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7화
엄청나게 단순화한 설명이다.
용감한 자가 아니라 불의 신을 섬기는 자들이며,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고 불의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한다. 불멸의 생명을 얻는다기보다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그 이름이 드높아지며 대대로 칭송받으리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멋대로 축약하고 이야기의 원형을 아예 알 수 없게끔 만들어버렸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기억하고 구별했으면 좋겠지만 동시에 전혀 몰라봤으면 좋겠다. 유키코가 알려준 요거트 식빵의 2차 발효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스케치북에 불꽃 케이크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불 속에 뛰어드는 남자의 이미지를 스케치하다가 그는 그대로 종이를 던져 버렸다. 하늘에 날아간 종이는 그대로 조각조각으로 흩어져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쓰레기통이 빠끔 입을 열자 종잇조각들은 그대로 그 안으로 다이빙했다.
“……이건 아닌 것 같다.”
그가 그린 그림 속의 남자는 소방복 없이 자살하려고 하는 소방관처럼 보였다. 최대한 좋게 봐준다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불속에 뛰어드는 용감한 시민 같기도 했다.
둘 다 사람들이 먹고 싶어할만한 모양은 아니었다.
진혁은 양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끄응.”
‘차라리 백 명의 무림맹 단원들을 도륙하는 게 더 쉽겠군.’
그가 원래 생각하고 있던 ‘불길의 세례’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종이에 교주의 의복을 그려보았다. 검은색 비단을 길게 늘어뜨린 의상은 소매가 넓고 앞뒤가 펄럭이는 형상이었다. 허리에는 홍옥이 박힌 허리띠를 둘러 위엄을 보였다. 처음에 입었을 때는 여덟 겹에 달하는 의복이 번거롭고 귀찮았는데 계속 입고 지내다 보니 익숙해졌다.
“이것도 안 돼.”
두 번째 종이도 팔랑팔랑, 다시 쓰레기통을 향해 날아가며 짧은 수명을 다했다.
한참 동안 고심하던 그는 옛 고사를 하나 떠올렸다. 한국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며 태양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였다.
“좋아. 그걸로 하지.”
진혁이 종이 위에 자신 있게 선을 그었다. 그는 다음 촬영 전에 여유가 생길 일은 더 이상 없을 테니 아예 오늘 시제품까지 만들고 갈 생각이었다.
‘바닐라 바바루아(Barbaroise), 복분자 바바루아, 녹차 바바루아. 세 개를 베이스로 하지.’
바바루아는 우유와 달걀, 향료와 젤라틴, 거품 낸 생크림으로 만들어 차갑게 식히는 디저트로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는 이 바바루아를 장식으로 삼아, 미니 태양 케이크를 구워낼 계획이었다.
“요리를 시작하지.”
그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세 개의 소스팬이 둥둥 떠올라 가스레인지 위에 내려앉았다.
진혁이 손을 뻗자 켜지 않은 가스레인지 화구 위, 소스팬의 아래가 천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양강기공을 통해 멀리서 오븐과 가스레인지의 열을 조절하게 될 수 있게 된 이후, 진혁에게 있어 요리를 태운다는 실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리고 우유팩이 입을 벌렸다. 반투명하게 부풀어 오른 우유 방울들이 하나씩 하나씩 비눗방울처럼 소스팬을 향했다. 끈이 끊어진 진주 목걸이가 바닥에 떨어지듯 쪼르륵 소스팬에 굴러 떨어진 우유 방울들은 소스팬을 세 개 전부 절반씩 채웠다.
우유팩은 입을 다물었고 냉장고는 다시 닫혔다.
“좋아. 이제 바바루아를 만들 때인가.”
바닐라빈 봉지에서 톡 튀어나온 바닐라빈들은 허공에 씨를 뱉어냈으며, 냉장고 안에 잠들어 있던 복분자 퓨레는 분수대의 물길처럼 치솟았다가 다시 우유 바다에 떨어져 내렸다.
선반 위에서 잠자고 있던 말차 가루 주머니 역시 제 배를 활짝 열어 드러내 보이고서 내용물을 우유 바다에 제물로 헌납했다.
하얗기만 하던 우유는 곧 상앗빛과 연보랏빛, 연녹색으로 물들어갔다. 진혁은 흐뭇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젤라틴을 미리 불려 두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이 불러낸 물은 조그맣게 나뉘더니 순식간에 젤라틴을 습격했다.
“좋아, 좋아.”
순식간에 찬물을 흡수해서 부풀어 오른 젤라틴들은 소스팬 위의 바바루아 베이스가 저온에서 살균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또 다른 세 개의 스테인리스 볼에는 거품기가 하나씩 내려와 노른자를 맹렬하게 저었다. 설탕과 노른자가 폭풍에 휘말려 정신없이 돌아가는 동안, 새로운 스테인리스 볼에서는 생크림이 광란의 왈츠를 추었다.
“자자, 거기까지만.”
하지만 바바루아를 만들 때 평소처럼 무심코 생크림을 100% 휘핑해버리면 안 된다. 80%까지만 휘핑하고서 베이스와 설탕, 노른자에 섞어야 한다.
진혁은 생크림이 완벽한 휘핑크림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틀도 준비해볼까.”
세 개의 바바루아 들어갈 틀은 본래 기둥 모양의 플라스틱 몰드여야 한다. 하지만 진혁은 아주 얇은, 기둥 모양의 과자를 따로 준비했다. 녹은 버터가 크림처럼 녹진해질 무렵 슈가파우더가 춤추며 버터에 합류했고, 거기에 박력분과 흰자가 함께했다. 코코아파우더까지 포함된 과자 반죽이 가늘고 얇게 펼쳐졌고 허공에서 동그랗게 말려 기둥 형태를 만들었다. 예열된 오븐의 아래층에서 10분 정도 구우면 되지만 당장은 굽지 않을 것이다.
‘씹힘맛은 비스킷으로 하는 게 좋겠어.’
바바루아 비스킷 화살이 꽂히는 주홍빛 구는 바로 태양으로, 이 고사의 중심이 된다.
카스텔라 크림에 가까운 꾸덕꾸덕한 크림을 아래에 깔고 위에는 리코타 치즈를 올린 미니케이크다.
바바루아가 독일식 디저트인 만큼, 역시 독일식 빵인 바움쿠헨을 가장자리에 둘렀다.
“이건 별로 태양 같지 않나?”
진혁은 바움쿠헨 반죽을 치워 버렸다. 아무래도 태양이란 말갛고 동글동글한 물건이지, 겉에 칙칙하고 단단한 나무껍질 같은 것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좀 더 주황색에 가깝게…… 당근 케이크는 식감이 좋지 않을 것 같고…….”
결국 아이디어는 그가 제일 자신있어하는 원래의 케이크로 돌아왔다.
“미니 트리플 치즈 케이크로, 맛은 조금 더 약하게.”
바바루아의 맛이 치즈에 눌려버리지 않게 하면서도 치즈의 풍미는 강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치즈의 배합을 바꾸어보기로 했다.
두 시간 후에는 이미 완성된 요거트 식빵과, 손바닥만 하게 구워진 열 개의 미니 치즈 케이크가 둥실둥실 허공에 떠다니고 있었다.
“여덟 번째 맛이 제일 낫군.”
진혁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구워진 비스킷 몰드 안에 층층이 들어간 바닐라와 복분자, 말차 바바루아는 우아하고 예뻐 보였다. 다만 비스킷이 가리고 있어 안쪽에 세 가지 맛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님들에게 작은 놀라움을 선사하고 싶었다.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 미니 케이크를 원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조각으로 팔면 팔았지, 미니 케이크를 따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공간은 제한되어 있고 손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팔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늘 리처드 베이커가 지적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좋은 조언을 받았어. 데려오길 잘 했지.’
진혁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의 대화를 복기했다.
‘원가율을 좀 더 낮출 것.’
임진혁은 최상의 재료와 상급의 재료를 구분할 수 있으며 언제나 최상급의 재료만을 골라서 사용했다.
하지만 최상급의 재료는 상급의 재료보다 50% 이상 가격이 비싸게 마련이다. 그것도 원산지에서 제일 좋은 것들을 고르고 골라서 보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상급의 재료들 역시 쓰레기가 아니야. 맛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재료의 경우에는, 중간 정도 등급의 재료를 써도 좋지.’
당장 사과잼만 해도 그렇다. 진혁이 직접 설탕을 넣고 졸여 만들고 있는 H & J 베이커리 앤 카페 핸드메이드 사과잼의 경우, 흠이 하나도 없는 최고급 사과로 잼을 만든다.
당연히 재료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다. 보통 사과잼은 흠이 많은 사과를 싸게 사와서 졸여 만드는데, 그는 흠이 없는 과일을 고집했다.
‘흠과와 성한 사과는 맛이 미묘하게 다르니까, 흠집 없는 사과여야 한다고 내가 고집을 부렸지.’
백진영은 그 고집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원가 면에서 보면 분명히 손해일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은 자신과 같은 미각의 소유자가 그리 많지 않으며, 손님 중에서는 없다시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했다.
“리처드 베이커가 맞는 말을 했어.”
하지만 그 붉은 머리 서양인이 맞는 말을 한 것과, 그자의 겨울 정령 케이크에 지는 것은 당연히 별개 문제였다.
진혁은 당연히 승리할 생각이었다.
‘홀케이크보다는 미니 케이크가 더 많이 팔리게 마련이지.’
그는 이 대결의 승부가 결국은 손님들이 얼마나 많이 구매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예(?)의 고사는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을 거야.”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태양을 쏘아 떨어뜨린 인간의 영웅, ‘예’의 이야기였다.
아득한 옛날, 중국 요나라 시대의 일이다. 천제(天帝)의 자식인 열 개의 태양은 본디 교대를 해가며 하늘에 떠올랐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열 개가 동시에 하늘에 떠올랐다.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가 하늘에 휘몰아쳤고 세상의 호수가 모두 말라붙었다. 바다는 허연 소금밭이 되었고 곡식은 논밭에 핀 그대로 바싹 건조되고 말았다. 예는 활에 화살을 매어 아홉 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렸고, 가장 작고 어린 단 하나의 태양만을 남겨두었다.
이 이야기는 강족과 묘족 등 소수 민족들에게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데, 진혁은 이 이야기를 십만 대산에 흘러들어온 소수 민족의 고아에게 들었다.
그 아이가 강족인지 묘족인지 지금 와서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아이가 말했던 고사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 아이가 행복하게 옛날이야기를 하는 동안, 99번이 그 아이를 등 뒤에서 찔러 죽였다. 만일 99번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진혁이 녀석에게 찔려 죽었을 것이다. 그 고아 놈은 금방이라도 진혁을 찌를 기세로 마비독이 묻은 화살을 쳐들고서 진혁을 위협하고 있었다.
왜 위협하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끌었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 아이는 살인을 해본 적이 없었다. 첫 살인을 하는 것이 두려웠던 게다. 부모가 이야기해준 가장 용감한 영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용기를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진혁에게 다행이었고 그 애에게 불행이었던 것은 그 ‘예의 고사’가 퍽 길었다는 점이다.
“담비가죽으로 만든 예의 신발이나, 양가죽으로 만든 갖옷 등 얼마나 훌륭한 옷을 입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세밀하게 묘사하느라 바빴으니, 원…….”
덕분에 진혁은 잘 살아남았다. 나중에는 구원해준 99호도 죽였고, 다른 사람도 죽였고, 여하튼 많이 죽였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것이 다 예님 덕분입니다. 공양하는 뜻에서 맛있게 잘 만들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