? 아니면 호러나 스릴러, 서스펜스 영화 같은 것? 미국의 과학수사 드라마라든가.”
‘얘가 드라마 같은 걸 너무 많이 봐서 현실 감각이 사라진 걸지도 몰라.’
임진혁과 백진영은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 마주 보았다. 진혁이 대답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는 제빵 연습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그런 영화는 좀 현실성이 부족하잖아.”
미적지근한 대답을 들은 유키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백진영에게 물어보았다.
“한국의 군인은 실제 군사 훈련도 받는다던데, 피를 볼 일이 많은가요? 지금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황이니까 위험하고…….”
“군대 갔다 온 애들 얘기 들어보면 다 각자 달라서 모르겠습니다. 저는 방위로 갔다 와서 잘 모르거든요.”
백진영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토막 살인 사건을 경험하지는 않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다에 사람이 피 흘리며 빠져 죽을 일도 없고요. 그런 일은 해군이라도 없을걸요.”
“아, 여기서 유턴해야지.”
유키코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고 백진영은 임진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혁이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빵을 갖다 주러 가는 거 말인데, 쓸데없는 짓이 아닌가 싶어.”
“갑자기 왜?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이 들면 왜 가지고 가는 건데?”
백진영이 갸웃거리며 묻자 진혁이 대답했다.
“물고기를 잡아 주는 거랑 똑같은 일 아니냐고.”
“…… 그래서?”
“물고기를 잡아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거지.”
살인을 주저하는 꼬마들 앞에서 대신 살인을 해 줄 수는 없다. 첫 살인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나서야 좋은 살수가 될 수 있다.
진혁은 첫 제자 겸 부하-광안마를 가르치던 때의 두근거림과 설렘, 그리고 빡침을 기억했다.
한 번 듣고 알겠다고 하던 제자 녀석은 머리로는 아는데 몸으로는 실천을 못 해서 두들겨 맞아야 했다. 이해를 해서 글들을 줄줄 읊어대면 뭐하나, 몸이 안 따라주는데.
빵을 먹는 것만 배우는 것을 뭐하나, 잠깐 즐겁고 말아서 뭐하나. 진혁의 차가운 말에 유키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진혁 씨도 같이하면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