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68화 (168/656)

제 168화

호평을 받아왔던 것은 알지만 자기 입으로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진혁이 이모를 뵈러 자리를 비웠던 탓에, 테이스팅 테스트도 유키코와 백진영이 진행했었다.

“저희 왔습니다!”

서창덕과 김가영, 예은이 나타나고 곧 유키코가 들어섰다. 그녀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베이커 쉐프, 어제 말씀하셨던 케이크 개발이 끝났나 보군요.』

『리처드라고 부르라니까.』

『호호호.』

아직 술이 덜 깨어 눈이 퀭한 백진영이 도착하고, 허둥지둥 들어온 김은동까지 모든 직원이 전부 출근했다. 당장 일부터 시작하기 전에 시식부터 하려며 리처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것부터 먹고 나서 일하자고.』

리처드 베이커는 다른 사람에게도 케이크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생각보다 달지 않네.”

빠른 영어로 누텔라가 어쩌고, 초콜릿 푸딩이 어쩌고 해서 인공적인 단맛을 상상했다. 하지만 입에 케이크를 넣었을 때 처음에 느껴지는 맛은 바닐라와 우유, 생크림의 부드럽고 중후한 질감이었다. 침과 섞여 바스러지며 살살 녹아가는 시트 안쪽에 콕콕 박혀 있는 미니 초콜릿 칩은 바삭하게 씹혔다. 단순히 초콜릿 덩어리만 넣은 것이 아니라, 씹힘 맛을 즐길 수 있도록 웨이퍼를 섞어 겹겹으로 만들어 넣어 놓았다. 조금 덜 단가 싶은 시점에 초콜릿이 딱 씹히는 크기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부드럽고 따뜻하며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진혁은 이번에는 가운데 크림을 떠서, 따로 잘라낸 빵 조각과 함께 입안에 넣었다.

“오.”

느끼하지도 뻑뻑하지도 않은 가벼운 휘핑크림은 치밀한 빵과 잘 어울렸다. 설탕을 적절하게 조절해 무겁게 달지 않은 크림에, 초콜릿이 섞여 중간중간 달콤한 케이크. 이 정도면 당장 메뉴에 올려놓고 시판해야 할 케이크다. 겨울 테마로 이번 겨울, 리처드 베이커가 있는 동안에만 한정적으로 판매한다는 점이 더 좋다. <한정>이라는 단어는 손님들의 마음을 더 설레게 할 것이다.

‘요즘은 이렇게 약간 덜 단 디저트가 유행인가.’

『하나씩 더 먹어 보라고.』

똑같이 생긴 케이크다. 임진혁은 케이크를 받아들면서 눈을 크게 떴다.

‘미묘하게 조금 더 가벼운데. 2, 3g 정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임진혁처럼 인간 무게저울인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같은 맛인데요?”

크림은 여전히 부드럽고, 케이크는 살살 녹는다. 톡톡 씹히는 초콜릿 칩까지 놓칠세라 꼭꼭 씹어먹으며 직원들이 의견을 나누었다.

“음~맛있어.”

“두 개째 먹어도 질리지 않네요.”

예은이 조심스럽게 말하고, 김가영이 감탄을 거듭하며 말했다.

“와, 진혁 쉐프님 케이크처럼 맛있는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베이커 쉐프님 케이크는 다른 식으로 맛있네요.”

서창덕이 놀렸다.

“언제는 임진혁 쉐프님이 세상에서 최고라더니, 이제는 방향을 바꿨어?”

“당연히 임진혁 쉐프님은 최고죠. 그런데 그냥 다른 맛인데. 진혁 쉐프님이 일상의 맛을 케이크에서 다시 재해석한다고 하면, 베이커 쉐프님의 케이크는 그냥 케이크 본연의 맛이에요.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 폭신폭신한 맛이요. 진짜 맛있네요.”

입맛 까다로운 김가영이 행복하게 케이크를 물어뜯었다. 그녀는 입가에 크림을 묻혀가며 순식간에 케이크를 먹어치웠다.

『잘 먹으니까 좋구만!』

“…… 흐음.”

임진혁은 살짝 눈썹을 추켜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크림 뒷맛이 살짝,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이거 바로 먹으면 괜찮은데, 좀 있으면 느끼해질 것 같기도 한데요.”

유키코의 의견을 마지막으로, 리처드 베이커가 당당하게 말했다.

『두 개의 케이크는 레시피는 같지만 사용한 재료가 달라.』

“예?!”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동안 진혁만이 침착하게 리처드 베이커가 같이 내민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맛을 보면서 짐작했던 사항이다.

“레시피?”

『이건 단순한 레시피가 아니지.』

영어로 쓰여 있는 서류를 진혁이 백진영에게 넘기자, 백진영이 하나씩 짚어가며 해석해 주었다.

“대단한데?”

진영이 감탄했다. 옆에서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던 유키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레시피가 적혀있지만 레시피만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서류에는 잭 프로스트 케이크의 재료와 조리방법, 드는 시간뿐 아니라 가격과 가격을 더 낮출 수 있는 방법까지 적혀 있다.

‘사용한 재료가 달라 원가율이 낮아.’

H & J에 들어오는 모든 달걀은 평화 일봉 농장에서 일봉의 아버지가 직접 주워오는 최상급이다.

풀어 키운 닭이 낳은 달걀로 일반 시판하는 달걀보다 훨씬 비싸다. 진혁에게 특별히 저렴한 가격에 준다고 해도, 개당 가격이 이미 3배 이상 차이가 난다.

리처드 베이커는 저렴한 달걀과 생크림, 밀가루를 사용해 새 케이크를 만들었다.

거기에 이 호텔 주방에서의 동선은 어떻게 해야 하며, 하는 동안 다른 무엇을 구우면 좋을지까지 분석해놓았다.

유키코의 봉래산 옥 가지 케이크와 함께 구울 수 있도록 온도까지 맞추었다.

그녀의 봉래산 케이크는 분명 훌륭한 케이크였지만 모양이 특이하고 온도가 조금 낮은 편이어서 다른 것들과 같이 굽는 것은 무리였는데, 윗단에서 봉래산 케이크를 굽고 아래쪽에서 이 케이크를 구우면 된다.

1일 판매 예상 가격과 1일 100개 팔 경우의 예상 이익까지 구체적인 숫자를 보며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흐음…… 오케이.”

‘과연 나 혼자밖에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데…… 최선의 재료를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진혁은 순간적으로 짧은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오케이? 오! 오케이!』

리처드 베이커의 주근깨 많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두 팔을 벌려 하늘 높이로 치켜들며 말했다.

『이제 진혁의 2배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시식을 마친 진혁은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손을 씻고 오늘의 작업을 시작하였다.

리처드 베이커가 미리 와서 해놓은 밑준비는 약간 스타일이 다른 점도 없지 않았으나 꽤 도움이 되었다.

『저번 라운드에서는 누가 탈락했지?』

리처드는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지만 진혁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리처드에게 전음을 보냈다.

《나도 여기에 지지 않을 케이크를 생각해 놓았으니까, 오늘 퇴근 후에 기대하라고》

리처드 베이커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지 않을 케이크는 지지 않을 케이크고, 퇴근은 퇴근이지. 맛은 내일 보면 되잖아. 왜 퇴근을 늦게 하라는 거야?』

그 이야기를 이해한 진영이 그 말을 해석해 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유키코가 웃으며 덧붙였다.

“퇴근 시간은 지켜달라고 하는데요?”

“일하는 시간에만 일해서 어떻게 나보다 2배의 속도로 일한다는 거지?”

‘작업시간 내에 부족하니까 일봉이처럼 양으로 때운다는 건가?’

임진혁은 순수하게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었는데, 백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유키코가 웃음을 터트렸다.

“블랙 기업이군요.”

“리처드 쉐프가 네 2배만큼 일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무리한 걸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고.”

그는 리처드 베이커에게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침 시간이고 밑준비를 해야 한다.

‘아니, 굳이 퇴근 후에 보여줄 필요도 없어.’

아침에 백진영에게 베이란 수프를 끓여주지 않았더라면 훨씬 빨리 와서 미리 만들었을 텐데,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을 해도 이미 늦었다.

어제 숙성시켜놓은 반죽을 조물조물 빠르게 성형하며 진혁은 마음을 정했다.예

‘명궁 예(?)’의 고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케이크. 처음에는 라즈베리나 구즈베리, 딸기를 통해서 붉은색을 내서 태양 빛깔을 만들까 했으나 마음을 바꾸었다.

‘붉은색이라고 해서 베리류로 가는 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야.’

그리고 과연 떨어진 태양이 붉은색이었을까. 그가 지금 만드는 태양은 화살을 맞고 추락해 피를 콸콸 쏟아내는 시체다.

어제 죽은 택시 기사는 충분히 피를 쏟아내지 못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어 버렸다.

재미있어 보여서 어떻게 재롱을 피우나 잠시 지켜보았을 뿐인데, 고작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이유로 겁에 질리더니 순식간에 희망을 잃었다. 삼류 무인이더라도 그 정도, 잠시는 버텨준다. 당장 죽일 것이라면 죽이면 되는데, 굳이 조종을 한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조종당하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기개가 있다면 조종당하는 사이에 자신의 의지로 몸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놈들이 많다. 하다못해 오룡의 말단에 오른 정파 꼬맹이도 그 정도는 한다.

‘너무 어이없이 죽어버렸지. 기껏해야 팔이 꺾인 것 뿐인데 그렇게 놀라다니, 원. 현대인들은 너무 나약해.’

’저문 태양’에서 황혼을 연상케 하는 컬러의 치즈 케이크를 만들까 싶기도 했지만, 어제 보았던 짙고 검은 굳은 피 색깔이 인상에 남았다. 그러니 커피 색깔 캐러멜을 진하게 하면 어떨까.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미니 미루아르 캐러멜을 구상했다. 미루아르 캐러멜(Miroir Caramel)이란 제누아즈 쇼콜라에 직접 만든 캐러멜과 캐러멜 마카롱을 얹은 케이크로, 본래 주영모의 시그니쳐 디쉬다.

제누아즈 쇼콜라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저 일반적인 제누아즈 반죽에 코코아 가루를 섞어 반죽하면 된다.

같은 요령으로 아몬드 가루나, 다른 것들을 섞는 다른 바리에이션도 많다.

진혁은 다른 밑준비를 하는 틈틈이 제누아즈 쇼콜라를 준비하고, 1cm 두께로 아예 따로 다섯 장을 구웠다.

스테인리스 설탕을 넣고 물을 부어 적신 후 젓지 않고 올리고 약한 불로 뭉근히 끓여낸다.

젓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거품이 나며 끓어오르는 시기에 캐러멜 색깔이 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젓는다.

캐러멜 색깔이 냄비 전체에 골고루 반영되었을 때, 미리 뜨겁게 데워둔 생크림을 부어가며 섞는다. 생크림과 캐러멜이 얼룩지지 않도록 곱게 저어야 하는데, 본래 오랜 시간을 들이며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작업이지만 진혁은 이를 수월하게 해결했다.

‘이건 무공이 있으면 편하지만 꼭 무공이 없어도 할 수는 있는 작업이야.’

캐러멜 크림이 완성되는 동안 불려 놓은 젤라틴의 물기를 짜고, 캐러멜 냄비에 투하하고 고루 젓는다.

제누와즈 쇼콜라를 만드는 것도, 캐러멜 크림을 만들어 다크 초콜릿을 섞는 것도 전부 평범한 제빵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일부러 진혁이 레시피를 그렇게 조정했다.

‘나나 유키코, 아버지 정도가 아니라…… 김은동 정도 되는 애들도 만들 수 있는 쉬운 레시피로. 쉽지만 맛있게. 원가는 낮게.’

여태까지는 어렵고 정교한, 새로운 기술을 선호했다.

세심하고 치밀한 테크닉을 익히고 재현하며 진혁 자신의 실력이 올라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혁이 배우고 익혀온 무공의 세계에 대입해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복잡하고 화려한 초식보다, 단순하고 본질을 꿰뚫는 한 번의 베기가 더 강할 수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