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1화
그녀가 심호흡하며 어깨를 폈다.
‘괜찮을 거야. 내 실력을 보여줄 차례야.’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접시를 들고 나왔다.
“보시는 대로 초콜릿 도넛과 멜론 빵 거북이, 그리고 특별한 소스를 쓴 롤케이크입니다.“
하얀 접시 위에 파란색 시럽으로 드문드문 그려놓은 바다. 그 위에 색색의 초콜릿 도넛이 튜브처럼 떠 있다. 튜브 도넛 사이사이에 올라간 생물은 인간의 어린아이가 아닌, 초록색 거북이였다. 멜론 빵 거북이와 초콜릿 도넛이 빙 둘러싼 가운데에는 롤케이크 섬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이 롤케이크는 보송보송한 노란색이 아니었다. 살짝 갈색으로 보이는 이 롤케이크는 보통 통 케이크보다 더 색깔이 짙고 익숙한 향이 풍겼다.
“특별한 소스가 뭔지 궁금하네요.”
유키코가 한 조각 잘라서 가지고 온 후에야 심사위원들은 이 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말한 것은 이 조미료에 익숙한 한국인 쉐프, 주영모였다.
“놀랍다. 이건 간장 버터 롤케이크입니다. ……간장을 빵에 쓰다니.”
주영모 쉐프가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생각에 잠겼다.
“간장과 버터는 환상적인 궁합이죠. 이거 딱 그 맛인데…… 익숙한 맛.”
“예, 이번에 새로 개발했습니다.”
유키코가 웃었다.
“일본에서는 팥이 들어간 당고 위에 간장 양념을 해서 먹는 일이 많아요. 빵을 위한 간장도 따로 팔리고 있고요.”
“흔한 맛을 독특하게 해석했군요. 나쁘지 않아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아드레아노 존부가 덧붙였다.
“초밥이 아닌 빵에서 간장 맛을 느끼다니 신기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다른 빵들도 먹어봐야죠.”
뒤늦게 주영모 쉐프가 외쳤다.
“그 맛입니다! 간장 버터 비빔밥. 디너 코스 끝나고 다음 날 식사 밑준비까지 하고 퇴근한 쉐프에게 아주 좋은 요리죠.”
이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저도 좋아합니다. 저처럼 혼자 사는 남자들에게 딱 좋은 음식이죠.”
“간장 버터 비빔밥?”
스텔라와 아드레아노가 궁금해하자 이희주가 설명해 주었다.
“기원은 명확지 않은데, 6.25 전쟁 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가염 버터를 처음 얻은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어요. 갓 지은 따끈따끈한 밥에 짭조름한 버터 한 조각을 올리고 간장을 조금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요리에요. 살살 비벼 먹으면 아주 맛있습니다.”
“이희주 사회자님은 직접 밥을 해서 드시는군요. 전 햇반에 버터를 올리고, 전자레인지에 돌린 다음에 간장을 뿌리는데.”
다들 각자 간장 버터 비빔밥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왁자지껄하는 사이, 유키코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거 일본에도 있어요. 밥에 버터를 올리고 간장을 뿌려서 먹습니다. 하지만 비비지는 않고, 버터를 조금씩 나누어 밥 위에 올려요.”
“아니, 참맛을 모르시네. 버터는 당연히 밥이랑 비벼서 쌀알에 스며들게 해야지. 그리고 굴 소스를 조금 뿌리면 그게 진짜 참맛인데.”
주영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유키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비비지?’
“녹아들지 않은 버터와 탱탱한 밥알의 조화를 모르시나요?”
이희주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자, 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유키코 쉐프님, 도넛과 멜론 빵을 나누어 주세요.”
그녀는 도넛과 함께 세 마리의 거북이를 하나씩, 심사위원들 앞에 가져다주었다. 한 사람당 하나씩 초콜릿 도넛 하나, 멜론 빵 거북이 하나씩이다. 멜론 빵 거북이의 바삭바삭해 보이는 쿠키 등딱지 위에는 하얀색 설탕이 뿌려져 있고, 튜브 형태로 튀긴 도넛 위에는 화려한 원색의 초콜릿이 지그재그로 장식되어 있다.
먼저 스텔라 위스커스가 빵칼을 들어 거북이를 절반으로 갈랐다. 폭신폭신하고 촉촉한 빵 가운데에서 걸쭉한 멜론 크림이 흘러 접시 위에 고였다. 크림을 묻힌 빵 조각을 포크에 찍어 맛본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미묘하게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번에는 포크가 아닌 손으로 빵을 죽 찢어내자 하얀색 속살이 먹음직스럽게 갈라졌다. 빵만 따로 먹어보고 나서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쿠키는 바삭바삭하고 빵은 좋아요. 하지만 크림은 인공적인 멜론 향이 대단히 강해서 호불호가 갈리겠어요. 이건 이 빵 종류 자체의 문제점 같은데.”
그녀가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스텔라가 멜론 빵을 탐색하는 동안 주영모는 도넛에 먼저 손을 댔다. 자타가 공인하는 도넛 장인 그는 자기가 만든 도넛을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도넛을 먹는 것도 좋아한다. 초콜릿 도넛이라면 더욱 좋다. 그는 도넛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손에 들고서 한입 물었다.
“호.”
잘 튀겨진 도넛 빵의 쫄깃쫄깃한 식감이 지나가고 파도처럼 몰려온 다음 맛은 달콤한 초콜릿이다. 느끼함 없이 어울리는 맛에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며 끝이 치켜 올라간다. 입술에 초콜릿을 덕지덕지 묻힌 주영모가 씩 웃었다.
“도넛은 합격.”
조마조마해 하며 지켜보고 있던 유키코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까지뿐이었다. 아드레아노 존부는 앞선 두 심사위원처럼 빵을 따로따로 먹지 않았다. 그는 간장 롤케이크를 한 조각, 초콜릿 도넛 조각 일부, 그리고 멜론 빵 조각을 한꺼번에 놓고서 파란 시럽에 묻혔다. 바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려놓은, 설탕 시럽이다.
세 가지 빵과 준비된 시럽을 한입에 넣은 아드레아노 존부가 희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각각은 다 맛있는데, 전체적인 조화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유키코가 준비한 빵은 총 세 종류다. 무지개색 초콜릿 도넛, 멜론 빵과 간장 버터 롤케이크. 그렇지만 세 가지를 한꺼번에 먹으려 하면 맛이 엉켰다.
“그리고 이 블루 슈가 시럽은 다른 세 빵과 맛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구상 단계에서 맛을 고려하지 않고 외현적인 면만 고려한 거죠. 도넛에 바르면 지나치게 달고, 간장 롤케이크와는 아예 어울리지 않습니다. 멜론 빵과는 어색합니다.”
다른 이들이 바다를 케이크나 푸딩, 파나코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재현하고 있을 때 그녀는 가장 단순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전략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결과를 낳았다. 유키코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었다.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쥔 주먹이 극히 미세하게 떨렸다.
‘망했다.’
아드레아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름에 튀긴 도넛과 초콜릿, 그리고 크림이 든 멜론 빵, 간장 롤케이크 각각의 맛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전체적인 조화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방금 전에 문어와 생선 살 페이스트, 그리고 파운드 케이크의 조화를 이루어낸 브라이언 신이 있기에 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은 루이스 강이었다. 그의 케이크는 가운데에 눈에 띄는 인물상이 있어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다. 가운데에 있는 인어가 매우 커서, 곁에 있는 크루아상 소라들은 눈길이 가지 않았다.
“버터 크루아상 소라를 곁들인 브라우니 인어 케이크입니다.”
루이스 강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유혹적이고 섹시한 인어가 이 케이크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죠.”
그 자신만만한 선언을 들은 주영모 쉐프가 말했다.
“……전혀 유혹적이지 않은데, 진심으로 유혹적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루이스가 만들어놓은 인어는 묘하게 눈꼬리가 처지고 입꼬리가 내려가 있었다. 디테일이 낮고, 표정이 처져 있으니 죽기 직전에 왕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처럼 보였다. 루이스가 씩 웃었다.
“맛으로 평가해주십시오.”
“그래요, 한 조각씩 서빙 부탁드려요.”
스텔라 위스커스의 말에 루이스가 바로 칼을 들어 케이크를 잘라냈다. 인어의 물고기 꼬리가 바로 잘려나갔다.
“거길 자르는군요?!”
“이 안에도 브라우니입니다. 퐁당하고 잘 어울립니다.”
인어 꼬리 브라우니 케이크는 조각난 상태로 사이좋게 세 사람에게 나누어졌다.
“아주 진한 브라우니 케이크군요.”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데, 뭘 넣었죠?”
“초콜릿에 씁쓸한 맛을 첨가하기 위해 커피를 추가했습니다. 씁쓸한 맛이 잘 살아날 수 있게 하려고 미미하지만 라즈베리 역시 넣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맛이 잡히는군요.”
“라즈베리와 커피가 없었다면 너무 단순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크루아상은 정말로 완벽한데.”
“과연 정통파 크루아상이군요. 뜨겁고 부드럽고 아름답습니다.”
“하하!”
심사위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성공인가?’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루이스는 어쨌든 크루아상은 칭찬받았기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쉐프, 지난 라운드의 우승자, 임진혁 쉐프.”
“임진혁 쉐프는 이전에도 대자연을 테마로 한 디저트에서 강세를 보였죠.”
“엄청나게 예술적인 물건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제가 카빙 아트나 장식 심사 대회에 나온 줄 알았다고요.”
“하하하! 심사위원님이 자기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심사하는지도 헷갈릴만한 완성도를 보여주었던 임진혁 쉐프, 모두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혁이 완성된 케이크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희고 동그란 덮개를 들어내자, 안쪽에 있었던 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에 젖어 바다에 떠 있는 토막 난 발목을 보고 스텔라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물결치는 파도는 발목에서 흘러나온 새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색깔은 점차 보랏빛이 되어 남색 바다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발가락에 칠해져 있는 새빨간 매니큐어까지, 리얼한 색깔이 그로테스크해서 시선을 확 끌어당긴다.
“이건…… 저희…… 지금 할로윈인가요?”
스텔라가 중얼거리고 주영모 쉐프가 지적했다.
“설마 저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바다 생물이라고 할 셈은 아닐 텐데. 임진혁 쉐프, 여기 생명체가 어디…… 아.”
“바다 생명체가 하나, 있기는 있군요.”
아드레아노 존부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한쪽 면에 드러나 있는 상어의 꼬리지느러미가 있었다. 파도 사이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고 색깔도 비슷해, 세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구별하기 힘들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어디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특징적인 꼬리를 상어 이외의 다른 무언가로 착각할 수는 없다.
“이건 덩어리가 크면 맛이 없을 수 있어서, 일부러 개인별로 준비했습니다.”
진혁이 세 개의 미니 디저트를 내놓았다. 다른 두 개는 파도 위에 떠 있는 부위가 달랐다. 하나는 손목, 다른 하나는 좀 더 굵은 남자 발목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상어 꼬리도 자세히 보면 셋 다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바닷속에 있는 상어를 상상해 주세요.”
진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복숭아 맛 상어와 과일 및 견과류 파나코타입니다. 어떤 게 들어있는지는 맛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루이스 강처럼 여기 상어에 상어 지느러미가 들어가 있는 건 아니죠?!”
“복숭아가 들어있습니다. 그 점은 염려 마시죠.”
심사위원들이 포크를 들었다. 스텔라가 눈을 깜빡거리며 머뭇거렸다. 아드레아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주영모가 킥킥거렸다.
“해양 사고 참사 현장 같습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이건 할로윈에 내놓았으면 정말로 사람들이 환장하면서 좋아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이 피, 바다에 흐트러지는 피가 정말로 현실적입니다. 디테일이 엄청나요. 그 뛰어난 실력을 이런 데 낭비……, 아니 제가 방금 한 말은 잊어주시지요.”
“네, 아드레아노 쉐프님이 지금 낭비라고 하셨습니다.”
이희주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절반 나눠 드릴까요, 이희주 사회자님?”
스텔라가 묻자 희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중간중간 맛있는 것이 보이면 하나씩 얻어먹으려고 숟가락을 들던 그가 물러나는 것을 보며, 진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드시면 맛있습니다.”
“…….”
누가 봐도 잘 만들었다. 정교하고 현실적인 묘사력을 보면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테마가 미묘하다.
“바다…… 맞죠.”
“…… 해양 생물…… 도 있긴 있고.”
“으으으으으음……. 너무 잘 만든 탓에 먹기가 힘들다니, 이런 경우도 있네요.”
“전에 그런 경우 봤어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던 거울 궁전을 과자로 만들었는데, 너무 아까워서 먹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야, 이건 그거랑 비교할 건 아니지.”
제일 먼저 수저를 든 것은 아드레아노 존부였다.
“난 뭐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
“오오.”
깊숙이 움푹 떠낸 파나코타는 한 가지 층이 아니었다.
“세 종류의 파나코타를 동시에 드셔도 좋습니다.”
진혁이 설명하자 아드레아노가 다시 수저를 움직여 바닥에 있는 한 층도 마저 펐다.
“호오.”
“파나코타의 질감은 괜찮군요. 맑고 깨끗합니다. 바닥하고 중간에는 과일이…… 오.”
“해양 생물이 한 마리가 아니군요?”
파인애플을 깎아 만든 물고기를 보고 스텔라가 웃었다.
“여기는 안쪽에 물고기가 숨어 있었네요.”
그녀 역시 자신의 파나코타에 수저를 가져다 댔다.
“안쪽은 맛있어 보이네요.”
주영모는 이미 먹고 있었다.
“…… 음. 겉모양은 어떻든지 간에 맛은 있어.”
“그냥 맛있는 정도입니까?”
이희주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솔직히 진짜 맛있지.”
파나코타를 한 입 먹어본 스텔라 위스커스가 조심스럽게 한 층, 맨 위에 있는 파나코타를 분리해서 맛보았다.
층층이 각자 떠서 먹어본 다음에, 마지막에는 다시 세 층을 한꺼번에 맛본다. 그녀의 얼굴에 감탄이 서렸다.
“따로 먹어도 맛있고 같이 먹어도 맛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