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4화
“아니, 나도 진혁이 걱정은 하지. 나는 네가 진혁이의 은혜를 모르고 지금 걜 내몰 궁리나 하고 있는 줄 알고…….”
“삼촌이 나에 대해서 뭘 알아요?!”
항상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장애인 조카였다. 카페를 하면 좋다던데 커피를 배워 올래? 하니까 배워오고, 여기서 일해라 하니까 일했다. 진혁이랑 같이 가게를 하면 좋겠다 하니 그렇게 했다. 그런 조카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걸 본 백정흠이 눈을 껌뻑껌뻑했다. 갑자기 죽은 동생이 진영이에게 겹쳐 보였다. 조카는 더 이상 여덟 살짜리 어린애가 아니다. 이미 성인이 된 지 한참 됐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어떻게 했는데…… 너야말로 삼촌한테 그렇게 소리를 지를 수가 있냐?!”
“저를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매도하셨잖아요.”
백진영은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가슴 속 차오르는 깊은 분노를 억누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은혜를 아니까, 그럭저럭 가게를 운영했죠.”
“진영아.”
“소영이 누나랑 지환이 형이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세요? 내가 거기에 가게까지 훌륭한 매출을 내면 어떻게 되겠느냐고요?”
“그럴 리가 없어, 애들이 너를 많이 아낀다고.”
“두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영은 서류를 안은 채 등을 휙 돌렸다.
“삼촌이 투자자지만, H & J의 사장은 접니다. 제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대로 운영할 거예요. 삼촌의 생.명.의. 은.인.인 임진혁이 착취당하지 않는 방향으로요.”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백정흠은 입을 딱 벌리고 문을 바라보았다.
“저놈이 미쳤나, 뭘 잘못 먹었나.”
세상 풍파에 행여 마음이라도 다칠까 봐 온실 속에서 곱게 잘 키운 조카다. 그러잖아도 사고 탓에 다리도 저니까 밖에서 일하다 괄시받을까 봐 일부러 가게도 열어 주었다. 가게 매출이 잘 나오지 않아 솜씨 좋은 쉐프도 데리고 오도록 했다. 가게가 약간 매출이 잘 나온다고 갑자기 사람을 확 늘리는 실수를 하니 금석 같은 조언을 몇 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허허허, 참. 사람 뽑기는 쉬워도 자르기는 어려운데, 아직 뭘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고.”
백정흠은 허탈함에 한숨을 푹푹 쉬었다.
“머리 검은 짐승 들여봤자 소용이 없다더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다.
“형님 만나서 술이라도 마셔야지, 원.”
◈ ◈ ◈
백정흠이 임운정에게 연락하는 동안, 백진영은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진혁아, 녹화 끝났어?”
“응. 무슨 일이야?”
“나랑 술 좀 먹자.”
“어디서? 내가 그쪽으로 갈까?”
“음…… 아니야, 거기에 있어. 어디로 가면 되냐면.”
백진영이 가는 길을 설명했다. 두 사람이 만날 장소는 방송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횟집이었다.
“겨울에 제철인 생선이 있어. 괜찮은 가게야.”
백진영이 소개한 가게는 구석에 있는 허름한 횟집이었다. 동네를 골목골목 들어서 진영이 안내한 횟집까지 도착한 진혁은 말없이 기다렸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신기하군.’
그는 눈을 감고 오늘 있었던 대회를 복기했다.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조그맣게 <겨울철 제철 대방어 입수!>라는 손으로 쓴 종이가 붙어 있다. 진영이 허겁지겁 뛰어와 임진혁에게 인사했다.
“잘 찾아왔네?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어?”
“기다렸어.”
“야, 그럴 때는 아니라고 해 줘야지…… 일단 들어가자.”
백진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안에서는 머리가 희게 센 주인이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붉은색 앞치마를 두른 가게 주인은 진영을 알아보며 반겼다.
“어이구, 백씨네 조카. 오랜만이네? 오늘은 삼촌이 아니라 친구랑 같이 왔어?”
“네. 이모, 여기 중짜로 하나 주세요. 소주도 한 병 주시고요.”
“그럼, 그럼.”
좁은 가게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딱 두 명 앉을 자리만 구석에 비워져 있다.
“네가 여기 앉아라.”
백진영이 안쪽 온돌 자리를 진혁에게 양보하려고 하자 진혁이 사양했다.
“아니야, 형이 거기에 앉아.”
다른 자리는 문 바로 앞이라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자리였다. 한서불침인 진혁보다 온도의 고하에 민감한 평범한 인간인 백진영이 따뜻한 곳에 앉는 것이 더 낫다.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진영은 거기에 감격했는지 울컥하며 콧물을 훌쩍거렸다.
“…… 고맙다. 너밖에 없어.”
예상외의 격렬하고 감정적인 반응에 임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이 시대의 20대 후반, 금수저 남자가 어떤 고민을 할지 생각해 보았다. 무림 세가 출신의 금수저 녀석들을 만났을 때 녀석들이 어떤 식으로 마음을 털어놓았더라. 무림의 오룡(五龍)이라 불리던 놈들은 전부 한목소리로 애걸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진혁은 그들이 더 이상 생존을 원치 않게 되도록 깔끔하게 그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그렇지만 백진영에게 그런 방법을 쓸 수는 없다.
“대체 무슨 일인데? 내가 고민 해결은 잘 해.”
백진영이 웃으며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 네가 못하는 게 어디에 있겠냐.”
씁쓸함이 깊게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어 있지?’
아주머니가 미역국을 한 그릇씩 내왔다.
“추운데 이것부터 먼저 들지.”
‘회에 미역국을 곁들인다고?’
기름기 없이 맑은 투명한 국물에 잘게 썰린 진초록 미역이 풍성하게 담겼다. 양은그릇을 받아들자 그릇에 실린 온기에 손이 따끈하다. 백진영은 막걸리라도 되는 것처럼 미역국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휴, 이 국 때문에 여기에 온다니까요.”
“그래그래, 얼마든지 더 줄 테니까 필요하면 말해.”
아주머니가 푸근하게 웃었다. 진혁 역시 미역국을 한 수저 떠서 맛보았다. 잘 손질된 미역을 후루룩 마시자 목구멍 깊숙이 온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밀려온다. 진혁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괜찮군.’
코끝까지 빨개졌던 백진영도 몸에 조금 온기를 되찾은 듯, 표정이 밝아졌다. 미역국을 맛보고 소주를 한 잔씩 마시고 난 다음에 주메뉴인 회가 나왔다. 기름기가 풍부하고 희며 가장자리가 살짝 붉은 살, 그리고 속살이 희며 위쪽 피부가 붉게 들어 있는 살, 마지막은 기름기가 적고 새빨간 살점이다. 진혁이 처음 보는 부위를 보며 물었다.
“이건 소고기 육회 같이 생겼는데…… 요?”
“걔가 사잇살이야. 방어 한 마리에 아주 조금 있는 부위인데, 풍미가 아주 좋아. 맛도 육회랑 비슷한데 젊은 총각이 아주 잘 보네.”
백진영이 거들었다.
“사잇살은 기름이 아니고 소금에 찍어 먹어야 돼.”
“흠.”
참치도 아닌데 살이 붉다. 진혁은 사잇살 한 점을 들어 올렸다. 양식장에서 기르는 생선이라면 양식장 특유의 내음이 비리게 훅 끼쳐오는데, 이것은 바다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신선한 바다 향을 맡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신강에서는 생선을 날로 먹는 일이 없었지.’
보통은 요리를 해서 먹는다. 특별히 회를 즐기는 편이 아닌 진혁은 굳이 날것을 찾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생충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절대고수라고 해도 회충을 일부러 먹고 싶지는 않은 법이다.
소금을 얼마나 찍을지 결정하려면 먼저 민 맛을 알아야 한다. 진혁은 신중하게 제일 작은 조각을 골랐다. 먼저 한 입 떼어 맛을 보는데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호오.”
왜 생선 살을 소고기 육회에 비교하는지 궁금했는데 바로 알 수 있었다. 조직이 치밀하고 살결이 쫄깃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되겠군.’
소금을 듬뿍 찍을 필요는 없다. 아주 조금, 이 맛을 끌어올려 줄 만큼이면 된다. 개미 눈곱만큼 가루 소금을 찍어 바르는 진혁을 보고서 백진영이 킥킥 웃었다.
“잘 먹네. 맛있어?”
“응.”
이 다음은 하얀 살이다. 하얀 살점은 딱 보기에도 사잇살보다 육질이 연해 보인다. 진혁의 젓가락이 움직이는 방향을 본 백진영이 설명해 주었다.
“그게 대뱃살이야. 참치 뱃살처럼 지방이 많고 조금 느끼할 수 있어. 나는 청양고추를 올려 먹는 걸 좋아하는데 와사비를 올려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나씩 해 먹어 봐.”
직접 간 와사비를 손톱만큼 찍어 올려 대뱃살을 입안에 넣자, 화악 하고 퍼지는 매운맛이 혀끝까지 짜릿하다. 연하게 퍼지는 살결과 어울리는 톡 쏘는 맛은 확실히 진혁의 취향이었다. 그 다음에는 진영이 권한 대로 청양고추 토막을 올려 대뱃살을 맛보았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게, 진영이는 이런 게 장점이지.’
백진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권유할 때에도 강요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있다고 설명한 후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혈연인 백정흠이 ‘이것이 좋다’며 자신이 보기에 좋은 방향을 대놓고 알려주고 그렇게 하는 것을 종용하는 것과 확연히 구분되는 태도다.
“그쪽이 등살. 등살은 근육이 많아서 담백해. 왜, 닭은 두 발로 땅을 짚고 돌아다니니까 다리 근육이 쫀쫀하고 지방이 없잖아. 내 생각에는 생선들이 등지느러미로 헤엄치니까 등 쪽에 근육이 많은 게 아닌가 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 걸 다 누가 알려줬어?”
“…… 삼촌이.”
백정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백진영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한순간 대답하기 꺼려하는 그 기색을 눈치채고 진혁이 물었다.
“여기가 큰 사장님이 주로 오시는 가게인가 봐?”
“너까지 왜 큰 사장님 작은 사장님 하냐?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눈앞에서만 그렇게 불러주면 됐지.”
“와-순진한 줄 알았던 우리 진혁이가 그렇게 약은 모습도 보이네.”
소주 한 잔에 얼굴이 시뻘게진 백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임진혁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으잉?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왜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하는지 알겠다. 진영은 다시 살 한 점을 집어서 진혁이의 앞접시에 올려 주었다.
“사잇살 더 먹어. 이게 아주 귀한 부위야. 다 먹으면 매운탕도 시키자. 여기 매운탕도 맛있어.”
“…… 그래.”
“너 인마, 나중에 삼촌이랑 나랑 갈라져서 가게 차리면 누구 따라올 거야?”
아마도 이 질문이 제일 중요하다. 진혁이 웃었다.
“질문이 잘못됐어, 형.”
“뭐?”
“난 내 가게 차릴 건데. 형이 그때 따라오고 싶으면 오든지, 내가 고용해 줄 테니까.”
“와, 임진혁. 무서운 자식.”
“남자는 야심이 있어야지. 형도 언제까지 삼촌 아래에서 있을 건데?”
백진영이 씩 웃었다.
“두고 봐라. 네가 혼자 독립할지, 아니면 내가 새로 차리는 가게에서 독립하게 될지. 네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가져와 주지.”
“그건 그때 가봐야 알지.”
주거니 받거니 하고 술잔이 오고 간다. 진혁은 낯익은 인기척을 느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과연, 두 사람이 즐겨 가는 가게인가.’
“그런데 너, 사람들 다 데려온 이유는 뭐야? 요즘 갑자기 인원이 확 늘었잖아. 사실 우리 가게가 흑자를 많이 보고 있었으니 그 정도는 흡수할 수 있지마는.”
“배우려고.”
“응?”
“유키코 김 쉐프는 새로운 걸 개발할 때 세부적인 걸 잘 하고, 리처드 베이커 쉐프는 큰 그림을 잘 그려. 둘 다 뛰어난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걸 다 배우면,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
“…… 그런 이유였구나.”
갑자기 등 뒤에서 백정흠이 불쑥 나타나 말하자, 백진영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