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0화
유키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진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스트로베리 초콜릿 시럽인데.”
임진혁은 스트로베리 초콜릿 시럽이 뿌려진 마카롱 위에 초콜릿 막대 화살을 하나씩 올렸다. 그러고 나니 마치 마카롱이 화살을 맞아 흘린 피처럼 보였다.
그날 영업이 끝나고 나서 진혁이 정식으로 새 케이크를 내놓자, 직원들은 기쁜 얼굴로 앞다투어 케이크를 가져갔다.
“저부터요! 저! 저!”
제일 먼저 케이크를 받은 사람은 김가영이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케이크 접시를 받더니 케이크가 일생일대의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로 포크로 내리찍었다.
“으으으음……!”
하지만 부드럽고 살살 녹아내리는 케이크에는 씹을 것이 많지 않았다. 녹진한 캐러멜 크림이 스며들어 있는 초콜릿 시트는 솜사탕을 빵으로 만든 것처럼 푹신푹신하다. 딸기 초콜릿 시럽의 새콤달콤한 맛이 지난 후에는 촉촉한 빵과 녹진하게 부드러운 크림이 쌉싸름한 뒷맛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맛있는 것은 마지막까지 아껴 먹는 성격이었고, 이번에는 마카롱을 맨 마지막에 먹었다.
“아.”
캐러멜 글라사주와 캐러멜 크림을 얹은 마카롱이, 초콜릿 화살과 함께 입안에서 바삭바삭하게 부서진다. 아삭한 식감과 부드러운 크림이 어울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완벽한 조화를 선사했다. 얼굴을 접시에 처박고 포크로 바닥에 있는 크림까지 전부 긁어먹은 김가영이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봄날의 아기곰처럼 따뜻한 맛이네요.”
서창덕은 백진영에게 빌린 카메라를 들어 조명을 켜고 케이크를 찍고 있었다. 그가 김가영을 보더니 킬킬대며 웃었다.
“가영 씨, 입가에 초콜릿 묻었다.”
백진영은 어느새 자신의 케이크를 다 먹고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은데요. 전 이 사진이 좋겠습니다.”
진혁 역시 옆에서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나쁘지 않네.”
“구도 잡는 것 자체가 다르다니까. 창덕 씨는 진짜 보물이야.”
파삭하게 입안에서 부서지는 마카롱과 초콜릿. 차갑고 딱딱한 초콜릿은 침과 섞이며 부드럽게 단맛을 퍼트리고, 커피 크림과 뒤섞여 씁쓸한 뒷맛이 다시 한 번 캐러멜과 함께 달콤해진다. 쌉싸름한 맛 뒤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단맛에 유키코가 눈을 감았다.
“달콤하고 상냥한 맛이에요……. 이 화살은 윌리엄 텔의 화살에서 생각해내신 거죠?”
『캐러멜과 딸기, 초콜릿은 확실히 어울리네. 이건 네가 개량한 레시피인가?』
리처드 베이커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고 있었다. 기본적인 레시피를 사용해 아주 약간 어레인지한 이 맛은 어디서나 맛보기 쉬운 조합이다. 하지만 그 ‘기본’을 이렇게 화려하게 살려내어 맛 하나하나가 폭발적인 힘을 갖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케이크와 크림 층을 3층이 아니라 5층으로 했군』
“너무 맛있어요. 신제품도 진짜 좋아요.”
“이번에 선보여주신 맛 역시 최고였습니다.”
“내일 손님들이 케이크를 먹고서 보여주실 반응도 기대되는군요.”
다들 한 마디씩 칭찬하고 나서 막내 예은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 무슨 동화인지 알 것 같아. 이 화살을 보니까 확실해. 그 윌리엄 텔 이야기 맞죠? 사과 대신 일부러 마카롱을 올리신 거죠?”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옛날 중국 신화를 모티브로 했거든. 명궁이 해를 쏘아 떨어뜨린 이야기 말이야.”
진혁이 케이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추락한 태양>이라는 이름이지. 어때?”
이미 그 신화를 알고 있었던 유키코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래서 피였군요. 사과는 피를 흘릴 일이 없으니까…….”
『피? 피라고?』
‘사과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해도, 태양은 왜 피를 흘려야 하지?’
아까 유키코와 진혁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눈빛을 통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들이 머뭇거리는 동안, 유키코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전부터 말씀드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혹시 유난히 시체와 피를 선호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지…….”
유키코가 말하기 시작하자 김가영이 말을 가로챘다.
“김 쉐프님! 저희는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임진혁 쉐프님은 감각이 조금 괴팍할 뿐이에요! 원래 천재들은 다 그런 거 아닌가요?!”
김은동이 심각하게 말했다.
“평범하고 착한 만큼 호러 영화나 스릴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느낌이 아닌가 싶었는데.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처음 라운드에서 봉분하고 묘비, 제사상 만들었을 때부터 특이하다고 생각하긴 했거든요.”
『흐음……』
유키코가 말했다.
“가영 씨가 말씀하시는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임진혁 쉐프님도 아셔야 해요. 지금 임진혁 쉐프님이 만드시는 케이크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감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요.”
“화살 꽂힌 햇님은 귀여운데요?”
백진영이 이야기하자 유키코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 라운드에 만든 것을 못 보셔서 그래요. 이번 테마는 바…….”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비밀 보장 서약을 한 그녀는 일정 시점 이전까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바나나?”
백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임진혁이 웃었다.
“방영 전까지는 비밀이잖아요? 유키코 쉐프님.”
“그렇죠. 제가 실수할 뻔했네요. 하지만 임 쉐프님,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아시죠?”
“일반적인 감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맞아요. 전에 인상적인 패션에 대한 것도 그렇죠. 다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데 진혁 쉐프는 그렇지 않아요.”
“진혁 쉐프는 그렇지 않다니까요.”
김가영이 열심히 변호했다.
“전의 대자연도 그렇고, 빨간색 티셔츠도 그렇고 그냥 패션 감각이 조금 다르신 것뿐이에요. 하지만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니까 옷을 아무거나 입어도 괜찮으시다고요.”
“아니, 가영 씨.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닌데요?”
백진영이 킥킥대며 말했다.
“진혁이가 잘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으셨군요.”
“솔직히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말만 안 할 뿐?”
“가영 씨 혹시, 진혁이 팬클럽이에요? 갑자기 엄청나게 열심히 변호를 하는데?”
“…….”
김가영은 입을 다물었다.
‘팬클럽이군.’
‘팬클럽이 분명해.’
잠시 조용해졌다. 리처드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물어보자 백진영이 유키코가 진혁의 센스에 대해서 한 말까지만 통역해 주었다.
『내가 한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았군』
리처드 베이커는 케이크의 마지막 맛을 음미하며 말했다.
『재료도 무난하고, 원가율도 나쁘지 않아. 대단해』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스펀지처럼 빨아들여서 성장하니까 이렇게 빨리 클 수 있었던 거야.’
그는 아쉬운 마음으로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가게가 자네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럴리가요, 이 가게는 임진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시피 한 가게인데요』
백진영이 가로막고 나서자, 리처드 베이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이 피의 태양(Blooded Sun)만 봐도 그래』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남들이 다 보기에 이쁘기만 한 빵·과자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 자기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걸 만들면 되지. 정말로 유능한 쉐프라면, 자신을 관철할 수 있지. 임진혁 쉐프가 피와 무덤, 죽음과 사신을 좋아한다면 그걸 테마로 만들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음산하고 잔혹한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팔면 되니까』
『한국은 미국과 다릅니다』
백진영이 말했다. 유키코가 동조했다.
『한국 시장은 일본과 확실히 달라요. 저만해도 처음에는 같은 동양계에 한자 문화권이라 비슷한 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당장 문화부터 시작해서 다른 것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하물며 한국과 미국은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녀가 열변을 토했다.
『이름만 봐도 그래요. 임진혁 쉐프와 백진영 사장님은 아시지만 원래 제 이름은 다무라 유키코예요』
마지막 말을 알아들은 김가영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씨가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성인 다무라로 성을 바꾸시고 일본에 귀환하셨거든요. 그런데 종종 제가 자신의 성을 따지 않았다고 아쉬워하기도 하셨어요. 일본에서는 스타 쉐프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빵집을 만드는 일이 종종 있으니까, 한국인 아버지의 성을 따서 예명을 지었어요』
한국과 일본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리처드 베이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럴 거면 아예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하는 게 좋지 않아요?”
『한국인이 아닌데 한국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면, 가끔 오해를 받을 때가 있어요. 한국어는 어느 정도 해도 문화적인 습관 같은 것에 서툴면 애매해요. 처음부터 외국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들어가는 것이 편해요』
『똑같아 보이기만 하는데』
유키코가 웃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생활한 지 오래됐으니까요. 그래도 스시가 먹고 싶고, 된장국이 아닌 미소시루하고 어머니가 직접 만드신 낫토가 그리워요』
『뭐어, 그럴 수도 있겠군. 나야 외모만 봐도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게 바로 드러나는데도, 한국 사람들이 한국적인 예절을 기대하는 순간들이 있더라고』
리처드 베이커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한국에는 할로윈 풍의, 그로테스크하고 기이한 케이크나 빵·과자류를 선호하는 시장은 아예 개발되어 있지 않다는 거지?』
『전혀요』
『놀이 공원에서도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그럼 그건 임진혁 쉐프가 선택해야겠네』
『뭘요?』
『한국에 머무르면서 여기서 대중에게 맞춰서 평범하게 예쁜 케이크를 만들 수 있도록 감성을 갈고 닦을 것인지, 아니면 미국에 와서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잔혹하고 기괴한 피범벅 케이크를 만들 것인지 말이야.』
『…….』
리처드 베이커가 단언했다.
『괴상하고 기묘한 센스라고 생각하긴 해. 그런데 그건 임진혁 쉐프의 개성이야. 나쁜 점은 아니지. 굳이 이상한 TV 쇼 같은 거에 나갈 게 아니면, 그 센스를 개발하는 것도 좋아. 하지만 한국에 있으면 그 개성이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으니, 넓은 세상에 가는 것도 좋지 않나 싶은 거야』
백진영이 중얼거렸다.
『그런 방법도 있군요.』
유키코가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확실히 좋은 개성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최소한 저런 개성을 가진 페이스트리 쉐프, 저는 본 적이 없거든요.』
그녀는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도쿄 제과 학교의 동기들을 떠올렸다.
초밥 모양의 케이크나 라면 모양의 케이크 등, 실제 음식을 빵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친구라든가, 드레스 모양을 케이크로 재현하고 싶어 하는 케이크 디자이너처럼 개성이 강하고 능력이 있는 친구들이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줄게.”
“어쨌든 내일부터 이 케이크는 메뉴로 올린다?”
“그거야 당연하지. 창덕 씨, 가영 씨, 예은 씨. 이거 하고 어울리는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추천해 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