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56화 (156/656)

제 156화

“자기가 이길 거라는 자신이 있군요.”

“그럼요.”

그녀의 케이크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소식 모를 연인을 기다리던 그녀의 기다림, 그 이야기를 모른 채 유키코를 비난하던 이들.

그들은 미안해하며 유키코가 만든 케이크를 사갔고 감탄했다. 더 이상 그녀는 비난받는 미혼모가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우뚝 선 여성이며 훌륭한 어머니고 사랑받을 연인이었다. 반 혼수상태인 연인이 깨어나기를 기원하며 만든 케이크라는 이야기가 더해지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개수를 정해 주문받는 홀케이크인데도 벌써 일주일치 주문이 밀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파는 데 부끄러움이 없었다.

‘돈이 더 필요해.’

스토리텔링 마케팅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야기에 열광하고 이야기를 사고 싶어 한다. 흔한 롤케이크가 아니라, 사연을 담은 케이크를 원한다.

마케팅에도 경험이 있던 유키코는 이전 다니던 회사에서 거래하던 인쇄소에 할인 가격으로 특별한 카드를 주문했다. 봉래산의 옥 가지 케이크를 구매하면 ‘카구야히메’ 즉 대나무 공주의 이야기에 그림을 곁들여 컬러풀하게 인쇄한 카드가 같이 나간다. 그 카드 역시 인기가 있었다.

지금 들어오는 인센티브만 해도 전에 나마무라 베이커리에서 받던 월급보다 많았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전부 임진혁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이제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우승까지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결승까지 가거나 준결승까지 가더라도, 임진혁 쉐프하고 최소한 한 번 이상은 경쟁해야겠지.’

은혜를 받았다고는 하나, 승부는 승부였다. 그녀는 한 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곁에서 지켜보는 뛰어난 솜씨와 엄청난 속도를 보면 새삼스럽게 놀란다.

허나 그녀는 <동화 케이크>에서는 자신이 이길 것이라 예상했다.

‘내 이야기를 이길 만한 이야기는 없어.’

그녀는 여유 있게 농담을 건넸다.

“임진혁 쉐프도 동화 케이크에 카드를 넣을 건가요? 서명을 하셔도 좋겠어요. 멋진 흘림체 한자였죠.”

“……아.”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 백진영이 사인하는 그 아래에 임진혁 역시 같이 서명했다. 그때 그는 무심코 도산검림(刀山劍林)을 한자로 써버렸다. 그것은 과거 그가 교주로 활동하던 시절의 칭호였다. 수천 번, 수만 번 두루마리에 서명했던 경험이 있어 그만 습관적으로 써버리고 말았다. 당시 진짜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그 단어를 이름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진혁은 강했다.

‘칼의 산, 검의 숲.’

험하고 고난이 가득한, 역경으로 뒤덮인 곳으로 보통 무림 전체 즉 강호를 통칭한다.

진혁은 새끼 살수 시절부터 광오하게도 자신의 이름이 도산검림이라 자칭하고 다녔는데, 이미 죽은 99호가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이야기해주며 언급했던 단어를 이름으로 쓴 것이었다.

하지만 초보 살수가 쓰기에는 너무나 과장된 칭호였기에 누구나 그 성명을 들으면 웃어버리기 바빴다.

진혁은 비웃는 자들을 하나하나 베어나갔고 마침내 인정받았다. 최초로 ‘도산검림’이라 진혁을 인정한 자는 숙적인 남궁가의 검제였다.

저놈은 한 명만 서 있어도 그곳이 도산검림이니 그것이 저 새끼 이름이 맞다며, 감탄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했다.

“とうざんけんじゅ? 이렇게 읽는 건가요?”

유키코는 그가 휘갈긴 한자를 일본식으로 소리 내어 읽었다. 임진혁은 여태까지 서명할 때 항상 한자를 엉망진창으로 흘려 썼고 아무도 그것을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한자를 읽어냈다.

“일본에서는 樹(칼 수)자를 써서 刀山?樹(도산검수)라고 하지만요.”

그녀가 한자를 써서 보여주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페이스트리 쉐프가 한 명뿐인 베이커리 카페는 험하고 고된 길이죠. 이제 제가 힘껏 도울게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도산검림! 무협지에서 보던 말 같다.”

백진영은 아예 배를 잡고 웃었다.

“중2병…….”

“방금 뭐라고, 형?”

“아니,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이름을 들켰다고 생각해서 순간 매우 놀랐는데, 아무도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유치하고 촌스러운 닉네임처럼 보였다. 그는 그 상황이 우스우면서도 달가웠다.

회식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그는 도로 카페로 돌아왔다. 내일 내놓을 케이크의 시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누군가 본다면 마술사의 공연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할 쇼가 시작되었다.

달걀들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스스로 갈라진다. 흰자와 노른자는 몸도 가볍게 반대쪽 그릇으로 풍덩 뛰어들고, 밀가루들은 춤추듯이 작은 회오리를 만들며 달걀에 섞인다.

플레인 요거트가 왕관처럼 솟아올라 방울방울 떨어지고, 드라이 이스트 가루는 요정의 날개가 흩어지듯 산산이 부서져 합쳐진다.

소금과 설탕은 완전히 반대쪽에서 천천히 솟구치다가 뚝 하고 떨어져 내리며 반죽에 스며든다.

체온과 비슷한 정도로 따뜻하게 달아오른 우유가 경쾌하게 뚜껑을 박차고 뛰쳐나와 마지막으로 합류한다.

허공에서 늘어났다가 주물러지며 조리대에 스스로 몸을 치대고, 다시 뛰어올랐다가 솟아오른다. 용이 승천하듯 하늘을 향했다가 중력에 끌어당겨지며 추락하고 다시 온몸을 부딪쳐 격렬하게 스스로 ‘주물러진다.’

누군가 본다면 반죽이 살아있다고 말할 광경이었다.

서커스처럼 화려한 공연을 보면서도 진혁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유키코가 알려준 대로, 식빵 반죽에 요거트를 섞은 테스트용 빵이었다. 새로 만들 케이크와는 아무 관련 없지만 테스트 삼아 먼저 시작했다.

‘답답하니까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던 거지.’

하얗고 부드럽다는 저칼로리 식빵은 진희가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유키코가 마침 재미있는 레시피를 줘서 시도했을 뿐이다. 적당한 끈기가 생긴 반죽은 세 개의 공 모양으로 동그랗게 말렸다. 나풀나풀 베일처럼 날아온 비닐이 보자기처럼 반죽 공을 감쌌고, 진혁은 팔짱을 끼고 그 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도산검림이란 서명을 들켰어도 아무도 내가 교주였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지.’

당연히 알 리가 없는데도 한순간 ‘들켰다!’라고 생각해버렸다. 이곳이 강호의 십만 대산이 아닌 현대 서울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입막음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하고 순간적으로 살기를 뿜을 뻔했다. 곧 이곳이 어딘지 깨닫고 두 사람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지 않았으면…… 정말로 베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극히 습관적이고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동료로 인정한 사람과, 그리고 동료로 인정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순식간에 죽여 버렸을지도 몰라.’

자신이 망가져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잠금이 풀릴 줄은 몰랐다.

물론 그동안 사소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발소나 미용실에서 이발이나 면도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 아무리 무해한 인간이라고는 하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앞에 치명적인 급소를 내놓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는 남성 모델이 나온 잡지를 사서 보고서, 강기를 사용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뒤통수에 있는 머리털을 자르기 위해서는 거울을 보고 손날로 잘랐다. 처음에는 쥐가 파먹은 것 같은 머리 모양이 됐는데, 나중에는 학습을 거쳐 조금씩 더 나은 모양이 되었다. 지금은 누가 진혁의 머리를 보고서도 ‘혼자 집에서 잘랐군!’하는 의심을 하지 않을 정도로 멋지게 잘 잘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원 버스나 지하철처럼 고철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이 싫었다.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안에 머무는 것이 혐오스러웠다.

민감한 감각은 혐오스럽고 불쾌한 체취를 지나치게 강하게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중의 누가 언제 돌변해 칼을 뽑아들지도 몰랐다.

이성적으로는 지하철 안에서 칼부림 사고가 날 확률이 한없이 0%에 수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도저히 경계를 풀기가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그는 교주 시절에 마차를 타고 가다가 밖에서 습격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마차 자체를 불태우려는 시도, 배신자 마부가 말을 달리며 절벽으로 유도한다거나 하는 소소한 일들. 버스나 지하철 따위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 고철 상자들은 스스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인간이 계속 닦고 연료를 넣으며 돌봐줘야 한다. 그 정비하는 인간들이 실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진혁이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부모님과 함께 자동차를 타는 것은 다르다. 환골탈태를 겪었어도 살은 살이며 뼈는 뼈일 뿐이다. 외공을 익히지 않는 부모님을 여차하면 지키기 위해서 그는 얼마든지 자동차든, 기차든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혼자 타는 것은 싫다.

“괜찮아.”

그는 다짐하듯 목소리를 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금 여기에서는 괜찮아.”

대한민국, 서울. 아버지는 다치지 않았고 어머니는 발병하지 않았다. 큰이모의 종양은 치유되었고 쌍둥이 남매는 행복하다. 사업은 번성하고 있으며 공장까지 짓고 있는 중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있는 동안 15분이 지났다.

“나와라.”

서랍이 스르륵 열리고 안에 들어 있던 밀대가 튀어나왔다. 조리대 위로 올라간 밀대는 뽐내는 듯이 천천히 앞뒤를 움직이며 반죽을 눌렀다. 허공섭물의 힘 조절을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밀대가 박살날 것이고, 흩어진 나무 조각이 반죽에 들어가 못 쓰게 될 것이다. 진혁은 세심하게 힘을 조절해 반죽을 납작하고 평평하게 만들었다. 책임을 다한 밀대는 자리에서 비켜났고, 그는 반죽을 위아래로 접고 방향을 돌렸다. 동글동글 세 개 봉우리가 부풀어 오른 반죽은 식빵 틀에 기어들어갔고 다소곳이 기다렸다.

두 번째 비닐이 롤에서 제 몸을 찢고 뛰쳐나와 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들끓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오븐의 열선에 불길이 피어올라, 화씨 175도에 맞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한 시간 동안 2차 발효를 마치고 나면 불의 세례를 받은 반죽이 우아한 식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재생과 변화.’

일월신교의 입교식 역시 이런 식으로 진행한다. 불꽃의 힘을 알고 경배하며 존중하도록 하는 의식이다.

‘이번 주제는 거기서 따 왔지.’

진혁이 이번에 만들 케이크는 일월(日月)의 힘을 빌린 ‘불의 세례’를 테마로 한 것이었다. 동화라기보다 전설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중 그것에 대해 따질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제가 이번에 만들 케이크는 중국 신강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전설을 소재로 하여 구상한 것입니다.”

진혁이 중얼거렸다. 지금은 앞에 아무도 없지만 유키코나 리처드, 은동과 가영, 예은과 창덕에게 이야기한다고 상상하며 그는 열심히 설명했다.

“마을에는 용감한 자가 불 속에 뛰어들면 불멸의 생명을 얻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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