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0화
여기에는 쌀알을 다듬는 공예처럼 정교한 솜씨가 필요하다. 진혁이 엄지발가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 만족스럽게 깎아낸 발목을 오른쪽 접시에 준비했다.
그가 따로 준비한 우유와 체에 거른 젤라틴이 첫 소스 팬 속의 내용물과 차례대로 섞였다. 오렌지에 다량의 라즈베리, 거기에 블루베리까지 섞인 파나코타의 색깔은 진혁이 상상하는 진홍빛 바다와 잘 어울렸다. 일부러 라즈베리가 한쪽 끝에서 진하게 뭉쳐져 있는데, 이것은 진혁이 세밀한 강기의 실로 조절해놓았다. 발목이 꽂힌 부분부터 붉은색 물결이 시작해서 바다에 짙게 퍼질 것이다.
‘그리고 꼬리만 보이는 상어.’
진혁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레이아웃은 나왔지만 역시 고민이 되는 부분은 상어 모양의 젤리. 상어 꼬리 틀에 부어서 굳혀 놓은 청보랏빛 젤리는 그다지 무시무시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좀 더 분위기를 주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역시 색깔보다는 맛이야.’
그는 청보랏빛 젤리는 겉에 아주 얇게 씌우기로 하고, 속을 파냈다. 라즈베리와 잘 어울리는 맛, 그리고 진혁이 자유롭게 다를 수 있는 맛. 수많은 선택지가 머릿속을 휙휙 지나간다.
“화이트 초콜릿, 헤이즐넛, 아몬드, 염소 치즈….”
그가 중얼거리는 연관성 없는 단어들의 조합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카메라만이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식감이 젤리와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되지.’
“황도? 아니 백도?”
백도는 라즈베리의 섬세하고 찌르는 듯한 맛을 다독이면서, 그 풍미를 탁월하게 끌어올려 주는 데 놀라운 역할을 해줄 것이다. 백도를 넣어 젤리를 굳히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젤리 안을 파내고 그 안에 모양 맞게 백도를 넣는 것은 아주 어렵다. 진혁은 순서가 바뀐 작업을 작은 칼 하나만으로 손쉽게 해냈다.
클로즈업된 카메라로 진혁을 바라보고 있던 주영모 쉐프가 말했다.
“저, 저. 라면 삶고 끓는 물 부을 쉐프 좀 보게.”
“뭘 할지 미리 결정하지 않고 요리를 시작했나 보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저 솜씨 좀 봐요. 저 놀라운 손재주로 젤리 안에 속을 넣고 있다니.”
그녀는 답답해했다. 아서왕이 쓰는 전설의 명검, 엑스칼리버를 들어 두부를 자르는 데 쓴다면 영국인들이 탄식할 것이다. 용을 쓰러뜨리거나 적장의 목을 베어야 할 명검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초콜릿으로 자유의 여신상을 깎아낼 기세예요.”
“딱 맞는 예시로군.”
“아몬드에 불상을 조각할 사람이라고요.”
스텔라가 투덜거리는 말을 들으며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저 친구는 그냥 솜씨가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자기가 젤리 속에 황도를 깎아 넣을 수 있을 정도라는 걸 과시하고 싶은 거지. 세심하게 고려한 퍼포먼스야.”
정답은 아니다. 진혁은 미리 백도를 넣는 걸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뒤에 넣었을 뿐이다. 뛰어난 스킬로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었지만 사실은 시작할 때 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진혁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파나코타의 요리 시간은 총 20분 정도, 발효시킬 필요가 없이 식히기만 된다.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시간이 남는다. 물론 시간이 남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실력을 보여주기 위한 모든 것들을 섞어야 한다.
‘다음 층을 아몬드 유를 섞어 다시 만들면 되겠군.’
지금 만들어놓은 파나코타는 단지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 층은 라즈베리 파나코타, 두 번째 층은 아몬드 파나코타, 세 번째 층은 파인애플 파나코타. 색깔과 맛에 차별화를 주어 층층이 쌓을 계획이다. 진혁의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중간층, 아몬드 파나코타 안에는 팥과 호두, 레몬과 크랜베리 등을 젤리화시켜 만들어낸 작은 물고기들이 들어갈 것이다. 맨 위층 파인애플 파나코타 안쪽에는, 황도가 중심에 든 상어의 전신이 들어간다.
“이 정도면 됐나?”
작은 물고기들은 상어를 피해 달아날 예정이다. 진혁은 일부러 살코기는 더 넣지 않았다.
“이미 먹혀버렸으니까.”
그는 만족스러워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진혁의 옆에 있는 조리대에 서 있는 남자는 고뇌하고 있었다.
‘하아.’
루이스 강은 시간만 충분했더라면 할 수 있었던 빵들을 떠올렸다,
‘쁘띠 뺑 푀이테(Petit pain feuillete)를 조그맣게 만들어서 바다 위에 틈틈이 놓는 게 더 좋았을까?’
T65 밀가루를 사용해 굽는 이 빵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낸 반죽을 돌돌 말아서 소금을 발라 구워내 마지막에 일부러 태운 버터를 바르는 빵이다. 그가 지금 만들고 있는 크루아상은 소라 모양이 되기 위해 절반씩 잘리고 끝을 초콜릿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하지만 반죽을 아무리 비틀어도 이게 완벽한 소라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크루아상이 너무 흔한 건 아닌가? 아니, 후회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그의 야심작 〈니스 해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크루아상이 아니었다. 비주얼적으로 모두를 끌어당길 회심의 조형은 ‘인어’다. 그는 브라우니를 구워낸 케이크를 잘라 팔다리와 몸통, 머리의 기본형을 만들어 베이스 케이크 위에 올렸다. 미소를 띤 브라우니 여자는 턱을 괴고 손가락을 펴고서 두 다리를 뻗고 누워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다리를 깎다가 그만 지나치게 많이 썰어 버렸다.
‘이게 생각처럼 잘 안 되네.’
그는 바다를 위해서 넉넉히 만들어 둔, 세 가지 톤의 파란색과 하늘색, 흰색 퐁당을 보았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오.”
루이스는 다리 틀이 될 초콜릿 브라우니를 더 깎아 잘라내, 아래쪽에 쌓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
루이스 강은 하늘색 퐁당으로 다리를 덮기 시작했다.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나름의 고민을 하며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마침내 제한 시간을 알리는 거대한 LED 시계의 불이 깜빡이며 몇 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을 알렸다. 심사위원 셋과 사회자가 함께 일제히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5! 4! 3! 2! 1!”
제일 먼저 심사 위원에게 평가를 받을 사람은 이용태였다. 이전 라운드에서 제일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다. 저번 라운드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임진혁이 맨 마지막이다.
“이용태 쉐프, 작품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독도는 우리 땅 케이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낯익은 노래 제목이다. 주영모 쉐프가 이제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이름이군.”
“하지만 식욕을 고취시키지는 않은 생김새인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신랄하게 말했다.
“재료는 어떤 건가요?”
“배 무스 케이크에 데코레이션인 캐러멜 팝콘 섬. 그리고 초콜릿 괭이갈매기를 올렸습니다.”
이용태가 케이크를 잘라내 한 접시씩 심사위원에게 제출했다. 한 입씩 맛본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미묘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드레아노 존부였다.
“케이크는 촉촉합니다. 잘 구웠어요. 하지만 배의 풍미가 너무 약해서, 퐁당의 식감 속에서 죽었습니다. 느껴지지 않는데요. 차라리 그냥 케이크라면 괜찮았을 겁니다.”
“팝콘은 정말로 어울리지 않아요. 일단 바삭바삭해야 할 팝콘이 퐁당 안에 갇히면서 눅눅해졌고, 퐁당의 단맛과 캐러멜 팝콘의 단맛이 전혀 어울리지 않고 끔찍합니다. 팝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주영모가 안타까워하며 이용태를 바라보았다.
‘용태야, 너 왜 그랬냐.’
눈빛으로 말하는 그 시선이, 다른 두 사람이 비평하는 것보다 더 괴롭다. 이용태는 고개를 숙였다. 뒤늦은 후회가 뼈아프다.
‘원래 생각하고 있었던 설탕공예 장식을 한, 슈가 아트를 올린 브라우니 케이크를 할 것을.’
제일 자신 있는 그 메뉴를 내놓지 않은 이유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컨셉은 먹힌다고 생각해서 모험을 했고 실패했다.
“감사합니다.”
그가 쓸쓸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유키코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가져갔고, 브라이언 신은 눈을 깜빡거렸다. 루이스 강은 대선배가 형편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진혁은 무표정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희주가 명단을 보고서 이름을 불렀다.
“다음 차례, 브라이언 신 쉐프. 나와 주세요.”
브라이언이 만든 케이크를 보고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다른 이들이 한 단짜리 디저트나 한 층짜리 케이크를 만드는 동안, 그는 같은 시간 안에 3단 케이크를 만들어냈다. 남색과 하늘색, 그리고 연하늘색으로 층층이 올라간 케이크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했다. 셀러브리티 아역 배우의 생일파티에 나올법한 케이크다. 카툰 풍의 귀여운 문어가 케이크 바다를 습격하는 것처럼 긴 다리를 줄줄이 늘어뜨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2단 케이크 위에는 알록달록한 물고기가, 마지막 층 케이크에는 조개와 해삼, 산호가 있다. 동글동글한 하얀 기포들이 구슬처럼 여기저기 놓여 있었는데 아주 예뻤다.
주황색 바탕에 흰색 줄무늬가 있는 크고 작은 물고기를 보고 스텔라가 말했다.
“귀엽네요. 니모군요?”
“니모라뇨, 흰동가리입니다. 저작권 침해가 될 수 있으니 구체적인 이름은 언급 자제해 주시죠.”
브라이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니, 니모를 찾아서에 나오는 니모 맞잖아요?!”
“그건 스텔라 쉐프님의 착각입니다.”
“…….”
스텔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평소 시니컬해 보이던 그녀가 갑자기 흥분한 것을 보고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스텔라 쉐프, 니모를 좋아했죠? 니모 열쇠고리 같은 것도 달고 다니던데.”
“귀엽잖아요.”
“그런 걸 좋아하셨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보여준 의외의 일면에 주영모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니모 귀엽죠.”
“뭐죠, 그 표정은? 기분 나쁘네요.”
“하하하! 아닙니다. 제 조카도 니모를 아주 좋아합니다.”
“지금 조카하고 저를 비교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브라이언 신은 자신만만하게 케이크를 잘랐다. 1단과 2단, 3단 케이크 전부 파운드 케이크기 때문에 아래쪽만 잘라서 내놓았다.
‘3개를 구워서 데코레이션한 게 아니구나. 그래서 시간을 절약한 거야.’
그것을 바라보며 유키코는 눈을 크게 떴다. 아예 3단 케이크 틀에 파운드 케이크를 구운 것이다. 저것에 비하면 그녀의 케이크는 제과 견습생이 만든 장난감처럼 보였다.
‘저건 기본적인 맛이 보장되어 있겠군.’
이용태는 씁쓸한 표정으로 브라이언의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루이스 강은 만화적인 디자인에 감탄하였으며, 진혁은 아무 생각 없이 벽에 기대어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평은 나쁘지 않았다.
“호두 파운드 케이크로군요.”
“아래쪽은 푸석푸석하지 않아요. 정통적인 파운드 케이크라는 느낌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데코레이션이 너무 귀여웠어요.”
“바다라는 테마에 잘 어울렸고, 여러 종류의 생물이 다양하게 등장했죠.”
“그리고 문어는 빵이 아니었죠.”
“예, 다코야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신선한 생선 살을 거품화해서 무스로 만들고, 문어를 비롯한 해물을 채워 넣었죠. 파운드 케이크와 어울릴 수 있도록 일부러 파운드 케이크를 달지 않고 담백하게 만들었습니다.”
“문어와 호두 파운드 케이크가 어울릴 수 있다니 신기하네요.”
“생선 살이 중간에서 완충작용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일본식 퓨전 메뉴로 전에 제작했던 것을 바다 테마로 다시 어레인지한 겁니다.”
브라이언이 웃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다음 차례는 유키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