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49화 (149/656)

제 149화

“그럴 리가요. 저한테 관심이 있을 리가 없는데.”

진희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야 만날 때에 진혁이 형 얘기를 계속 하니까요.”

‘내가 보기에 진혁이 얘기를 계속 꺼내는 건 미란씨가 아니고 일봉씨인데?’

임진희는 케이크에 설탕 시럽을 전부 다 발랐다. 일봉이 칭찬했다.

“잘 됐네요.”

“원래 집에서도 진혁이보다 제가 요리는 더 잘 했어요.”

임진희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래요? 진혁이 형이 빵 만드는 걸 보면 손재주가 얼마나 뛰어난데. 어렸을 때부터 분명히 송편도 잘 빚고, 만두도 예쁘게 만들었겠죠?”

“손바닥만한 녹색 반죽을 큼직하게 쥐어서 만들어 놓고 티라노 사우르스 송편이라고 우기질 않나. 큰이모께서 먹을 걸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하니까 티라노 사우르스는 장난이 아니라고 우기지를 않나. 엉망진창이었죠.”

“역시 형은 어렸을 때부터 창의적인 면모를 보였네요.”

“…….”

‘뭐지? 얘 설마 진혁이를 좋아하나?’

임진희는 위험한 상상을 하며 크림을 떠냈다. 미리 준비해둔 버터크림은 사용하기 직전에 다시 휘핑해야 한다. 진희가 어제 만들어 보관했던 버터크림을 다시 휘핑하는 동안 일봉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빵가루가 묻지 않도록 얇게 한 겹 발라주는 걸 크럼 코트(Crumb coat)라고 한 대요.”

“맞아요,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죠.”

“그 다음에는?”

“잠깐 냉장고에 넣어줘서 크림이 단단해지게 합니다!”

“맞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연상의 제자를 보며 일봉이 흐뭇하게 웃었다.

‘사장님이 이런 맛에 나나 연수, 민준이 형을 가르치는 건가보다.’

진혁이 형에게 제빵을 배우던 무렵에는 백 번 이백 번을 연습해도 형처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봉은 항상 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멍청해서 사장님이 하는 대로 못 따라한다고 생각했지.’

학교에서 얻었던 자신감이 산산이 무너지면서,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오백 번 정도 연습하니 형이 하는 것의 겉핥기정도는 따라할 수 있었다. 그랬더니 용기가 생겼다. 포기하지 않을 용기, 향상심에 대한 욕망이 생겨서 멈출 수가 없었다.

‘느리게 배운 만큼, 가르치는 능력이 생겼는지도 몰라. 내가 어렵게 배운 만큼 더 쉽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거지. 처음부터 내가 쉽게 그냥 따라할 수 있었다면, 민준이 형이나 연수에게 가르쳐 줄 때 두 사람이 어려워하는 부분이 뭔지 잘 몰랐을 테니까.’

일봉이 허민준 형이나 김연수에게 가르쳐 보니, 그들은 훨씬 더 오래 걸렸다. 설명을 듣고 바로 따라 하기는커녕, 수십 번 수백 번 연습을 하면서 버벅였다. 가르치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하던 차에 한 번 배우면 바로 이해하는 제자를 보니 기뻤다.

‘나는 어쩌면 형처럼 제과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고, 교육자의 재능이 있는 걸지도.’

그때 진희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진희의 얼굴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예, 엄마. 네. 이제 다 했어요. 알았어요.”

어두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자, 일봉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큰이모가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하네요. 어머니는 큰이모를 돌봐야 하셔서 내일 가게에 못 오시고, 둘째 이모가 가시면 오후에 오시겠대요.”

“자영업이 그런 게 힘들죠.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큰이모님께서 별일 아니셨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제 친구가 접수과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3주 후에 있는 예약을 당겨서 진료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어요.”

“맞다, 원래 간호사셨다고 했지.”

“예.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뭘요, 저도 형한테 도움 받는 걸 갚는 것뿐인데요.”

◈          ◈          ◈

“진혁아, 서울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겠니?”

“아버지도 피곤하시잖아요. 제가 알아서 갈 수 있습니다.”

못내 걱정하던 아버지를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보낸 후, 진혁은 서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허공답보를 이용해 올라간 후, 능동허도로 하늘을 걷는다. 어두운 밤, 바람을 헤치며 날아가며 진혁은 생각했다.

‘이제 내일 또 촬영인가…….’

지난 쇼들은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유키코 쉐프를 얻은 것은 물론, 파트 타이머라고 해도 리처드 베이커 쉐프를 일꾼으로 얻게 되었다.

‘가능하면 브라이언 신도 같이 일했으면 좋겠는데.’

일찍이 탈락한 몇몇 놈들을 빼면 지금 함께 출연하는 출연진들은 다들 솜씨가 나쁘지 않았고, 인성도 괜찮았다. 허공을 걷는 진혁의 허리춤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유키코의 전화였다.

“……예, 김 쉐프님.”

“임 쉐프님!! 기쁜 소식이 있어요!!”

그녀는 숨 가쁘게 이야기를 쏟아냈다.

“‘봉래산의 옥 가지’…… 케이크가…… 지직…… 완판…… 지지직…… 손님들이 아주 좋아…… 지지지직.”

“잘 됐네요. 축하합니다.”

진혁은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한 말이 전달되지 않고 뚝 끊겨 버렸다. 그는 허공을 걸어 산으로 내려갔다. 산봉우리 위에 솟은 나무와 나무 꼭대기를 밟고 밟아 뛰어가다가 산을 절반쯤 내려오자 문자가 바로 들어왔다.

「어디 계신지 전파 문제로 전화가 끊겼습니다. 봉래산의 옥 가지 오리지널 케이크가 완판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임 쉐프님!!」

유키코가 보낸 문자였다.

“이쪽 길에는 기지국이 없으니까…….”

지금은 공식적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해야 하고 있을 시간이니, 혹시 부모님에게서 연락이라도 오면 귀찮게 둘러대야 하는 점이 있다.

이럴 때는 알아서 착착 챙겨 놓던 광안마 놈이 그립다. 하지만 지금 진혁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시켜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 생긴 부하 1에게 전화를 했다.

“소망시에서 서울행 기차표, 8시 도착한 걸로. 오늘 것.”

“예! 알겠습니다!”

“조금 후에 가지러 갈 테니까.”

혼자 살고 있는 원룸에 도착한 진혁은 환영마라진을 다시 설정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 누군가 와서 헤매다 죽어버리면 곤란하므로 자리를 비울 때에는 진을 접어놓는다.

밖에서 입고 있었던, 외출용 붉은 티셔츠를 벗고 실내용 붉은 티셔츠로 갈아입고 운기조식을 하고 나니, 유키코가 보낸 문자가 있었다. 그 문자를 보고서 진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후에 마주치겠군.”

◈          ◈          ◈

진혁이 문자를 보기 1시간가량 전, 명화흥신소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믿을만한 해결사이자 오랜만에 방문한 손님 앞에서 소장은 몇 번이고 사진을 보여주려다가 다시 감추었다. 단순히 사진을 보여주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짙다.

십 분 넘게 그 짓을 반복하자 소장 앞에 선 석배가 마침내 짜증내며 말했다.

“안 보여줄 거면 난 간다.”

시간이 남아서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좍 빼입은 명품 양복의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채로 다리를 뻗었다.

“위협을 당해서 생명이 위험하다며.”

구둣발을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구둣발에서 떨어진 흙이 책상 위의 서류에 묻었다.

“이번에 구해 주면 빚은 없는 걸로 하겠다며? 그런데 누구한테 위협을 당하는지도 알려 주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흥신소장이 사진을 내밀었다. 그 사진에 담겨 있는 것은 20대 남자였다. 잘생긴 얼굴에 미소 없이 무뚝뚝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빵집 앞에 서 있다. 그 얼굴을 알아본 돌배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떼려는 찰나였다. 흥신소장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다. 내가 최근에 만난 청부업자.”

“음?”

돌배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려던 차에 소장이 말을 가로챘다.

“단순한 청부업자가 아니라 조직의 비밀 병기 급이야. 어느 파 소속인지 알아? 뒷배가 든든한 사람일 텐데.”

“파 같은 소리 하네. 이 사람, 빵 만드는 놈이잖아!”

돌배가 벼락처럼 소리쳤다. 얼떨떨해진 흥신소장이 입을 벙긋거렸다.

“빵? 무슨 빵?”

“요즘 히트 친 디저트 쇼인가 뭔가 하는데에 나오는 토종 제빵사잖아. 내 딸이 팬이라서 나도 보고 있다고. 유일하게 한국의 명예를 지켜주는 사람이라던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돌배가 흥신소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니…… TV 출연은 위장이 분명하다니까. 적당히 흉내 내거나 대역을 쓰거나 그랬을 거야.”

그러고 보면, 타겟 ‘임진혁’ 의 사진을 입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흔히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빵사인척 이중생활을 하면서 TV 쇼에 보조적으로 출연해 합법적인 사업을 광고하는 것이 틀림없다. 평범한 제빵사가 그런 눈을 갖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건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자의 눈이었다. 뼈를 부러뜨리면서 감흥 없이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어느 조직의 비밀병기, 아니면 후계자 급이 틀림없다. 인생 제일의 큰 건수다.

“석배 형, 나, 나 못 믿어?”

“어.”

석배가 단언했다.

“얘 솜씨는 진짜야. 니가 망상하는 대로 얘가 조직 후계자라면 뭐하러 텔레비전에서 얼굴 팔고 있겠냐? 세상에 부동산이니 뭐니, 좋은 사업이 얼마나 많은데. 그 중에서 3D인 제과제빵을 하고 있겠냐고.”

그는 미간을 찡그리고서 흥신소장, 이헌용-가명 이상용의 가슴을 검지손가락으로 쿡, 쿡 찔렀다.

“상용아. 이런 걸로 장난하지 말고, 진짜 내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라고.”

“으……. 진짜인데…….”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상용을 내려다보며 석배가 팔짱을 끼었다.

“나 간다.”

석배가 나가고 나서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억울해하며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석배가 가버리고 그는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평범한 제빵사일 리가 없다고. 절대로…….”

그는 자신의 경험과 직감을 믿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쓸모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자신은 처분되어 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 보여주려면, 상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어느 조직의 누구를 뒷배로 두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조직을 이어받을 후계자인지 알아야 그를 위해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석배가 모를 정도라면 둘 중 하나지. 정말로 엄청난 뒷배가 있는 사람이거나…… 아예 조직 없이 혼자 일하는 사람이거나.’

띠링!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방금까지 이헌용이 두려워하고 있던 <그>가 보낸 문자였다. 문자의 내용을 보고 이헌용이 눈을 크게 떴다.

“편도 기차표 한 장? 이게 왜 필요…….”

새 기차표가 아니라 이미 사용한 기차표를 원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실제로 가지 않은 곳에 자신이 있었다고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헌용은 키보드를 두드려 금일 있었던 사건과 사고를 검색했다. 금일 오후, 서울시 중구에서 발생한 은행 강도 사건, 그리고 남부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사건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중 ‘그 남자’가 지시한 시간에 일어났을 법한 사건은 하나뿐이었다.

“탑골 공원에서 발견된 시체…… 아직 범인은 불명.”

이헌용은 미간을 찡그렸다. 단순한 우연이었지만 그는 그런 것까지 알 수 없었다.

“역시 프로페셔널 킬러가 틀림없어. 이런 것까지 나한테 부탁할 정도라면, 혼자 일하는 쪽인가……?”

그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헌용은 머뭇거리며 문 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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