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7화
먼저 도착한 것은 경찰이었다. 근처를 순찰하고 있었는지 빠르게 도착한 경찰은 충격으로 인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택시의 트렁크(사실은 진혁이 허공섭물로 버튼을 눌러 친절하게 열어 둔) 안에서 다량의 덕트 테이프와 다양한 종류의 송곳, 드릴과 공구, 그리고 거대한 톱이 발견되었다. 말라붙은 검은색 피딱지는 인간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를 들이받으면서 트렁크가 열렸나 봐요.”
119와 경찰에 신고한 운전자는 하얗게 질려있었다. 구겨진 양복을 입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야근을 하다가 이 시간에 퇴근했다고 한다. 자기가 10년 동안 무사고 운전을 했는데 이건 전적으로 상대방 과실이라며, 그는 흥분해서 묻지도 않은 말을 떠들어 댔다.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으니 자신이 과실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는 둥 끊임없이 떠들다가, 구급차가 도착하자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고 주장했다. 택시 기사의 사망이 확인되어 구급차에 실려 영안실로 출발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진혁은 백진영을 등에 들쳐멨다.
“현상금 수배가 되어 있어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공짜 일이잖아.”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빨리 가서 케이크 구상해야 하는데 쓸데없이 시간이나 낭비하게 하다니.”
근방의 CCTV까지 확실하게 고장 내버린 다음에 그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음날 새벽.
“으으음…….”
백진영은 마른 입술을 물어뜯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간밤에 술을 취할 정도로 마신 결과 목이 메마르고 머리가 아프다. 그는 두개골이 쪼개지는 것 같은 두통을 무릅쓰고 눈을 떴다. 익숙하고 편안한 천장이 그를 반겼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일어났어?”
임진혁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진영이 당황해서 외쳤다.
“네가 왜 내 집에 있어?”
진혁이 정정해 주었다.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는 국자를 들고 있었다.
“아니, 형이 내 집에 있는 거지.”
무언가 냄비 요리가 팔팔 끓는 소리와 함께, 진한 향신료 향내가 부엌에서 풍겨온다. 백진영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원룸 형태의 오피스텔이므로 침대에서 몇 걸음 걸어가면 바로 부엌을 겸한 거실에 도착한다.
“일어났으면 이거 먹고 테스트 좀 해 줘.”
임진혁은 이미 그릇에 정체불명의 스튜를 옮겨 담고 있었다.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백진영은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마치고 보니 눈에는 핏발이 서 있고 얼굴은 퀭하다.
“잠깐, 나 세수부터 하고….”
얼굴을 씻고 나온 백진영은 식탁에 앉았다. 뼈째 붙은 고기가 듬뿍 담긴 새빨간 국물을 보고 그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왜 육개장을 빵이랑 같이 먹어야 해?”
백진영이 슬픈 얼굴로 임진혁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네가 만든 빵이야 엄청나게 매우 아주 맛있겠지만…… 난 육개장은 밥이랑 같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거 육개장 아니야.”
진혁이 자신 몫의 스튜를 그릇에 담으며 말했다.
“터키식 양고기 스튜, 베이란(Beyran) 이야.”
터키 동남부 지역에 있는 도시 가지안텝에서 맵고 맛있기로 유명한 전통요리다. 뼈가 붙은 양고기를 양파와 마늘, 월계수 잎, 당근과 함께 소스 팬에 올려 볶고 익히는데 육개장과 대단히 유사하다. 보통 밥이 아닌 빵과 함께 먹지만, 버터 라이스를 곁들여 먹기도 한다. 하지만 임진혁은 새로운 빵을 테스트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이 특별한 음식을 요리했다.
“육개장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육개장이 아니라고!?”
“그거 소고기 아니고 양고기야.”
“비린내가 하나도 안 나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신 백진영이 후하고 숨을 들이 내쉬었다. 그는 국물을 조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화끈한데?”
강렬한 향신료 향이 무슨 냄새인가 했더니 월계수 잎의 향기였다. 양고기의 비린내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큼지막하게 썬 당근과 양고기 조각을 떠서 씹는데 쫄깃하고 부드러웠다.
“야, 이거 맛있다.”
백진영은 얼큰한 국물을 사발째로 들이켰다.
“이제 좀 술에서 좀 깨는 것 같네. 그런데 이거, 밥이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겠다.”
진영이 입맛을 다시자 진혁이 빵을 내밀었다.
“빵을 먹어보고 다시 얘기해 봐.”
동그란 갈색 빵을 받은 백진영이 빵을 절반으로 갈랐다. 하얀 속살이 찢어지면서 살짝 늘어났다가 바로 끊긴다. 공기가 풍부하게 들어가 부풀어 오른 빵 안쪽은 그물처럼 흰 속살이 촘촘하게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다. 손끝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만 느껴도 이 빵이 얼마나 맛있을지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다.
“……!”
“그걸 이 국물에 이렇게, 찍어 먹는 거지.”
그냥 먹었을 때는 단순히 담백한 빵이었다. 하지만 이 담백했던 빵은 매콤한 국물을 흡수해서 놀랄 만큼 다른 맛을 냈다. 진혁이 보여준 대로 양고기 덩어리를 빵 안에 싸서 국물에 찍어 먹으니 씹히는 맛이 남다르다. 맵고 화끈한 기운이 식도를 통해 온몸에 전달되어 기운이 부쩍부쩍 난다.
백진영은 어제 있었던 모든 불화를 잊었다. 더 이상 화도 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천사들이 화해의 팡파레를 울린다. 그는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어제 운정 아저씨하고 삼촌은 잘 돌아가셨어?“
”알아서 잘 갔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러고 보니 여기 주방에는 오븐이 없는데, 이 빵은 어떻게 구웠어? 가게에서 구워서 미리 가져온 거야?“
백진영이 잠들어 있는 동안 적당히 화력을 조절한 삼매진화를 이용해 구워냈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다. 진혁은 대충 얼버무렸다.
”알아서 생각해.“
”방금 구운 것처럼 따끈따끈해서 설마, 했는데. 잘 데웠나 보네.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가게에서 도대체 언제 구운 거야?“
“형, 이빨에 고기 조각 꼈어.”
“나 치실 좀 줘 봐!”
백진영이 다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간 사이 임진혁은 씩 웃었다. 이 사이에 낀 고기를 제거한 진영이 나오자 진혁이 물었다.
“신메뉴로 나쁘진 않은가?”
“이걸 신메뉴로?”
”아침 한정 메뉴로 하면 어떨까 했는데…… 솥 하나를 끓여야 한다는 게 좀 부담스러운 일 아닌가 싶기는 해.“
”오…우리 임진혁 쉐프님께서 이제 그런 것도 챙길 줄 아는 쉐프님이 되셨어.“
”리처드 베이커 쉐프한테 듣고 배운 게 있지.“
진혁이 웃었다.
”나 혼자만 만들 수 있는, 고난이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빵도 분명히 필요할 때가 있어. 하지만 지금 가게에 필요한 건 나밖에 만들지 못하는 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일정 퀄리티 이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빵이야. 남들도 쉽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맛있는 빵.“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다.“
백진영이 흐뭇해하며 말했다.
”진혁이 너도 이제 예술가에서 사업가로 한 걸음 내디딘 것 같구나.“
”예술가?“
진영이 냉정하게 짚었다.
”너한테 제일 중요한 건 가게 매출이나, 유명세 같은 게 아니잖아.“
”…… 그렇지?“
”너는 네가 좋아하는 종류의 빵이나 과자를 새롭게 개발하고 그걸 사람들에게 먹이면서 좋아하더라고. 특이한 컨셉에 정교하고 화려한, 예술적이고 개인적인 작품을 디자인하는 걸 더 즐기고.“
듣고 보니 그렇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평범한 빵 만드는 것도 싫어하지 않아. 그다지 어렵지 않은 단순 노동을 반복하다 보면 지루할 때가 있기는 한데…….“
”잠깐, 제과제빵이 어렵지 않은 단순 노동이라고? 전국의 제과제빵 인들에게 사과해.“
”그게 아니고 나 같은 사람…… 아니 나처럼 체력이 좋은 사람은 덜 힘들다는 얘기지.“
”일단 그 정도로 납득해 주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두 사람은 베이란 수프를 먹었다. 진혁 역시 빵에 수프를 찍어 먹었다.
”육개장하고 비슷한 맛인데 담백한 빵에 찍어 먹는 게 어울리다니, 확실히 더운 나라 음식이야.“
남쪽 지방 음식은 더운 여름이 길어 염장 등과 같은 보존 기술이 잘 발달했다. 그만큼 음식에 간이 더 되어 있기도 하다. 백진영이 쉴 새 없이 감탄하며 수프를 먹는 동안 진혁이 말했다.
“형, 나한테 빚진 거 있다.”
“술 먹고 뻗은 날 데려와 줘서 고맙다. 진짜 고마워. 너 없으면 그냥 백씨 집에 갔다가 욕먹고 나왔겠지. 덕분에 한고비 넘겼어.”
‘그것 때문에 빚진 것만은 아니지만.’
어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백진영은 어제 하지 못한 이야기를 어렵게 다시 꺼냈다.
“나는 삼촌에게서 독립해서 가게를 차릴 생각이야. 나하고 같이 해보지 않을래?”
진혁은 상큼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내 가게에 형이 취업하라니까. 누굴 설득하려 들어.”
“…….”
“엇, 난 지금 갈 시간이다. 형이 알아서 설거지하고 나와.”
“알았어!”
서둘러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백진영은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겨 담았다.
‘자식, 나랑 같이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특이한 방식으로 하네.’
삼촌과의 갈등은 하루 이틀 쌓여온 것이 아니고, 바로 해결될 만한 것도 아니다. 그 갈등을 지켜봐 온 주위 사람들은 모두 백정흠이 옳다고, 삼촌 말을 믿고 따르라고 했다. 진영은 어제 임진혁이 자신의 편에 서서 이야기해주었을 때 크게 감격했다.
‘좋은 친구는 한 명이면 충분하구나.’
그는 서둘러 설거지를 마쳤다. 어서 진혁을 따라 출근해,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가게의 전체적인 상황도 고려할 수 있게 된 진혁이가 어떤 케이크를 만들지 진심으로 기대된다.’
백진영은 리처드 베이커를 생각하며 킥킥 웃었다.
‘3개월 동안 고용해서 디저트 서바이벌 쇼의 시청률 향상에 편승해 가게 순이익을 더 늘려볼까 했는데, 참으로 좋은 사람이 왔어.“
◈ ◈ ◈
『일찍 왔네』
가게에 출근한 임진혁을 반긴 것은 놀랍게도 유키코가 아니라 리처드 베이커였다.
그는 주방에서 밑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에 나갈 빵들은 반죽이 되어 발효 중이며 가게 내부는 진혁이 청소할 필요 없이 깔끔하고 깨끗했다. 피곤에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베이커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는 하늘색 컵케이크를 내밀었다.
『내 프로스트 잭 케이크가 완성됐다고』
“오, 기대되는데.”
영어는 모르지만 손짓 발짓은 이해할 수 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처드 베이커가 기뻐하며 말했다.
『맛보면 깜짝 놀랄 거라고!』
“먹어보라고?”
『먹어봐, 먹어봐』
손바닥만 한 연하늘색 케이크 위에는 부드러운 하얀 크림이 올라가 있고 그 위에는 서리 모양의 화이트 초콜릿 장식 하나, 눈 결정 모양의 파란색 초콜릿이 하나. 총 두 개의 초콜릿이 엇갈리게 놓였다. 단순하고 우아한 케이크를 받아든 진혁이 아무렇지 않게 종이 포장을 벗겼다.
“포장까지 생각했나…….”
『난 역시 대단하지?』
진혁이 감탄한 기색을 보이자 리처드는 의기양양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 케이크로 말하자면 누텔라와 사워크림, 바닐라와 초콜릿 푸딩을 사용해서 만든 거라고』
생각해 보면 진혁은 리처드 베이커가 만든 케이크를 ’맛보는 것‘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