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7화
10대 시절, 진혁은 공부를 하지 않고 몰래 놀러 다녔지만, 도서관에 갔다 왔다고 변명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도서관에 갔다 오지 않은 건 분명히 알고 있으셨을 테지만 그걸 말로 하진 않으셨던 것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뒤늦게 알게 되는 일들이 있다.
‘그나저나 볼 때마다 느끼지만 두 분 다 정말로 거짓말은 못 하시네.’
진혁이 피식피식 웃으며 좌탁을 들어 올려 접어 두었다.
“그동안 많이 바쁘셔서 못하셨을지 몰라도, 매일 하는 게 건강에 좋아요. 오늘은 특별히 안마를 같이 해드릴 테니까 기체조를 다시 같이 해보죠.”
어머니의 어깨는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환골탈태를 겪어 전성기로 돌아 육체의 근육 덕분이다. 진혁이 모친의 어깨와 등에 추궁과혈을 하자 어머니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어…… 그래…… 거기.”
“여보, 서울에서 올라와서 힘든 애한테 안마를 시키고 그래. 당신이 해주면 모를까.”
“그러네. 진혁아, 엄마가 안마해줄까?”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이제 아버지 해드릴게요.”
“괜찮대두.”
안마를 해주고자 하는 아들과 피곤한 아들을 염려하는 아버지가 실랑이하는 사이에 진희가 끼어들어 참견했다.
“그럼 아빠 안마는 내가 할게!”
“고맙다, 진희야.”
말릴 틈도 없이 진희가 아버지의 어깨를 주무르는 것을 진혁은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추궁과혈할 기회를 놓쳤다. 그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다음에 큰이모를 뵈러 갈 일이 있어요?”
“내일 내려가기로 했는데. 왜, 너도 같이 가게?”
어머니가 묻자 아버지가 제지했다.
“너도 바쁜데 경남까지 어떻게 내려가려고 그래. 큰이모한테 뭐 할 얘기라도 있어? 전화로 해.”
“아닙니다.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라.”
진혁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큰이모도 싫어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는 새로이 개발한 기술을 사용해 큰이모의 종양 크기를 줄일 생각이었다.
‘백 퍼센트 안전해.’
◈ ◈ ◈
“어서 와라, 진혁아!”
큰이모가 뒤뚱뒤뚱 걸어와 진혁을 반겼다. 진혁은 큰이모를 보며 과거에 알던 그녀를 떠올렸다.
큰이모-장은숙은 네 딸 중 첫째로,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후에 나이 터울 많이 나는 막내 여동생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다. 여동생 셋을 모두 아끼지만 막내 은효를 특히 아꼈고 은효가 낳은 아들, 진혁을 유달리 예뻐한다.
‘회귀 전, 내 병원비를 위해서 밭을 팔아 보태셨다고 했지.’
큰이모에게는 빚이 있는 셈이다.
“또 그거 입었지. 언니! 이제 그만 입어도 되잖아.”
그녀가 입고 있는 주황색 스웨터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티셔츠는 낯익은 붉은색이다.
장은효는 언니의 옷차림을 보고서 눈을 크게 뜨며 조용히 불만을 속삭였다. 아들에게 들리지 않게 할 속셈이다. 큰이모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입고 싶으면 입는 거지!”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그 대화는 진혁에게는 아주 잘 들렸고, 그 이야기를 들은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는 큰이모가 입으신 주황색 스웨터가 마음에 안 드시나?’
진혁은 어머니가 빨간 티셔츠를 아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얼마 전, 레드 티셔츠 케이크를 본 어머니는 크게 놀라며 감동하셨다. 티셔츠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눈물까지 흘리시기까지 했다. 진혁은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소중한 추억인 붉은색 티셔츠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이 깨달았다.
그 이후, 진혁은 어머니를 뵈러 올 때에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빨간색 티셔츠를 안에라도 꼭 입고 오려고 노력 중이다.
“진혁이 온다고 해서 돼지를 한 마리 잡았지.”
자랑스럽게 선언한 큰이모를 보고 부모님이 깜짝 놀라 말했다.
“돼지를 한 마리나?!”
“언니, 너무 무리한 거 아니에요?!”
“새끼돼지 90kg 한 마리 잡았다. 그것도 반 마리는 노인회관에서 가져갔어. 우리 먹을 건 45kg밖에 안 된다. 그 정도면 식구들끼리 충분히 먹지.”
“처형, 너무 많은데요…….”
“남은 건 챙겨줄 테니 가져가서 집에서 냉동했다가 썰어서 먹으렴.”
“언니! 너무 많다니깐.”
“괜찮아, 괜찮아. 작은 돼지야.”
큰이모가 환하게 웃었다.
“돼지 농장에서 싸게 팔아줬어. 우리 마을 사람이 잘 됐으니 자기도 기분이 좋담서. 핫핫!”
“진혁이가 부돈면 사람은 아니죠.”
“어허! 부돈면에서 태어났으면 부돈면 사람이지.”
“고작 한 달 있었잖아요…….”
아버지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것을 못 들은 큰이모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마을회관에서 돈을 내서 저렇게 플랜카드도 해 주었어. 멋지지?”
“예?”
큰이모가 손가락질한 곳에는 멋없는 회색 시멘트 건물이 서 있었다. 새마을 운동의 잔재인 시멘트 건물에는 깨끗하게 칠해진 파란 박공 지붕이 올려져 있었는데, 거기에 임진혁의 얼굴이 박힌 커다란 플랜카드가 휘날리고 있었다.
“아니, 저건…….”
임진혁이 말을 더듬었다. 그는 평생 놀란 적이 세 번 있었는데 첫 번째는 교통사고를 통해 전신마비가 되었던 때였고, 두 번째는 무림에 가게 되었을 때였으며, 세 번째는 무림에서 회귀하였을 때였다. 지금은 바로 그 네 번째였다.
“<경, 부돈면 출신 임진혁 TV 출연 축>이라…… 우리 진혁이 잘 나왔네.”
아버지가 촌스러운 플랜카드를 보고 웃음을 애써 참으려 눈을 깜빡거렸다.
노란색 플랜카드에는 촌스러운 검은색 궁서체로 글씨가 써있었는데, 양쪽 끝의 글자 ‘경축(慶祝)’만이 한문이었다. 왼쪽 끝에는 임진혁의 얼굴 사진이 직사각형으로 찍혀 있었는데 유달리 퀄리티가 좋아서 고딕체 글씨체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 진혁이 저기 있어도 잘생겼네.”
어머니가 웃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방앗간집 손자가 대학 합격했다고 플랜카드 걸었던 자리야. 이번에 내가 그집 할매 코를 단단하게 눌러 줬지. 대학에 합격하는 것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게 더 어렵지 않냐고!”
부모님과 큰이모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굳어 있던 진혁이 간신히 입술을 뗐다.
“……저거 설마 오늘 제가 내려온다고 만드신 겁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고작 텔레비전 방송에 나왔을 뿐인데 이렇게 마을단위로 축하할 일이라고까지 여겨진다는 점이 신기하다.
중원에서 연예인에 가까운 직업이라고 한다면 기녀나 방랑하는 예인 정도다. 고급 기루에서 일하는 최고급 기녀라 할지라도 돈을 내면 꺾이는 꽃에 불과하다.
예인들은 백정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부잣집 잔치에 불려와 춤과 곡예를 선보이고 몇 푼 돈을 받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아주 뛰어난 악사라면 황궁 악사로 고용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도 영…….’
기예 자체가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 지금은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 가수가 엄청나게 인기를 얻고 있으며 대우가 좋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연예인이라고 하면 오히려 오룡(五龍)과 이봉(二鳳)일까.’
지금의 연예인 같은 대우를 받는 사람이라고 하면 오룡과 이봉이 있었는데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로 무공이 뛰어나고 용모가 잘생긴 젊은 협객 다섯 명과 미녀 고수 둘이었다.
이야기꾼들은 중원에 이 이야기를 실어 날랐으며 그들의 용모파기를 그린 그림들도 푼돈에 팔려나갔다.
이 이야기들은 정파가 일월신교에 비해 얼마나 협의로운지 포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진혁은 7명의 젊은 고수들이 실력을 더 발전시키기 전에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귀찮은 일이었어.’
하나 죽이면 또 생기고 또 죽이면 새로 생긴다.
허나 명문세가의 귀한 자제들이 오룡이나 이봉으로 임명되는 순간 이름이 알려지기도 전에 살해당해 죽어나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결국 그 칭호 자체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정파의 프로파간다를 없애는데 삼십년 가까이 걸렸다.
큰이모가 상을 내왔다. 열다섯 가지가 넘는 반찬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은효가 놀랐다.
“언니, 준비를 뭘 그렇게 많이 했어. 힘든데…….”
“힘들긴,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찹쌀과 대추, 인삼을 넣고 쪄낸 토종닭은 덩치가 컸다. 하얀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것을 보면 시간 맞춰 방금 끓여낸 것이 분명하다.
묵은지 돼지고기 김치찜과 돼지고기 수육, 그리고 돼지갈비가 가득 담긴 작은 단지가 나란히 놓였다. 오이지와 마늘장아찌, 깻잎과 쌈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밥과 이름 모를 나물 무침들까지 식탁이 꽉 찼다.
“어서들 들어.”
장은숙이 돼지고기 김치찜 위의 묵은지를 죽 찢어 임진혁의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새하얀 밥알 위에 붉은색 김칫국물이 뚝 뚝 떨어져 밥이 붉게 물들었다. 그 위에 손바닥 절반만한 크기의 돼지고기까지 올려주고서 그녀가 씩 웃었다.
“이거 네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지?”
“고맙습니다, 큰이모.”
진혁은 돼지고기와 김치, 밥을 한꺼번에 수저 위에 올렸다. 크기가 꽤 커서 입을 크게 벌려야했다.
“음.”
찢어지면서 묵은지에서 진한 김칫국물의 감칠맛이 녹아나왔다.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돼지고기에 햇쌀밥의 쌀알 알갱이들이 문드러지며 입안을 그득히 채웠다.
“먹을 만하지?”
“맛있어요, 큰이모.”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확실히 큰이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큰이모와 둘째이모, 셋째이모는 요리를 잘하는데 유난히 어머니만 못하는 것뿐이다.
‘세 분이 요리를 너무 잘하셔서 어머니가 요리를 할 새가 없었나?’
대신 세 분과 달리 어머니는 유난히 청소를 잘했다. 파출부로 일한 것도 청소 솜씨를 인정받았다고 들었다.
“은효 너는 마늘 장아찌를 좋아했지?”
“언니, 고마워요.”
손이 큰 큰이모는 한 번에 마늘장아찌를 여덟 개씩 집어서 여동생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일이 익숙한 은효는 마늘장아찌를 하나씩 밥과 함께 수저에 담아 입에 넣었다. 여동생과 조카의 밥에 반찬을 얹어 주며 큰이모가 미소 지었다.
“제부는 알아서 먹고.”
“예, 처형.”
임운정은 집게와 가위를 들어 토종닭의 닭다리를 죽 찢었다. 쭉 뻗은 닭다리살을 보며 큰이모가 웃었다.
“우리 은효가 닭다리살을 좋아하지?”
임운정이 순간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처형을 똑바로 응시했다.
“……물론 제가 은효 주려고 한 겁니다.”
그는 닭다리살을 잘라 덜어내어 아내에게 주었다. 장은효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먼저 먹어도 괜찮은데. 고마워요.”
진혁은 아버지를 힐긋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젓가락이 돼지갈비로 향하자, 큰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은효가 돼지갈비도 참 좋아해.”
“에이, 은효만 좋아하나요. 처형도 좋아하시는데.”
아버지가 새 젓가락을 들더니 큰이모의 밥그릇 위에 올려 드렸다. 큰이모가 입을 헤 벌리며 웃었다.
“아이구, 제부님! 이럴 필요가 없는데!”
그녀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주면 잘 먹지. 하하하!”
도란도란 식사가 끝나고 진혁이 말했다.
“이모, 제가 준비한 케이크를 드릴게요.”
그는 아주 특별한 케이크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