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8화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재워 달라고?”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쉐프복이 벗겨져 날아가 옷걸이에 안착했고, 셔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바지가 둥둥 떠올라서 다가왔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진혁은 자신이 거주하는 오피스텔로 달렸다. 당장 진희가 건물 앞에 서 있다면, 1층이 아니라 창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마음이 급했다.
‘빨리 환영마라진부터 해제해야지.’
진혁이 오피스텔 옥상에 도착했을 때, 역 방향에서 오피스텔 1층 출입구를 향해서 걸어오는 진희가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진희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다. 옥상을 통해 내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간까지 일하고 있었다고 하면 귀찮게 잔소리를 하겠지.’
쓸데없이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흥신소장이 따로 퀵으로 부쳐 준 기차표를 자연스럽게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진희가 들어오면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이야?’
◈ ◈ ◈
밤늦게 찾아온 진희는 피곤해 보였다.
“어서 와.”
“갑자기 물어봐서 미안. 원래 호텔 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하도 성화셔서.”
“나도 네가 이쪽으로 오는 게 편하니까.”
“원룸인데 내가 오는 게 편하겠냐고. 그래도 고마워, 갑자기 말했는데 괜찮다고 해줘서.”
“상관없어. 내일 새벽에 일찍 나가니까, 나갈 때 문 잠가놓고 가라.”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반죽들은 이미 차곡차곡 랩에 감싸여 냉장고에 들어 있다. 내일 숙성된 상태로 들고 가면 될 것이다. 피어오르는 불꽃 모양을 어떻게 살리는 것이 좋을까, 불꽃처럼 따스하고 안온한 온기를 빵에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고민하던 차에 진희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 올라왔다가 바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차가 끊겼다고 했지.’
그녀는 가방을 털썩 내려놓으며 말했다.
“큰 이모 사진이 다른 사람이랑 바뀐 게 아니었대.”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임진희가 답답해하며 말했다.
“나는 전에 큰 이모가 암 진단 받은 게 착오인 줄 알았거든.”
순간적으로 진혁이 움찔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암이 사라진 건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이렇게 암이 사라질 일이 없다고 종양내과 김 과장님이 말씀하셨단 말이야. 그래서 분명히 진단 받을 때부터 뭔가 오류가 있는 줄 알았어. 그럴 확률은 매우 적지만 사진이 다 다른 사람 거랑 바뀐 거 아닌가 싶었다고.”
진희는 빠르게 말했다. 점점 더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흥분하는 게 발이라도 구를 기세였다.
“사진?”
“뇌 MRI랑 CT 사진에서 분명히 암이 있었단 말이야.”
“응, 그래서 점차 시력도 침침해지고 계시다고 했잖아.”
진혁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순진무구하게 두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전의 사진은 큰 이모 것이고, 암이 그냥 없어진 게 맞대.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는데…….”
진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어 진혁이 손을 뻗어 토닥여 주었다.
“병원 측 실수로 큰 이모가 괜히 이것저것 떠안게 되는 것 아닌가 걱정했거든. 그런 건 아니라 다행인데…….”
“다행인데, 왜?”
“충치를 빼가는 이빨 요정도 아니고, 진짜 신기할 노릇이야.”
“어디 암 요정이 있나 보지. 암만 쏙쏙 빼가는 착한 요정.”
“암 요정 같은 소리!”
진희가 깔깔깔 웃어버렸다.
“병원에서 암 치료 받은 환자들 중에서 큰 이모처럼 좋은 경과를 보인 환자가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데 아직까지 못 찾았대.”
“…….”
그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모님은 어떠셔?”
진혁은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이모들 다 좋아하시지. 큰 이모는 얼떨떨해하면서 조금씩 좋아하고 계셔. 이제 실감이 나시나 봐. 큰 이모가 우시는 거, 외할머니 돌아가실 때 빼고 처음 봤어.”
진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혁이 네 말도 맞아. 그냥 감사할 수밖에 없지. 암 낫게 해달라고 했더니 하느님이 낫게 해주셨다고, 큰 이모가 그때부터 새벽 기도회에 계속 나가신다고 하더라.”
“……그래서, 큰 이모는 괜찮으시지?”
“……천만다행으로 괜찮으셔.”
‘…….’
“엄마도 이제 교회에 다닐지 몰라. 엄마도 동네 교회에 한 번 가서 기도했는데 효험이 있었다고, 아주 용한 교회라고 칭찬을 하시더라고.”
“뭐라고?!”
그건 진혁이 바라던 결과가 절대로 아니었다. 진혁의 이마에 내 천(川)자가 그려졌다. 한때 일월신교의 교주였고 지금은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신도였다. 그는 가족의 일원이 다른 종교에 입문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순간적인 고민에 휩싸였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본 진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교회 나가는 게 그렇게 싫어? 우리는 일요일에도 계속 근무하니까, 엄마가 관심이 있어도 다니시지는 못할 거야.”
“그건 그렇지. 피곤할 텐데 먼저 자.”
“그런데 너,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하고 있었어?”
“네가 와서 깼어.”
“그렇지? 미안해.”
서로 몇 번이나 침대를 양보한 끝에 진희가 졌다. 진희가 침대에서 자고 진혁이 바닥에 요를 깔고 누웠다. 형광등을 끄고 나서 어둠이 내려앉고, 어둠 속에서 진희가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오고 나서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는 것 같아……. 항상 고마워.”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진혁은 진희에게 메모를 남겨 놓고 먼저 집을 나섰다. 어린애가 아니니까 알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일찌감치 촬영장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전과 다른 시선을 느꼈다.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어?’
일월신교에서는 당연히 교주의 행차가 있으면 모두가 따라다니며 칭송을 했다. 하지만 방송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메이크업을 받으러 들어갔다.
“일찍 오셨네요, 임진혁 쉐프님.”
이번에 진혁을 담당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저번과 다른 사람이었다.
“피부가 좋다, 좋다 하더니 정말로 꿀이 뚝뚝 흐르는 피부네요. 화장을 할 필요가 없겠어요.”
그는 최소한의 붓질만 한다며 조그마한 붓을 들었다. 새끼손톱만한 간지러운 붓이 화장품 가루를 묻혀 얼굴 위에 돌아다니는 것을 느끼며 진혁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 감으세요,”
눈을 감자 기분 탓인지 붓질이 더 세밀하게 느껴졌다.
‘뭐지? 내 몸에 뭔가 바뀐 건가?’
방송용 화장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진혁에게, 사회자 이희주가 다가왔다. 그 옆에는 언제나 따라다니는 카메라맨이 함께였다. 이희주가 웃으며 먼저 인사하자 진혁이 마주 인사했다.
“임진혁 쉐프, 축하합니다.”
“예?”
무슨 일인지 모르는 진혁을 보고 희주가 설명해 주었다.
“팬클럽 회원이 벌써 1만 명에 달했다던데.”
“예에?”
“원래 트위터의 소규모 팬클럽이었는데 최근 인원 모집을 활발하게 하고 있더군요. 작은 규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제빵도 진혁 군이 좋아하는 테마니까 기대하겠습니다. 팬클럽에게 확실히 뭔가를 보여 달라고요.”
희주가 싱글싱글 웃으며 좋아했다.
“제가 좋아하는 테마가 뭡니까?”
“보면 알게 될 겁니다.”
◈ ◈ ◈
“이번 테마는, 바다입니다!”
이희주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여태까지 살아남아 있는 출연자들은 바로 펜을 집어 들어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진혁은 그중에 잠시 머뭇거리고 서 있었다.
‘내가 자연 테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실 그는 바다보다 산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십만 대산의 자연은 언뜻 보면 아름다우나 험하고 고되며 인간을 시험한다. 흔히들 상상하는 우아한 산이 아니라, 오히려 폭풍이나 해일에 가까울 정도다. 산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그는 바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바다 생물을 한 종류 이상 등장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바다 생물…….”
진혁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금와…….’
사천당문에서 비처에 몰래 키우고 있던 금빛 독두꺼비였다. 피 속에 담고 있는 진한 독이 아주 효과가 좋아 진혁도 길러보려고 했는데 먹이인 독초를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 민물에서 사는 놈인지 바다에서 사는 놈인지 감도 안 잡혔다. 확실한 건 바위산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그놈은 아닌 것 같아. 만년화리?’
산속 동굴 속 호수에 살던 만년화리(火鯉)는 잉어였다. 즉, 민물고기다. 진혁은 바다에 사는 다른 생물을 떠올렸다.
‘만년금구?’
만년금구(萬年金龜)는 만 년 묵은 거북이로, 바다에 살고 있으며 온몸이 황금빛으로 빛난다는 전설 속의 영물이다. 진혁은 만년화리는 본 적이 있으나 만년금구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야, 굳이 영물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바다 생물이 얼마든지 있다.’
진혁은 자신이 너무 한정된 틀 안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다, 하고 생각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파도.
‘그러고 보면 전에 했던 ’폭풍이 몰아치는 밤하늘‘에서 예술적인 면이 높은 점수를 받았지.’
이희주 사회자가 이번 주제를 진혁이 좋아할 것이라고 말한 이유를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럼 상상력을 자극해 볼까.”
이전에 만들었던 하늘 케이크는 공중에 떠 있었다. 다들 ‘하늘’과 ‘구름’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 그는 성층권 자체를 표현하였다.
‘생물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지만 반드시 생물 전체를 표현할 필요는 없어. 일부분을 드러내고 희미하게 호기심만 자극해도 되지.’
숲 속을 헤매는 무림맹의 정파 놈들을 끌어들일 때, 나무 사이에 사람 한 명이 서 있을 필요는 없다. 그저 찢겨진 옷자락 하나만 흘려 두어도 꿀을 본 개미처럼 쫓아오기 마련이다. 그는 드디어 컨셉을 잡았다. 종이 위에 드러난 형상을 보고 진혁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유키코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반죽에 몰두했다.
‘여름 바다에는 역시 바캉스지.’
한 덩어리가 되어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반죽. 그 반죽 안에 버터가 충분히 스며들도록 주물러야 한다. 평생 동안 도넛 반죽을 해온 사람처럼 그녀는 자연스럽게 힘차게 반죽을 내리쳤다. 볼에 반죽을 내동댕이친 다음 손목을 이용해서 눌러주면서 골고루 반죽하는 것이 중요하다. 발효할 시간 역시 필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서둘러야 한다.
도넛은 원래 네덜란드의 빵 올리볼렌(Oliebollen)에서 출발한 음식이다. 밀가루 반죽에 견과류를 넣어 튀겨낸 동그랗고 울퉁불퉁한 빵 과자로, 반죽(Dough)에 견과류(Nuts)가 있다고 하여 도넛(Doughnuts)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후에 가운데에 동그라미가 뚫린 지금과도 같은 형태의 도넛이 발전하였다. 그녀는 이 도넛에 특별한 추억이 있었다.
유키코가 도쿄제과학교의 학생이던 제빵 수업 시간의 일이다. 「도넛에 처음부터 구멍이 있었을까?」 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였다. 재민이 일어나 대답했다.
“1847년 미국의 빵집 견습생 그레고리 핸슨은 튀김빵을 구우면서 가운데가 잘 익지 않아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보았다고 합니다. 빵이 더 금방 익고 바삭바삭해졌기 때문에 이후에 이 빵이 유명해졌다고…….”
남자는 말을 흐리더니 씩 웃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원가 절감을 위해서가 아닌가 합니다. 반죽 값이 덜 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