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2화
“내일부터는 꼭! 네 말대로 해볼 테니까 잘 알려줘.”
“알았어요.”
진희는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영화에서 본 대로 하라고 알려주면 되겠지. 언니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보다는 그게 더 현실적일 거야.’
언제부턴가 술을 마시고 또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둘 다 다음날 출근이 있으니 술자리를 일찍 마쳤다. 취해서 비틀거리는 서미란을 집 앞까지 바래다준 진희는 돌아오다가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네?”
진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큰 이모 뇌종양이 없다고요?”
「이게 자연스럽게 없어졌대. 가끔 그렇게 기적적인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고…….」
어머니가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진희는 어이가 없어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니, 있던 종양이 없어질 리가 있어요?! 그게 없어진다니 말이 되냐고요.”
그녀는 답답해하며 발로 바닥을 쿵 하고 굴렀다. 바닥에 있는 보도블록에 살짝 금이 갔으나 진희는 눈치 채지 못했다. 보도블록 옆쪽, 흙바닥 깊숙이 살고 있던 개미들은 어마 놀래라 하고 알을 물고서 피신했다. 발밑에서 일어나는 민족대이동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반갑게 인사하던 경비원 아저씨가 웃으며 말을 걸었으나, 진희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종양 전문의는 뭐래요?”
「잘됐다던데.」
어머니가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진희가 코웃음을 쳤다.
“잘되긴 잘됐죠. 뇌종양이 아니라니 저도 기뻐요. 하지만 큰 이모가 이제껏 먹어왔던 독한 약들, 병원 진료비, 무엇보다 여태까지 했던 맘고생. 그것들은 다 어쩌고요.”
「이게 병원 잘못은 아니잖니?」
“당연히 병원 잘못이죠! 오진을 한 거잖아요. 멀쩡한 사람을 암 환자로 만들어 놓고 필요하지도 않은 치료를 했는데! 100%, 아니 300% 걔네들 잘못이라고요.”
문득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은 진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큰 이모 암 진단비 받았잖아요. 천만 원.”
「어? 응? 그렇지?」
“보험 회사에서 이제 진단비하고 병원비 반환 청구할 텐데요. 이모는 그거 준비하고 계세요?”
전화 저편에서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나, 그렇네. 다시 내놓으라고 하려나.」
“이모가 받은 병원비나 검사비, 전부 다시 뱉어야 돼요.”
진희가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큰 이모가 암이 아니라니 너무 잘됐어요. 저도 기뻐요. 하지만 지금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엄마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요.”
「알았어, 너 같은 딸이 있어서 다행이다.」
전화를 끊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 고양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진희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서는 다시 방으로 쏙 들어갔다.
“진호야!”
진희는 날렵하게 뛰어가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누나 위로 좀 해줘. 우리 가족한테 큰일이 생겼다고.”
고양이는 세로 동공을 깜빡이더니 가늘게 울었다.
“야옹.”
“그래그래, 네 맘 다 알아. 누나 위로해주는 거지?”
“야아오옹.”
진희는 고양이를 데리고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자고 일어나서…… 내일은 엄마 없으니까 5시까지 나가야지.’
알람을 맞추고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도 큰 이모가 괜찮아지셔서 다행이야.’
◈ ◈ ◈
다음 날은 리처드 베이커의 첫 출근일이다. 3개월만 함께하는 파트타이머기는 하지만, 가게에 큰 일손이 될 사람이다.
‘김은동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되겠지.’
유키코에게 몇 가지를 배웠지만 아직 진혁의 높은 기준을 통과하지 못해, 은동이 하는 일은 잡일 수준이다. 자신의 반죽이 아직 미숙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진혁은 은동이 3개월 이내에 기본 반죽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인력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실 은동이 제몫을 하고 있다면 좁은 주방에 사람을 하나 더 들일 일도 없으니까.’
새벽부터 출근한 리처드 베이커는 헝클어진 붉은 머리 위에 조리모를 눌러 쓰며 씩 웃었다.
『깔끔하고 좋은데. 내 주니어 쉐프들도 이만큼만 하면 좋을 텐데!』
유키코가 통역해 주었다.
“가게가 깔끔하고 좋다고 하시네요. 쉐프의 귀감이라고 하고 계세요.”
매일같이 많은 양의 작업을 하는 부엌이 구석구석 깨끗하기는 쉽지 않았다. 리처드는 진혁이 직원들보다 일찍 나와서 가게 청소를 마쳐놓은 것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유키코는 재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다.
『재료는 이쪽에 있는 것을 쓰시면 됩니다.』
유키코는 자랑스럽게 재료들을 보여 주었다. 수북이 쌓인 달걀들은 그녀가 쓰면서 품질과 신선함에 감탄했던 것이다. 평화일봉농장에서 가져온 신선한 달걀들은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고 매일 배달받는다. 밀가루는 젤로스 사에서 랑비에 씨가 추천한 제일 좋은 밀가루들이다. 그밖에 야채와 고기, 치즈와 유제품까지 모두 최고급만을 쓴다.
달걀을 굴려보기부터 시작해서 재료를 하나하나 살핀 베이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내가 말할 일은 아닌 것 같긴 한데.』
리처드가 미묘한 표정으로 고민스럽게 말했다. 유키코가 통역하기 전에 진혁이 말을 꺼냈다.
“뭘 만들지 모르겠으면 동화 테마로 하나 정해보라고 해요.”
“그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자기가 이 이야기를 해도 될지 어떨지 모르겠대요.”
『이 재료들로 저 가격이면……. 내가 한국 돈 개념이 없어서 그런가? 팔면 팔수록 마이너스 아니야? 원가율이 너무 낮잖아.』
“재료값이 너무 비싸니까, 저 가격으로 빵과 케이크를 팔면 오히려 적자가 나는 건 아닌지 걱정하시는데요.”
유키코가 말했다. 청소하고 있던 김가영과 서창덕이 속닥거렸다.
“진짜로 전혀 다른 얘기네요.”
“난 임 쉐프님이 눈치가 빠른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무시하고, 유키코가 말했다.
“처음에 저도 걱정했던 문제네요.”
임진혁이 물었다.
“유키코 쉐프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예, 처음에 유기농 재료‘만’ 쓰는 걸 보고 진짜 깜짝 놀랐죠. 이 가격에 저렇게 팔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소망시에서 파는 가격보다는 5배 이상 비싼 가격인데 말이죠. 형이 가격 책정을 맡겼을 때 제가 거의 하긴 했습니다만.”
‘베이커 쉐프는 동화 테마로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으니까, 나하고 같이 동화 테마의 케이크를 새로 제작하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케이크 제작‘보다는 원가율인가…… 윈도우 베이커리의 오너 쉐프는 쉐프일 뿐만 아니라 경영자여야 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진혁이 곰곰이 생각했다. 일월신교라는 대규모의 조직을 이어받으면서 그는 행정적인 면에서는 아예 손을 뗐다. 교주의 역할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무공 수련을 계속하며 최강자의 위치에 남아 있는 것이었기에, 실제 업무는 광안마가 거의 대행하다시피 했다. 소교주 시절에는 일부 행정적인 분야에 참여했지만 교주가 되면서 오히려 최종 결정만 내렸고, 세부 사항은 각 당주(堂主)들이 알아서 했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디선가 뚝딱 벌어왔지.’
광안마는 묘한 데 재능이 있었다.
진혁이 소교주의 위를 부여받기 전, 진혁과 광안마가 함께 말단 거지로 잠입해서 개방의 본당에 가야할 일이 있었다. 눈치 없는 광안마 놈은 거지 역할을 해서 거액의 돈을 벌어들였고, 너무 유명해졌다. 잠입을 하기는커녕 몰매를 맞고 쫓겨났고, 결국 광안마 녀석을 버리고 진혁 혼자 살수처럼 개방의 본당에 따로 숨어들어야 했다. 녀석이 손대는 사업은 전부 번성해서 막대한 돈을 벌었으나 무공의 재능은 상업적 재능보다 부족했다. 놈은 세상사가 돈 벌기처럼 쉬웠으면 좋다고 징징대며 혈도객의 천재적인 무공 재능을 부러워했다.
‘광안마, 네놈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 지금 내 옆에 있다면 내가 격렬하게 예뻐해 줄 텐데.’
반면 혈도객 녀석은 의리가 있고 내공이 깊으며 무공실력이 뛰어났으나…… 상업적인 재능은 0에 한없이 수렴했다. 위장하기 위해 교자 만두 좌판을 한 시진(2시간) 동안 맡겼는데 그 동안 십 냥의 손해를 보고 올 정도였다. 만두 열 개를 팔아봤자 열 푼인데 도대체 어찌 그런 경제적 피해를 입었는지 광안마가 따져 묻자, 어떤 짓을 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만두 한 개 크기가 너무 작다고 생각해서 아주 거대한 만두를 만들었다. 강력한 무공의 힘을 빌어 사람 머리 만하게 빚어낸 만두를 두 푼에 파니 반 시진 만에 하루 분의 재료가 다 팔려나간 것이다. 그는 위장을 위해 그곳에 계속 있어야 했기에 자비로 재료를 사와서 다시 거대 만두를 빚어 팔았는데, 재료를 구입하는 와중에 물정 모르는 티를 냈기에 지나치게 비싸게 사기까지 했다.
‘만두 하나를 팔면 십오 푼이 넘게 손해가 발생하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돼?!’
‘많이 팔렸으니까 좋은 거 아니야?’
‘아니야! 이 만두는 안 팔리면 안 팔릴수록 좋은 거다!’
광안마는 혈도객의 멱살을 잡고 싶어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길거리의 만두 가게 아저씨가 그렇게 거대한 만두를 팔고 있으면 기억에 남잖아! 바보냐! 전혀 위장이 아니라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장사를 잘 할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해서…….’
‘…….’
그때의 대화가 유난히 생생하다. 당시 진혁은 이 두 놈이 싸워 서로 죽일까봐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월신교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던 혈도객은 의와 협을 비웃는 광안마를 경계하고 있었으며 광안마는 혈도객 녀석이 진혁의 가장 아끼는 측근이 될까봐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 ‘거대 만두 십 냥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은 은근히 가까워졌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광안마는 ‘무공 천재면 뭐하냐. 상재가 없으니 강호에 나가면 굶어 죽겠다. 불쌍한 놈.’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혈도객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배울 점이 있으니 광안마 놈한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어색하게 거리를 두던 시절에서, 서로를 위해 목숨도 걸 수 있는 친우가 되기까지 팔십여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금 리처드 베이커의 눈빛은, 혈도객의 만두 장사를 보는 광안마와 매우 유사했다.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방금 새로 쓴 쉐프 모자인데도 괜히 뒤통수가 가려웠다.
‘설마 내가 지금 혈도객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사실 저도 글로벌 기업에서 케이크 개발과 중심으로 일해 오면서…… 재경부에서 요청해서 원가율을 낮추는데 주력하긴 했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재료값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만들어도 된다고 하셔서…….”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봉래산의 옥 가지 케이크를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어서 기뻤고, 재민 씨를 찾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유키코가 갑자기 변명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진혁이 손을 내저었다.
“사실 사업적인 면에 대해서는 백진영 형, 아니 작은 백사장님이 알아서 하고 계시니까요. 진영 형! 여기 좀 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