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9화
삼재검법(三流武功)만 보더라도 그렇다. 삼재검법의 비급은 저잣거리의 서점에서도 구할 수 있는 물건으로, 주로 시골 깡촌 구석에서 사문 없는 낭인들이 익히는 검법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떠돌이 낭인 한 명이 삼재검법으로 경지를 이루어 무림계에서 떠오르는 신성(新星)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삼재검법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극성까지 익힌 삼재검에 본인이 직접 만든 보법을 결합해 천하에 이름을 널리 떨쳤는데, 이후 십 년간은 그 유명에 힘입어 삼재검법을 익히는 자가 많았다.
‘아무렴. 어떤 기술을 사용하는지보다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더 중요하지.’
십 년 후에는 낭인이 급사한 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삼재검법을 익히지 않았다.
거기에는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다.
당시 일월신교의 소교주로 활동하던 임진혁은 사천을 지나던 중 건방지게 구는 놈과 조우하게 되어 일전(一戰)을 벌였다.
특이하게도 상대가 엄청난 경지에 달한 삼재검법을 쓰길래 재미있어 살수를 펼쳤는데, 숨겨놓은 한 수가 없었는지 그만 죽어버렸다.
상대의 경지가 조금만 더 높았으면 좀 더 흥미로운 승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엉겁결에 죽은 상대를 위해서 친절하게 무덤도 만들어 주었다. 옆에서 광안마가 과연 소교주님께서는 너그럽다며 칭찬의 말을 쏟아내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흘러서 그런지 그 기억도 희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낭인의 이름이 기억이 안 나.’
어젯밤에 죽은 연약한 현대인-택시기사도 비슷한 경우다.
무례하게 전투를 시작해서 예의 없이 자기소개도 하지 않고 사망했다는 점이다. 이름을 애초에 말하지 않았으니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단지 그 낭인의 경우에는 죽고 난 다음에 삼재검법의 달인 OOO가 비명에 갔다고 하면서 널리 소문이 나서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진혁은 아까 미리 반죽해서 팬 위에 동글동글하게 짜 놓은 캐러멜 마카롱 반죽이 충분히 마른 것을 확인했다.
이 마카롱 꼬끄는 약하기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트레이를 들고 오븐 쪽을 향하자, 김은동이 말했다.
“임 쉐프, 제가 오븐에 넣겠습니다!”
“…… 185도에서 10분, 그리고 155도.”
“예!”
“그리고요?”
다시 물어보자 김은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키코가 진혁의 뒤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힌트를 주었다.
“중간 중간에 위치 바꾸어 놓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바로 대답하는 은동을 바라보며 진혁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허둥대던 은동은 이제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보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전보다는 조금 낫군.’
유키코는 꼼꼼하고 세밀하게 하나씩 가르쳤고, 하나를 외운 다음에 다음 진도로 나가도록 했다. 엄격하면서도 잘 하고 있을 때는 제대로 칭찬을 해 주고, 조금씩 일을 맡기고 있다. 일봉이 보다는 느린데 유키코 말로는 이 정도면 보통보다 조금 빠른 속도라고 했다.
‘지금 마카롱 구울 때 반죽 위치 바꾸는 걸 헷갈리는 게 보통보다 빠른 속도라고……? 일봉이가 눈치 빠른 편이라는 건가……?’
평소 진혁은 유일봉에 대해서 ’배우는 속도는 느리지만 성실하고 사람이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는 숙련도를 평가하자면 삼류 무인 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 김은동이 느릿느릿하게 학습하는 속도에 비하면 일봉은 그야말로 일류 무인 급이다.
‘내가 말하는 게 무서운가?’
유키코가 말할 때는 괜찮은 것 같은데, 진혁이 이야기하면 긴장해서 실수를 한다.
진혁은 젤라틴과 다크 초콜릿이 들어간 캐러멜 크림을 체로 걸러냈다.
유리 볼에 스테인리스 체를 얹고 캐러멜 크림을 천천히 부으며 주걱으로 저으며 걸러내자 매끄러운 커피색 크림이 뚝뚝 방울져 떨어졌다.
달콤한 캐러멜 향기가 주변에 풍기며 코를 간지럽힌다.
‘이 과정을 추가해줘야지.’
설탕과 버터, 생크림을 섞어 끓이는 캐러멜 크림에는 뭉쳐진 설탕이나 젤라틴 덩어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물론 임진혁이 만든 크림에는 그런 덩어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단 일 푼의 진기만 주입해도 액체 안에 열기가 골고루 순환되어 설탕이 뭉칠 수 없게 잘 녹여준다- 그는 이 단계를 레시피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김은동도 만들 수 있는 케이크 레시피’를 설계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이 모든 과정을 추가했다.
얼음물이 든 스테인리스 보울 위에 크림이 담긴 유리 볼을 얹고, 캐러멜 크림을 펼쳐가며 저어 식혔다.
차가운 생크림을 넣으며 약하게 저어 거품을 올리는데, 이때는 천천히 나누어 넣어가며 저어야 한다. 당연히 멍울 없이 골고루 섞여 있지만 이것 역시 체크해 준다.
‘두부 비지처럼 크림이 분리되면 안 된다…….’
레시피 페이퍼에 하나씩 적어나간다. 이럴 경우에는 진기를 한 푼 주입해 다시 골고루 녹이면 된다. 애초부터 멍울을 만들지 않으면 좋지만 무공이 없다면 멍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혁은 어느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일일이 한 번씩 생각해봐야 했다. 무공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 물로 녹일까?
‘따뜻한 물로 바로 녹이면 안 되지.‘
그럼 더 곤란해질 것이다. 초콜릿과 젤라틴이 들어 있는 상태이므로 바로 끓이는 게 아니라 중탕하는 게 좋겠다. 진혁은 일부러 생크림에 멍울을 만들어 보고, 중탕을 해 보았다. 살살 끓이자 멍울은 바로 녹았다.
‘좋아. 중탕하면 된다.’
문제가 발생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수습할 수 있는 해결책도 적는다. 진혁이 중탕하는 것을 곁눈질로 본 유키코가 환히 웃었다.
“임진혁 쉐프가 크림을 중탕하는 건 처음 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진혁은 뜨끔해서 하며 웃었다. 리처드 베이커는 힐끔 쳐다보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는 ’잭 프로스트 케이크’를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혁이 만들던 빵 일을 가져가 하고 있었다. 블랙 앤 화이트 크림 소라 빵과 베이컨 파이, 치킨 파이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황금 버터 앙금 소보루와 트리플 크림슨 치즈 케이크 등은 성공적으로 만들어냈기에 충분히 한 사람의 인력이 되었다.
‘두 명 몫은 못 하고 있지만.’
자신의 말을 지킨다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싫지는 않다.
몽글몽글한 덩어리 없이, 매끄럽고 말간 캐러멜 크림은 따뜻한 암갈색으로 연해지며 걸죽해졌다. 그는 랩을 씌운 미니 사각 틀에 제누아즈 쇼콜라를 하나씩 하나씩 깔고, 느긋하게 캐러멜 크림을 부었다.
잭 프로스트 케이크가 컵케이크인 만큼, 이 미루아르 캐러멜도 컵케이크와 동일한 미니 사이즈다. 조그마한 틀에 하나씩 하나씩 크림이 부어지며, 캐러멜 크림이 미니 제누아즈 쇼콜라 열두 개를 전부 덮었다. 시트에 크림을 바르는 게 아니라 덮어서 얼리는 콜드 케이크기 때문에 따로 설탕을 바를 필요는 없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진희가 제누아르에 설탕을 아주 잘 바른다고 일봉이 녀석이 칭찬을 열심히 했지.’
캐러멜 크림이 골고루 발라지도록 주걱으로 살짝 눌러주고서 다시 시트를 얹었다. 삼류 무인의 목이 아닌 머리카락만 벨 수 있을 정도로 힘을 조절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진혁이 여기에서 힘 조절을 잘못한다면 시트가 부서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조리대를 뚫고, 시공된 바닥을 파괴하며 지하실의 창고까지 내려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개미를 다리 하나 다치지 않게 들어 올리는 것과 같은 적은 힘을 사용하였다. 날아다니는 파리의 날개를 자신의 마음대로 잡아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손가락 근육을 조절하여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제누아즈까지 올린 후, 마지막 시트 위에 남은 캐러멜 크림을 아낌없이 부었다. 완벽하고 말끔한 평평한 원형이 되도록 크림을 깎아내자 지나가던 김은동이 눈을 깜빡였다.
“칼로 잘라낸 것처럼 평평하네요. 역시 임진혁 쉐프는 대단합니다.”
납작한 스패츌러로 단정하게 깎아낸 캐러멜 크림 케이크를 보고서 리처드 베이커가 휘파람을 불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손님 한 명이 멈추어서더니 임진혁이 서서 케이크를 만드는 것을 보더니 김가영에게 물었다.
“저 케이크는 뭐예요? 맛있어 보이는데.”
“저건 신메뉴라서 오늘은 판매하지 않을 예정이에요.”
“내일도 꼭 와야겠네.”
임진혁이 만들고 있는 케이크에 대해서 묻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저건 무슨 맛이래요?”
아직 신메뉴에 대해 듣지 못한 서창덕이 곤란해하자 임진혁이 소리쳐 대답해 주었다.
“<추락한 태양> 케이크로, 미루아르 캐러멜을 소형으로 만든 케이크입니다. 내일부터 판매하는 한정 케이크입니다. 오늘 나와 있는 잭 프로스트 케이크와 시리즈니까 기대해 주세요.”
“그럼 잭 프로스트 케이크 하나 주세요.”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케이크를 사 가는 동안에도 진혁은 손을 쉬지 않았다. 김은동이 잘 구워진 마카롱을 내왔다.
“이건 마카롱으로 만드시는 거예요?”
마카롱을 만든다고 보기에는 마카롱에 채울 크림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은동이 의아해하는데 진혁은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아.”
김은동이 지난번에 배운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루아르 캐러멜 위에 마카롱이 올라가는 레시피는 주영모의 오리지널로, 이전에 진혁이 연습한 바가 있었다.
그는 단지 이번에는 미니 사이즈로 개량해 마카롱으로 ’태양’을 만들 생각이었다.
“좋군.”
잘 구워진 마카롱 꼬끄는 가라앉지 않고 동그란 모양이어야 하며, 표면에 기포가 없다. 하지만 겉보기에 예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임진혁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러울 뿐만 아니라 먹었을 때 껍질이 바삭하게 부서지면서 내부에서 쫄깃쫄깃함이 느껴지며 과하게 달지 않을 것을 선호했다.
‘쫄깃해지려면 속결에는 기포가 많은 것이 좋지.’
김은동이 중간중간 제대로 위치를 바꿔주었다.
이전에는 다른 일을 하느라 잊기도 했는데 긍정적인 변화다. 진혁은 그가 작은 일도 제대로 하다 보면 원하던 발효 빵 만들기도 무사히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잘 나가는 치킨 파이와 베이컨 파이를 계속해서 만들어 바로바로 구워내는 둥 이것저것 작업을 하며 손님들을 상대하자 시간은 잘 갔다. 서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진혁은 냉동고 안을 확인했다.
밑준비한 미루아르 케이크가 차갑게 식어 잘 굳은 것을 확인한 그는 따로 적갈색 글라사주 캐러멜을 끓여내 준비했다.
진혁은 냉동고에서 꺼낸 사각 캐러멜 케이크 위에 글라사주를 뿌려 덮었는데, 한 번 깔끔하게 덮고 나서 매끄럽게 굳혔다.
본래대로라면 그 위에 마카롱을 올리고 끝이다. 하지만 진혁은 마카롱을 올린 후 그 위에 붉은색 기가 도는 스트로베리 초콜릿 시럽을 뿌렸다. 검붉은 시럽은 동글게 퍼지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굳었다.
“이건 뭐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임 쉐프, 이건…… 설마 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