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55화 (155/656)

제 155화

당연했다. ‘동화 테마’라는 것을 듣자마자 빠르게 케이크를 구상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는 눈과 서리, 얼음의 정령이 주인공이었다. 겨울바람에 눈발을 휘날리며 새벽 날 유리창에 서리를 남겨놓고 가는, 외롭고 고독한 바람의 정령. 그날, 그는 이미 어떤 모양의 케이크를 무슨 재료로 만들 것인지 전부 결정했다. 하지만 아직 다시 만들어보지는 못했다.

『물론.』

『실은 손님들이 제 봉래산의 옥 가지 케이크를 좋게 평가해주고 계세요. 진혁 군도 동화 케이크를 구상 중인데, 리처드 베이커 쉐프가 계신 동안 한정으로 세 종류의 동화 케이크를 판매하자는 의견이에요.』

『그래서 같이 일하자고 한 건가.』

리처드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유키코가 웃었다.

『오늘 발언해주신 점은 저도 느꼈어야 했던 점이에요. 임진혁 쉐프가 혼자서 감당해 오고 있던 일의 양은 정말로 많아요. 하지만 그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돕지 못하고 있었죠. 비록 얼마 되지 않은 직장 동료지만 저도 그 점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베이커 쉐프가 지적해 주셔서 도움이 됐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묘하게 톤이 높다. 리처드 베이커는 미식축구 선수 같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내가 지적할 문제는 아니었는데 미안하오.』

『임진혁 쉐프를 염려하는 마음 이야기해주셨지요? 부모님 이야기까지 해주셨고.』

『으윽…….』

리처드 베이커가 양손으로 붉은색 곱슬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왜 그랬지…….』

덩치 큰 남자가 온몸을 비비 꼬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오행진에 영향을 쉽게 받는 사람이군.’

진혁이 지난 몇 달간 관찰해본 결과, 오행진에서 진기를 회복시키는 것 외에 새로운 공능을 발견했다. 내공이 있는 고수가 아닌 일반인은 오행진 안에서 ‘솔직해진다’. 진심을 털어놓기 쉬운 환경이 되는 것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내성적인 이들보다 영향을 더 받았다. 진혁은 리처드 베이커가 그 오행진의 영향을 받아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으로 보았기에 오히려 미안해졌다. 어째서 그랬는지 알기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족 이야기를 하니, 초면에 그 정도까지 신경써주나 싶어서 신기했다.

『동화 케이크를 만드는 것은 즐겁게 하겠어. 하지만 진혁의 오리지널 레시피들을 만드는 것도 연습하겠다고. 내가 두 배 일하겠다고 선언했으니, 그 말은 지켜야지.』

하다못해 절반이라도 하겠다고 그는 씩씩하게 말했다.

『유키코 쉐프가 지금 1/3만큼밖에 하지 못하고 있는 건 견습생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니까.』

『그건 그래요.』

『오늘은 내가 주방의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동선에도 방해가 되니까 내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지. 하지만 바로 적응해서 임진혁 쉐프의 절반 이상, 그리고 나아가서 두 배 이상 일을 해낼 테니까.』

『적극적이라 좋군요.』

백진영이 웃었다. 환영회를 겸한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백진영이 소개한 가게는 인근의 닭도리탕 전문점이었다. 외국인이 있으니 치즈사리를 추가하자는 진영의 제안대로 치즈를 추가했고, 파를 추가로 올렸다. 냄비 째로 팔팔 끓여 나온 닭도리탕은 구수하고 진한 고추 향내를 풍겼다. 마늘과 고춧가루, 고추장과 생강, 매실 액이 든 양념장에 골고루 버무려져 붉게 물든 닭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백진영이 집게로 한 조각씩 집어 모두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오늘 제일 고생한 진혁이한테 제일 큰 조각 줍니다.”

“아니, 안 그래도 괜찮은데…….”

백진영은 양념에 듬뿍 절여진 큼직한 가슴살 조각을 양념 째 진혁이 앞 접시 앞에 놓아주고, 다시 집게를 집었다. 커다란 닭다리 조각을 받은 유키코가 환히 웃었다.

“고맙습니다!”

“유키코 씨는 가슴살보다 다리 파였죠?”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녀가 씩 웃다가 시계를 보았다.

“저는 30분쯤 먼저 일어날게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니까요.”

“그전에 많이 드세요. 은동 씨는?”

“저는 제가 알아서 집어 먹을게요.”

은동이 해맑게 웃었다.

“다 맛있어 보여요.”

국자로 마음껏 고기와 야채를 떠가는 김은동이었다. 진영은 리처드 역시 챙겨 주었다.

『베이커 쉐프, 이게 제일 맛있는 조각입니다. 질 좋은 지방이 풍부하고 콜라겐도 충분하고, 뼈를 분리해서 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게 맛있는 조각이라고?』

리처드는 해죽해죽 웃으며 닭 날개 조각을 입에 물었다.

『뼈가 씹히는데.』

『……뼈 말고 껍질을 즐기세요.』

『오오, 이런 요리인가.』

닭 날개를 자꾸 권하는 진영과, 맛있다고 먹는 리처드 베이커. 그 두 사람을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진영이 형, 아까 이야기 들은 거……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닭 날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진영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조각을 권유하는 작은 심술이 조금 웃겼다. 진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가슴살을 젓가락으로 찢었다. 결 좋게 찢겨진 작은 조각을 입에 물자 잘 숙성된 매운 양념이 입안에 확 퍼졌다.

‘……어떤 닭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린내도 잘 잡았군. 평화일봉 농장의 닭만큼은 못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일반적인 치킨집에서 사용하는 닭보다는 더 고급 닭을 쓴 것이 확실했다. 진혁이 만족스럽게 살코기를 씹었다. 유키코는 닭다리 살을 물고서 환성을 질렀다.

“맛있어요!”

“맵지 않아요?”

“전 매운 것 잘 먹어요. 어렸을 때 집에서 한국식 김치 김장도 했었고.”

“유키코 씨는 완전히 한국인이네.”

“절반은요. 선호는 3/4인 셈이고.”

“선호가 아들 이름이었죠?”

“예.”

그녀가 밝게 웃었다.

“이제 아버지 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축하할 일이네요.”

백진영이 마음 넓은 미소를 지으며 축하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완전히 마음을 정리했나보군.’

유키코가 고개를 숙였다.

“백진영 사장님에게는 항상 감사할 따름이에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진혁이가 다한 걸요.”

“물론 임진혁 쉐프님에게도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유키코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김은동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흐으으읍.』

한편 리처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불평 없이 잘 먹었다.

『매워도 맛있으니까 먹을 만하죠?』

『맵긴 뭐가 매워, 이 정도는 멕시코의 타코보다 덜 맵다고.』

『리처드 씨, 지금 눈물 나는데요.』

『맵지 않아. 나는 뉴요커다! 뉴욕에는 수없이 많은 세계 식당들이 있고, 그중 절반 이상은 매운 맛도 취급한다고.』

고릴라처럼 가슴을 치며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유키코가 눈을 깜빡거렸다. 백진영이 중얼거렸다.

『무리하셨다가 나중에 화장실에서 고생하실지도…….』

『백 사장, 방금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요.』

『내가 오늘 한 이야기가 아주 무례했지.』

리처드가 진지하게 백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김 쉐프에게도 이야기했지만, 백 사장님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지는 않았으니까 지금 사과하겠네. 갑자기 걱정되었다고는 해도, 내가 할 말도 아니었고 할 자리도 아니었어.』

『괜찮습니다.』

백진영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가 일 좀 덜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라고요. 자기한테는 아주 쉬운 일이고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하면서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해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유키코 쉐프가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진혁이 10년차 쉐프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베이커 쉐프가 잘 짚어주셨습니다.』

『흐.』

리처드가 가슴께를 짚었다. 백진영은 말을 계속했다.

『아까는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지금의 원가율은 50%입니다.』

일반적인 가게라면 원가율은 35% 이하여야 했다. 리처드 베이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높은데 어떻게 가게가 유지되지?!』

『말씀드린 것처럼 박리다매죠, 정말로 진혁이 한 명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겁니다. 저도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고, 개선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을 새로 채용하고.』

걱정스러워하는 리처드의 말에 백진영이 빙긋 웃었다.

『유키코 김 쉐프는 충분히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진혁이도 쉬는 날이 생겼구요. 리처드 베이커 쉐프가 말씀하신 대로 임진혁보다 2배의 몫을 해내신다면, 충분히 월급 값을 하시는 겁니다.』

『당연하지! 날 믿으라고』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곧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숙였다.

『……화장실이 어디지?』

『저쪽입니다.』

백진영이 안내해 주었다. 리처드 베이커를 무사히 화장실까지 안내하고 먼저 돌아와 자리에 앉은 그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 좋은 사람이네.”

“응?”

“미국인들은 다 개인주의적이잖아. 다른 사람 일에 별로 참견하지 않는데, 저 사람은 파트타이머로 와서는 네 건강까지 걱정해주는 걸 보면 신기해.”

“음.”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끔 멍청한 실수를 할 때는 있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지.”

“녀석이라니, 너보다 열 살은 많을 텐데.”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아 실수를 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매운 걸 잘 못 먹는 것 같던데, 닭도리탕 말고 백숙 같은 걸 주문하는 게 좋았으려나?”

유키코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설마 백진영 사장님이 외국인들에게 일부러 호된 맛을 보여주려고 닭도리탕을 시키셨겠어요?”

백진영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여기는 닭도리탕이 백숙보다 더 맛있어. 비법인 양념장이 괜찮거든.”

임진혁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형, 내가 말한 걸 기억하고 일부러 여기로 온 거구나.”

“양념 치킨 맛을 살린 치킨 파이를 개발할까 고민하고 있었잖아? 양념 치킨의 양념은 금방 질리는 것 같다고. 여기 양념장 먹어보면 네가 새 빵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었지.”

“이 맛은 걸쭉한 소스에서 나오는 거라서 빵 맛이랑 어울릴 것 같지는 않긴 한데, 신경써줘서 고마워.”

백진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하하.”

리처드 베이커는 한참 동안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가게에 설치된 벽면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탑골 공원에서 살인 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이번 피해자는…….」

하지만 소란스러운 가게에서 흔한 살인 사건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며 김은동은 생각했다.

‘백진영 사장님은 기분이 상하면 바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까는 타입이구나……. 나도 조심해야지.’

뒤늦게 돌아온 리처드가 호기 있게 선언했다.

『겨울 한정 서리 케이크.』

『예?』

『지금이 12월이니까, 2월까지 3개월 동안 판매할 리미티드 에디션 케이크야. 얼어붙은 호수와 겨울 바다, 빙하와 서리, 차가운 새벽을 테마로 할 거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그 이야기를 유키코가 통역해 주자, 진혁이 바로 대답했다.

“나는 일월(日月)을 테마로 하지.”

“달과 태양?”

“그러고 보면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도 그렇고, 임진혁 쉐프님은 하늘을 좋아하시나 봐요.”

김은동이 말하자 유키코와 백진영도 납득했다.

“해와 달이라…… 그 전래동화?”

“아니.”

진혁이 웃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의지로 위선자들로 가득 찬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야. 아마 잘 모를 거야.”

“영웅전 같은 건가?”

백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김은동이 지적했다.

“그보다 의지가 타버리면 재만 남잖아요, 숯처럼.”

“……어라?”

진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게 자기 몸을 불태울 만큼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라고.”

유키코가 손뼉을 쳤다.

“겨울에 맞서는데 해와 달이라는 테마를 꺼내들다니, 역시 임진혁 쉐프는 대단해요. 대립하지 않고 포용하는 주제네요. 봉래산의 옥 가지 케이크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나오길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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