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0화
문 건너편에는 유키코 김과 브라이언 신, 두 사람의 쉐프가 서 있었다. 노크를 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유키코는 오늘, 카페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이전에 이런 식으로 도우미를 소개받았다가 좋지 않은 경험이 있었던 브라이언 신이 유키코에게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명화흥신소…… 간판이 꽤 낡았군요.”
브라이언이 페이스트리 키친의 헤드 쉐프를 맡고 있는 곳은 번화가에 있는 특급 호텔로, 저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우아한 모던아트 스타일로 최고급 내장재를 사용해 꾸몄다.
한국에서는 죽 시내의 호텔에 머물러, 이런 허름한 곳에 와본 적이 없을 뿐이다.
예외라면 전에 한 번 갔던 영등포의 홍등가 정도인데, 여기는 거기보다 훨씬 더럽고 낡았다. 그렇지만 총소리도 들리지 않고 마약상도 없어, 브라이언은 이곳이 신기했다.
‘역시 미국은 총기가 문젠가?’
브라이언이 간판을 보고 고급스럽지 못한 인테리어에 실망했다고 착각한 유키코가 말했다.
“간판은 낡고 허름해 보이지만 소장님은 아주 좋으신 분이에요.”
유키코는 이곳의 장점을 열심히 설명했다.
“한번 물으면 놓지 않는 사냥개처럼 끈질기게 추적해서 결국 재민씨를 찾아 주셨거든요. 그리고 또, 아주 친절하십니다.”
“그렇습니까.”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은 방음이 잘되지 않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안까지 잘 들렸다. 유키코가 다시 한 번 노크를 하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중년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유키코 씨.”
눈 아래에는 그늘이 짙고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어 피곤해 보이는 남자가 이헌용, 명화흥신소의 소장이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유키코를 반겼다. 유키코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소장님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녀가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이번에 제가 새로 개발한 케이크입니다. <봉래산의 옥 가지 케이크>라고 하지요. 보잘것없는 성의지만 드셔 보세요.”
“…….”
이헌용은 말없이 케이크를 받아들었다. 그는 탕비실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커튼 뒤의 작은 공간으로 향했다. 종이 접시와 컵, 일회용 젓가락 따위를 챙겨온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같이 드시죠.”
“아! 집에 가셔서 드셔도 되는데…….”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그럼 같이 드시면서 이야기하시죠.”
‘설마 뭔가 수상쩍은 거라도 탄 건 아니겠지.’
이헌용은 이 여자가 ‘그 남자’를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토끼가 잘 모르고 호랑이를 데리고 온 건지, 아니면 눈치를 채고 데리고 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소장은 저 여자, 유키코가 모든 것을 알면서 자신을 갖고 놀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버리지 않았다. 당장 가져온 케이크 모양부터 괴상했다.
‘이게 무슨 케이크야?’
마른 나뭇가지 위에 진주처럼 보이는 구슬이 올라온 것처럼, 기묘하게 생겼다.
소장은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인스턴트 믹스 커피 스틱을 꺼냈다.
“블랙으로?”
“괜찮습니다. 혹시 물을 마실 수 있을까요?”
“저는 커피는 됐습니다.”
“이 케이크는 블랙 커피랑 잘 어울리기는 해요. 아, 여기 이 분은 브라이언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브라이언 신이 인사하는 동안 유키코가 핸드백에서 작은 녹색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크를 제가 잘라 드릴까요?”
치실을 잡아 빼서 길게 늘인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자르면 예쁘게 잘리거든요.”
케이크 아래 상자에 빵칼이 없나 살피고 있었던 이헌용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 예.”
치실로 케이크를 자른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았다. 파리 한 마리 못 잡을 것처럼 생긴 여자는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치실을 다잡더니 순식간에 케이크를 절반으로 잘랐다.
‘이 여자가…… 정체를 드러내고 기선제압을 하는 건가?’
이헌용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세 조각으로 나누는 게 좋을까? 흠…….”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헌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살인귀이자 고문 전문가가 인간인 척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여.”
“어서 오십시오!”
이헌용이 정수리를 바닥에 박을 것만 같은 기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불길하고 위험한 무언가가 인간인 척 다가오고 있는데, 먼저 와 있던 두 손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멀쩡했다. 진혁이 위압감을 이헌용에게만 발산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임 쉐프, 여기 올 거였으면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임진혁 쉐프님도 오셨으면 네 조각으로 잘라야겠네요.”
브라이언과 유키코가 반갑게 인사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살벌한데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니?! 거기에 밝은 목소리로 인사까지.’
이헌용은 유키코와 브라이언, 두 남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졌다.
그가 알기로는 저 여자는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여자다. 이사를 가고 전화번호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찾지 못할 정도로 몇 년을 헤맬 정도로 어리석기까지 했다.
‘전부 가장한 건가?’
서류를 위조하고 배우들을 고용했을까. 언뜻 추려 봐도 집 구매와 판매까지 고려하면 억을 한참 초월하는 규모의 금액이 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서류 위조비나 배우 고용 인건비까지 생각하면 상상할 수도 없다.
몇 년에 걸쳐서 단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돈과 시간을 들일 리가 없다.
‘초국가적인 규모의 음모?’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핑핑 돈다. 파편화된 생각들이 비논리적으로 널뛰었다가 치솟아 오르고 추락했다가 서로 모인다.
이헌용이 자신만의 음모론에 빠져있는 동안 진혁이 입을 열었다.
“기차가 방금 도착해서.”
기차로 왔을 리가 없다. 거짓말을 하는 임진혁의 얼굴은 지극히 태연했다.
‘기차표를 가지러 오신 거군.’
아까 아는 녀석에게 부탁해서 지하철역에서 적당히 주워오라고 시켰다. 당연히 아직 오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진 이헌용이 입을 뗐다.
“케, 케, 케이크부터 드시면 어떻습니까.”
“소장님이 임 쉐프님을 엄청 아끼시네요.”
유키코가 웃으면서 말했다. 브라이언은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유키코에게 듣기로는 유키코가 오랜 고객이었고 임진혁은 일을 맡긴 적도 없다고 했는데, 소장이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
‘한국 문화는 원래 이런 건가?’
브라이언이 포크를 들어 임진혁에게 건네주었다.
“임 쉐프도 같이 드셔 보시죠. 저도 이건 맛보지 못해서 먹어보고 싶은데.”
이헌용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어색하게 서서 혼자 눈치를 보고 있는데 임진혁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나도 이건 먹어보고 싶었는데, 고맙습니다.”
네 조각으로 깔끔하게 잘려진 케이크는 여전히 나뭇가지 모양을 간직하고 있었다. 부쉬 드 노엘과 유사한 스타일로 초콜릿 크림이 아이싱된 케이크 가지가 하나씩, 일회용 컵에 담겨 각자 앞에 놓였다. 각 가지 위에는 진줏빛 구슬이 세 개씩 올려져있다. 유키코는 자그마한 정육면체 모양의 녹색 케이크 역시 토막 나서 한 조각씩 종이컵 안, 나무 조각 옆에 얹어 주었다.
“처음 유키코 쉐프님이 레시피를 불러주실 때에는 이런 모양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입니다.”
“아이 참, 그 얘기는 촬영 직후부터 하셨잖아요.”
“일본에 그런 동화가 있는 줄 알았으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헌용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입을 다물고 나무젓가락으로 케이크를 집었다. 의심 많은 그는 다른 사람이 입에 넣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초콜릿…….”
이헌용의 식생활은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프랜차이즈 김밥 가게에서 김밥을 사먹는다. 전날 술을 먹은 경우에는 김치찌개나 육개장을 곁들이기도 한다. 오후에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활명수 한 잔. 점심은 중국집 배달 음식, 저녁은 건너뛰거나 아예 술을 마신다. 소주는 무조건 빨간 딱지 녹색 병. 초콜릿이나 과자, 빵이나 케이크 같은 것은 잘 먹지 않는다.
그는 이제까지 솔직히 끈적끈적한 크림 덩어리나 푸석푸석한 빵 따위를 왜 먹고 좋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흔한 초콜릿처럼 과한 싸구려 단맛을 예상했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인공적이고 과한 단맛이 아니었다. 달지 않지만 달콤하다. 눈밭에 찍힌 발자국 하나처럼 아주 살짝 달았다. 녹아내리는 희미한 단맛은 푹신푹신한 시트의 식감으로 이어졌고, 마지막 뒷맛은 쌉싸름한 커피향과 함께였다. 미리 준비한 인스턴트 커피 따위보다 훨씬 진하고 깊은 향이다. 저절로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이헌용은 기도 깊숙이 잔향을 들이마셨다. 떨리는 손으로 나무젓가락을 움직여 이번에는 녹색 크림을 듬뿍, 진줏빛 감도는 구슬에 묻히다시피 해서 입술로 가져갔다.
달고 보드라우며 농밀한 과일맛이다. 신선한 백도와 황도를 아낌없이 사용해 만든 복숭아 무스는 젤라틴과 요플레가 섞여, 이헌용은 이것이 원래 복숭아라고 알아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진한 녹색의 씁쓸하고 부드러운 크림은 아예 생전 처음 맛본 것이었다. 이헌용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녹색 케이크는…….”
“그건 말차 테린입니다. 흔히 말하는 녹차는 잎을 말린 것이고, 말차는 잎을 가루로 만든 것이라 향이 더 진하죠.”
유키코가 차분히 설명했다. 브라이언 신이 말없이 케이크를 맛보며 눈을 감았다.
“복숭아 맛이 살아나려면 가지가 이렇게 얇아야 하는군요. 다크 초콜릿이 아니라 밀크 초콜릿을 사용한 것도, 말차와 복숭아와 초콜릿을 어우르려고 해서.”
그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마음속 깊이 뉘우쳤다.
‘내가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았어도, 유키코 쉐프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을 수 있겠군.’
“심사위원들이 이 맛을 봤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여기에 더 깊은 단맛이 있는데, 이건 뭘 섞은 거지……?”
진혁이 중얼거린 혼잣말에 유키코와 브라이언이 동시에 대답했다.
“골드럼이죠.”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킥킥 웃었다.
“레시피, 아직 기억하고 계시네요.”
“복숭아 무스는 제 약혼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라서요. 골드럼을 넣는 게 특별하게 느껴져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브라이언이 미안해하며 다시 한 번 사과했다.
“그보다 제가 케이크를 망쳐버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미 다 지난 일인데요.”
임진혁은 종이컵 바닥에 묻은 크림을 내려다보았다. 종이컵에 묻힌 채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맛이다.
‘확실히 솜씨가 좋아.’
그가 유키코에게 이 케이크를 만들도록 권유한 이유는 간단하다.
진혁 역시 ‘봉래산의 옥 가지’ 케이크를 맛보고 싶었다.
심사위원들은 통통한 나뭇가지와 구슬을 보고 초콜릿 맛이 너무 진하다는 평을 했지만, 진혁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