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3화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대답하자, 스텔라 위스커스가 말했다.
“그럼 지금 나가죠, 발표해야 하니까요.”
◈ ◈ ◈
한편 중간 인터뷰를 하러 간 출연자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유키코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제가 다녔던 학교는 아주 오래된 학교입니다. 뒤뜰에는 유서 깊은 일본식 전통정원이 있었어요. 그 정원의 모토는 항상 ‘모든 것은 조화로워야 한다’였습니다. 제가 무엇을 고려하지 못했는지 심사위원분들의 일침을 듣고 나서 깨달았어요.”
그녀는 눈을 힘차게 깜빡이며 눈물을 삼키려 애썼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렸고, 앞으로는 더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교과서 같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다른 출연자들 역시 각자의 카메라를 마주했다. 다음 차례인 이용태 쉐프의 경우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나는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호텔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꽤 오래됐지요. 제과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런 말까지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우습지만 저는 좋은 결과를 낼 자신이 있어서 일부러 참가자 편으로 나온 거거든요.”
이마에 주름이 깊어진 채 그가 쓸쓸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제과 대회의 심사 위원으로도 자주 활동합니다. 심사위원 자리에서 어떤 기준으로 보는지 아니까, 충분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이용태가 고개를 숙였다.
“내가 왜 이렇게 어리석었나, 하는 생각이 들고.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데, 괜히 남을 따라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마음에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짚어 가렸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이, 그가 얼마나 동요했는지 선명히 보여준다.
“틀림없이 패자부활전을 할거라 생각합니다. 잘 해봐야죠.”
반면 다른 참가자들은 좀 더 여유가 있었다. 루이스 강은 씩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니스 해변이 진짜 좋아요. 거기서 놀았던 기억은 전부 행복한 추억입니다. 사람이 바다보다 더 많을 때도 있으니까, 저희는 일부러 성수기 조금 전에 갔거든요. 그래도 햇빛이 뜨거워서 전혀 춥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행복한 기억을 나눠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니스를 떠올리며 만들었죠. 별로 그게 전달된 것 같지는 않아요. 특징적인 뭔가를 해야 했는데, 그게 좀 아쉬울 따름입니다.”
카메라 앞에 선 브라이언 신 역시 인터뷰하는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양손을 펼쳐가며 즐겁게 이야기했다.
“예, 문어를 넣은 문어 케이크는 전부터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아이템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약혼녀인 제시와 함께 일본의 오사카에 여행을 가서, 거기서 다코야키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봤습니다. 한국의 붕어빵에는 붕어가 들어있지 않은데 일본의 문어빵에는 문어가 들어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어서, 이걸 가지고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이희주가 마지막에 인터뷰할 사람은 임진혁이었다.
“이번에 또 엄청난 걸 만들었던데요, 임진혁 쉐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실패했지만 시간 내에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실수는 3개를 각각 틀에 굳혀 만들지 않고, 너무 커다란 틀에 굳혀 만든 것. 결국 나중에 작은 틀로 옮겨야 했다. 이때 틀을 옮기는 과정에서 틀을 은근슬쩍 강기의 실로 짠 그물로 감싸 뭉그러지지 않게 하지 않았더라면 실패했을 것이다.
두 번째 실수는 미리 준비해놓은 소시지를 버린 것. 소시지의 양이 모자라서, 발목을 3개 만들 수 없었다. 2개가 똑같고 하나만 다르면 이상할 것 같아 임기응변으로 미리 만들어놓은 발목 하나를 좀 더 섬세하게 깎았다. 차이를 줄까 싶어서 발톱도 칠해줬다. 라즈베리즙을 한 방울 콕콕콕 찍어주면 된다. 즙이 착색되지 않고 흘러내릴까 봐 강기의 실로 붙들어 매자 원하는 위치에 잘 남아있어 주었다.
‘제빵이란 어려운 작업이라고, 다들 무공 없이 어떻게 하나 몰라.’
이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사실 작업하시는 과정을 저희가 지켜보았는데, 실수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요. 미리 계획한 것처럼 차근차근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이번 케이크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요?”
‘표현하고자 하는바?’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짧을 아버지와 어머니, 진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진희보다 더 짧게 살 큰이모의 여생을 떠올렸다. 그가 차분히 답했다.
“열심히 살자는 거죠. 보통 사람의 삶은 너무 짧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요.”
“푸핫, 그런 철학적인 주제에서 나온 거였군요.”
이희주는 의외의 대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확실히 사람이 살다 보면 언제 어디에서 무슨 사고가 날지 모릅니다. 열심히 살면 좋겠죠. 임진혁 쉐프는 지금 열심히 살고 계십니까?”
진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처럼 태평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
‘남들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일하고 있으니까, 열심히 살고 있는 건 아니지.’
그나마 이전에는 주방 일을 모르는 백진영과 함께 일하면서 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일했는데, 요즘은 유키코와 김은동, 거기에 리처드 베이커까지 끌어들이고 나니 미묘하게 일하는 속도를 조금씩 늦춰줘야 했다. 원래 예측했던 거긴 하지만 성가시기는 하다. 진혁을 질타하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근무하게 되면서 간간이 주방을 비우고 본가에도 내려갈 수 있으니까.’
유키코가 함께 일하지 않았다면 큰이모를 뵈러 지방에 내려가는 것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마워하고 있다.
“으잉?! 열심히 살고 계시지 않는다고요, 음, 그렇습니까.”
예상외의 답변에 눈을 동그랗게 뜬 이희주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에 만드신 케이크에는 만족하십니까?”
“그때는 만족했지만, 지금은 다르죠. 사회자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좀 더 다른 식으로 표현했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어요. 그 케이크를 당장 만들고 싶네요.”
다시 A4 용지에 케이크 모양을 스케치하는 진혁을 보며, 놀랍다는 듯 이희주가 말했다.
“열심히 살고 계시는 게 맞네요. 이거, 오히려 제가 본받아야겠습니다. 우리 임진혁 쉐프님만큼 열정적인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거, 진영 형한테도 들었던 얘긴데. 난 별로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데.’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자꾸 남들이 열심히 산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까 혼란이 온다. 진혁은 생각했다.
‘실은 내가 정말로 열심히 살고 있는 건가? 그냥 다른 사람들이 다 게으른 거고.’
◈ ◈ ◈
한편, 백진영은 그때 백정흠과 마주하고 있었다. 진혁도 유키코도 없는 날, 가게의 정기 휴일이다. 백정흠의 사무실에 불려온 백진영이 무슨 일인가 하고 멀뚱멀뚱 서 있는 동안 백정흠이 호통부터 쳤다.
“뭐 하자는 짓이냐.”
사장 의자에 앉아 있던 백정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내동댕이쳤다. H & J 베이커리 앤 카페의 인건비 내역 서류가 바닥에 흩어졌다. 백진영은 황급히 허리를 숙여 서류를 주웠다.
“예?”
“또 새로운 쉐프를 데려왔잖아, 그것도 외국인으로.”
“리처드 베이커 쉐프는 3개월만 있다가 갈 겁니다. 지금 디저트 서바이벌 쇼 시청률이 올랐을 때, 함께 오면 가게에도 충분히 도움이 될 거고요.”
“하지만 외국인이지. 단기 취업 비자 수속에, 의료보험까지. 추가비용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건 생각했냐고. 지금 인건비 비중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는 알고 있어?”
“예, 하지만 지금 판매 내역이랑 보면 충분히…….”
백진영이 설명하려고 했으나 백정흠이 말을 끊었다.
“그 가게에서 나오는 매출은 그대로인데, 왜 자꾸 사람을 늘려? 애초에 진혁이 한 명이 책임지고 일한다고 해서 인센티브 조건으로 계약한 건데.”
“그거야 그렇지만, 진혁이가 너무 힘들게 일을 많이 하니까요…….”
“진혁이 본인이 그렇게 얘기했어?”
“본인이야 괜찮다고만 하죠.”
“그런데 왜 나대서 사람을 늘려? 그 여자 쉐프도 그래, 본봉을 적게 잡으면 뭐해. 보육원이고 뭐고, 복지해주느라 돈은 나갈 만큼 다 나가고 있는데.”
“삼촌!”
백진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벌써 굽히면서 쭈그러들었을 조카가 성을 내려 하자, 백정흠이 노기등등하게 말했다.
“내가 네 속셈 모를 줄 알고. 지금 진혁이 밀어내고, 다른 쉐프들 데리고 일하려는 거 아니냐?”
“예에에에?!”
터무니없는 오해에 백진영이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영아, 검은 머리 짐승이라도 은혜는 알아야지. 솔직히 네가 운영하던 카페, 커피만 조금씩 팔면서 매출도 안 나오고 있던 거 진혁이가 와서 구원해 준 거 아니냐. 그런데 그 보은을 할 생각은 않고, 어디 다른 애들을 하나씩 하나씩 데려와서 진혁이 자리를 없애려 들어?”
“잠깐, 잠깐. 삼촌,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랫입술을 내밀고서, 백진영이 항변했다.
“제가 진혁이를 내쫓을 리가 없잖습니까?! 막말로 지금 진혁이가 혼자 이끌고 있는 카페인데요.”
“네 음료 평도 꽤나 좋다던데. 이미 진혁이가 ”
백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어요? 소영이 누나? 지환이 형?”
백정흠의 딸과 아들, 자신의 사촌들이다. 화응 제과제빵기계공업의 다른 부서에서 각각 업무를 맡아 일하고 있다. 두 자식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백정흠이 움찔하자, 백진영이 울분에 차 외쳤다.
“누나랑 형은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내 커피하고 진혁이 빵은 아주 잘 어울려요. 다른 쉐프를 메인으로 해서 같이 가게를 하는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고요!”
“그러면 왜 자꾸 사람을 들여?! 그것도 네 입맛대로 안 해줘도 될 복지까지 해 가면서!”
백진영이 주먹을 움켜쥐며 분을 삭였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소영 누나하고 화웅 여직원들, 다 보육원에 애들 맡기면서 다니고 있잖아요? 삼촌이 여기에 맡겨도 된다고 허락했잖습니까. 그거 전제로 입사한 거잖아요!”
“애가 없으면 안 해줘도 될 복지인데, 왜 굳이 골라서 애 있는 사람, 그것도 외국인을 뽑냐 이거지!”
“진혁이가 인정한 쉐프니까요!”
벽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 답답함에 백진영이 울분을 터트렸다.
“진혁이하고 파트너쉽이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걔는 기계가 아니니까! 걔가 혼자서 가게에서 일하면 돈이 덜 들겠죠. 하지만 그러다가 걔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리처드, 삼촌이 말하는 외국인 쉐프도 첫날부터 진혁이를 걱정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업무량을 혼자 소화하고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