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1화
진혁은 음식이 살짝 달콤한 편을 선호했다. 이 밀크 초콜릿 크림과 복숭아 무스는 아주 잘 어울렸고 그의 입맛에 딱 맞게 달았다. 직접 내린 것이 분명한 짙은 원두커피의 향까지, 마무리까지 깔끔한 맛이다.
‘오행진이 이 케이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군.’
원래도 맛있는 케이크였을 테지만, 오행진은 이 재료의 참맛을 극한까지 이끌어냈다.
그녀가 H & J 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 유난히 제빵이 잘 되는 것 같다고 말한 이유는 오행진임이 분명하다.
물론 오행진이 있다고 해서 개떡 같은 케이크를 만들어도 천국의 맛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유키코가 뛰어난 실력을 갖고서 다양한 맛이 조화를 이루는 케이크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기에, 맛있는 케이크가 더 맛있어진 것이다. 정말로 고용한 보람이 넘치는 쉐프다.
‘이 크림을 마지막까지 먹고 싶은데.’
임진혁은 자신이 접시 대용으로 쓰던 종이컵 안쪽에 붙어있는 말차 테린 조각과 초콜릿 크림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고 있지 않을 것을 확인한 후 허공섭물을 이용해 동실동실 띄워, 젓가락에 슬쩍 붙였다. 마지막 크림까지 확실히 입안에 넣자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을 흠뻑 적셨다. 흐뭇하고 유쾌한 맛이다.
새것처럼 아무것도 없이 희디흰 종이컵 바닥을 보며 임진혁은 만족했다.
‘깨끗하군.’
분재 가지를 꺾어 대나무 가지 옆에 놓아둔 것처럼 보이는 케이크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맛이 좋았다.
겉보기에는 케이크 같아 보이지 않지만 훌륭한 케이크다. 복숭아와 초콜릿, 커피와 말차가 조화롭게 어울렸으며 이 네 맛을 숨김맛으로 감싸고 있는 것은 골드럼, 그리고 생크림이다. 네 사람이 포크를 놓고 나서 브라이언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함께 왔습니다.”
케이크를 맛보고 멍해져 있던 이헌용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몽환 속에서 현실로 돌아온 듯 눈을 비볐다.
“아, 예. 부탁하고 싶으신 일이라면……?”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고 푹 쉬고 온 것처럼 상쾌하다. 유키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 이 분도 가족을 찾고 계신데, 도와주실 수 있는지요.”
브라이언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서 직접 쓰신 손 편지와, 어렸을 때 지어주신 본명, 그리고 맡기신 시설 이름이 있습니다. 지금은 폐업했다고 해서 거기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만……. 아주 유능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진짜 신선의 복숭아라도 먹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분위기는 느긋해졌지만 이헌용은 아까 임진혁이 풍기던 살인적인 분위기를 잊지 않았다. 그가 진혁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조금 바빠서요. 부탁받은 일도 있고.”
임진혁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헌용을 빤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케이크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진혁은 아무 생각 없이 보낸 시선이었으나 이헌용은 제풀에 주눅이 들었다.
“제가 일순위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암요.”
“감사합니다!”
브라이언 신이 안도한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꼭 친부나 친모 중 한 명을 모시고 결혼식을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서, 약혼녀가 오래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가 벽에 걸린 낡은 달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가 2개월 안에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가능하면 그 전에 결과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다아아아알?’
이헌용은 마음 속 깊이 비명을 질렀다. 들어보니 여러 사람에게 부탁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럼 또 다른 곳에 맡겨봤자 헛수고다. 이헌용은 자신이 없었다. 그가 부정적인 말을 하려는 찰나 임진혁이 입을 열었다.
“잘 찾아 줄 겁니다.”
꼬리가 있었다면 바닥에 축 늘어뜨리고, 배를 드러내며 바닥에 누워 항복 자세를 취했을지도 모른다. 완연히 시무룩해진 이헌용이 미간을 찡그리며 더듬거렸다.
“예, 제가…… 잘 찾아…… 보겠습니다.”
사실은 전혀 찾고 싶지 않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돈이 안 되는 사람 찾기를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불륜, 외도 전문이란 말이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외쳐도 들릴 리가 없다. 이헌용을 두고서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유키코와 브라이언이 먼저 나가고 난 후, 진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기차표.”
이헌용이 직각으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예! 내일까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빨리 빨리 해.”
“시정하겠습니다! 내일 오전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잘하고.”
“옙!”
◈ ◈ ◈
그 시간, 소망시 산목 아파트 앞, 곱창집에는 두 여자가 마주앉아 있었다.
임진희와 서미란이 나란히 소주 잔을 부딪혔다. 투명한 유리잔에 가득 찬 소주가 찰랑거리며 빛을 반사했다. 진희는 소주 한 잔을 그대로 원샷하고 나서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란 언니, 제발! 직접 말해요.”
제발에 강세를 두어서 말했지만 미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그녀는 소망시청의 직원으로 행사 진행부터 잡무까지 온갖 일을 다 하는 말단 공무원이다. 소아암 환자를 위한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면서, 대회 데스크 앞에 앉아 있는 잡일까지 떠맡았다. 땡볕 아래 앉아 있는 그 일은 모든 직원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었기에 본래 담당이 아닌 미란에게 밀려왔다.
하지만 그 일은 의외로 즐거웠다. ‘마약 카스텔라’가 첫 선을 보이는 현장에서 사람들이 다들 빵을 먹고 굳어버리는 재미있는 광경도 구경할 수 있었고, 이후 소망 베이커리 담당이 되어 카스텔라 주문과 관리를 맡게 된 것도 그녀였다.
미란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게 된 것이 아주 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동아리 후배, 진희와 다시 만나서 친해진 것도 그렇다. 한 살 연하의 진희는 소망시를 떠나 다른 광역시에 취업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더랬다.
하지만 최근에 일을 그만두고 소망시로 돌아오고 나서는 자주 만나게 되었고 옛날처럼 금방 다시 가까워졌다. 옷 취향이나 음식 취향 등등 미란과 진희는 많은 것이 맞았는데, 단 하나 전혀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연애를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언니 스타일대로 하다가는, 감씨 할아버지처럼 첫사랑이랑 결혼하는데 70년이 걸리겠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감씨 노인은 어렸을 때, 8살 때 처음 본 순간부터 금씨를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든이 넘어 새 연애를 시작해서 결혼까지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상속 문제가 생기기도 하며 자녀들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씨 할매는 집안을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존재로 아들을 포함한 모두가 금씨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결혼이 가능했다고도 들었다. 제 나이 때 제대로 고백해서 일찍일찍 맺어졌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속도로 연애를 하는가. 진희는 서미란이 도대체 언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 정도는 아니다. 내가 자주 나타나고 얼굴을 보이면 호감도가 쌓일 거야.”
미란이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이름도 알고 직장도 알잖아요. 언제까지 호감도만 쌓을 건데요?”
서미란이 화제를 돌렸다.
“주문부터 하자.”
“이모! 여기 소금구이 모듬 2인분이요!”
“예~!”
소금구이는 담백하고 쫄깃쫄깃하지만 양념은 화끈하고 맛있다. 둘 중 무엇을 먹을지 고민이 되어 일단 술부터 시키고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진희가 단호하게 내린 결론에 미란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소금만 먹게?”
“언니, 우리 소금 먹고 난 다음에 양념도 먹어요.”
“그래.”
미란이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주문하면서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겠거니 했지만 진희는 잊지 않고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호감도는 이미 충분히 쌓인 것 같습니다만……. 언제까지 호감도를 쌓으실 겁니까? 서미란 선수?”
진희가 마이크처럼 상추를 모아쥐고 미란에게 갖다대며 장난을 쳤다. 미란이 웃었다.
“이벤트가 발생할 때까지입니다-.”
“이벤트으? 언니, 옛날에 하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아직도 하는 거예요?!”
“아니, 그냥…… 조금. 연애를 할 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도움이 될 리가 절대로, 매우, 전혀 없다고요! 그러다가 이십 년, 삼십 년 걸리겠어요. 아예 지인의 단계를 넘어서 친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요.”
진희가 답답해하며 제 가슴을 쳤다. 새까만 숯불은 몸을 불태우며 희게 익어가고, 석쇠 위에 올려진 야들야들한 내장 조각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간다. 불판 위에 자글자글하게 기름이 타닥타닥 튀기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곱창 조각을 집어 언니 밥그릇 옆에 하나 놓아주고 자기 입에도 하나 가져갔다. 진희는 첫 곱창은 쌈 없이, 양념 없이 본연의 맛을 즐겨야 한다는 주의였다.
“음, 맛있다.”
쫄깃쫄깃하게 입 안에서 씹으며, 곱이 화악 터져 나온다. 저절로 소주잔에 손이 간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을 즐기며 진희가 잠시 잔소리를 멈추었다. 그 틈을 타서 미란이 변명했다.
“그렇게 해서 친구가 되면 우정에서 사랑으로 가는 루트를 타면 되지. 일단 이렇게 호감도를 쌓다 보면 언젠가 날 여자로 의식하는 날이 올 거야.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아아아아.”
진희는 한숨을 푹푹 쉬며 소주잔을 내밀었다. 미란이 소주를 따라주는데 그녀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보다 일봉 매니저님의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드는 건데요?”
“성실하잖아.”
“……성실하긴 하죠.”
진희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미란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 원래 남자는 좀 못생긴 게 좋아. 잘생기면 얼굴값을 하거든.”
“그거 너무 편견에 가득 찬 발언 아닌가요?! 진혁이만 봐도 잘생기고 착하잖아요!”
진희가 우겼다.
“엄마 생신 때 산 구두도 구둣값 다 내고. 황금 같은 휴가에 큰이모 뵌다고 부모님 모시러 내려가고. 이번에 제가 가게 일 돕는다고 하니까 가게 지분부터 받으라고 부모님 통해서 제안까지! 물론 저는 알아서 거절했지만 말이에요!”
줄줄이 읊어대는 자랑에 미란이 미묘한 얼굴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 오빠 편들기는.”
“오빠 아니라 남동생이거든요!”
“그걸 너희가 정하는 게 아니잖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건데, 둘이 합의한다고 엄마가 언니 되고 아빠가 오빠 되는 거 아니거든?”
“이상한 예 들지 말아요.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잖아.”
“그러게, 오빠가 아빠 된다였나?”
“그건 친남매 간에 쓰는 말이 아니거든?!”
‘이 언니는 일도 잘하고 마음씨도 좋고 다 좋은데, 꼭 술 마시면 이상한 아저씨 개그를 늘어놓는다니까.’
아주머니가 푸근하게 웃으며 허연 김이 피어오르는 우거지된장국을 내놓았다.
“임씨네 따님이죠? 이것도 같이 드세요.”
“어머, 감사합니다!”
“자주 와 줘서 고마워요.”
잠시 따뜻한 우거지국을 마시며 조용해졌다가 불꽃같은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여튼 언니의 방법은 잘못됐어요. 좀 더 매니저님 중심으로 접근해 봐요. 직접 말도 걸고, 얼굴도 자주 비추고! 지금은 딱 사무실 일 있을 때만 오잖아.”
“용건 없는데 오면 스토커 같잖아. 잘못된 루트가 개방된다고.”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시고요……. 용건이 없으면 만들어요! 빵을 사서 먹는다던가.”
“아.”
“……이모님! 여기 양념 모듬 곱창하나요!”
“혹시 풀 좀 좋아하면, 내가 특별한 쌈채 좀 갖다 드릴게.”
진희가 양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주세요!”
“아참, 잘 먹으니 좋구만.”
상추와 깻잎만이 아니다. 녹색의 넓적한 잎사귀나 얇고 긴 자잘한 잎사귀들, 그리고 쭉쭉 길게 자란 이파리까지 다양한 쌈채를 한 바구니 내어주셨다.
“말 편하게 해도 되지?”
“그럼요! 이모님. 병철 사장님 어머님이시잖아요, 엄마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이 채소가 다 우리 아들 하는 농장에서 가져온 거야.”
“아시죠? 저희 샌드위치도 여기 채소 받아서 하는 거.”
“그럼 그럼, 알지. 왜 몰라.”
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환히 웃었다. 진희가 씩씩하게 말했다.
“이건 케일이에요? 저희 받는 채소 중에는 없는데, 줄기가 보라색인 게 특이하네요.”
“쌈으로 해서 먹으면 맛있어.”
“언니도 한 번 먹어 봐, 내가 싸 줄게. 여기 조심해요. 기름 튄다.”
고기를 쌈으로 감싸다가 날렵하게 손목을 움직여 튀기는 기름을 피하는 모습을 보고 미란이 놀랐다.
“넌 어쩜 그렇게 잘 피하니?”
“헤헤. 요즘 컨디션이 좋아요. 진짜 사직이 만병퇴치약이라니까요. 언니도 시청 그만두면 몸 좋아질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