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화
다른 쉐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냉엄하게 말했다.
“브라이언 신 쉐프는 불러준 사이즈와 다른 사이즈로 부쉬 드 노엘을 만들었고, 리처드 베이커 쉐프는 아예 지시의 일부를 빠뜨렸죠. 잘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원래 레시피에는 충실했어야 했습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냉철하게 말했다.
“리처드 베이커, 탈락입니다.”
“……!”
“패자부활전에서 리처드 베이커 쉐프와 함께 겨룰 사람은.”
이희주가 말했다.
“브라이언 신 쉐프입니다.”
화면 속, 서 있는 출연자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린다.
유키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브라이언 신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리처드 베이커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내놓은 케이크는 ‘마법의 사과’였다. 과거 우승후보로 손꼽혔던 만큼, 두 사람 모두 케이크를 유사한 모양으로 시간 내에 재현했다. 근소한 차이로 탈락한 것은 리처드 베이커였다.
브라이언 신과 리처드 베이커가 포옹하며 화면이 저물었다.
“아깝다! 실력이 좋은데 떨어져서.”
“지금까지 남은 사람들은 다들 실력이 비등비등한데.”
어머니와 진희가 안타까워하며 화면을 응시했다.
모녀를 흘깃 본 진혁은 실제 쇼 촬영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마법의 사과’ 케이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기억’했다. 심안(心眼)은 나날이 깊어가, 멀리서 보고도 반 이상 성분을 분석할 수 있는 수준에 달했다. 조금 더 발전하면 맛보지 않고도 맛을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베이커 쉐프는 우승후보로 유력했는데 이렇게 중간에 떨어지다니.”
“자기가 부족함을 느낀다고 하더라구요.”
“너랑 친해?!”
“친하지는 않지만 직장 동료가 될 예정이지. 원래 촬영 기간 내내 휴가를 낸 상태라, 3개월 정도 할 일이 없다고 하더라고. 그 3개월간 H & J 에서 파트 타임으로 뛰기로 했어.”
“리처드 베이커를 스카웃했다고?!”
아버지가 놀라워했다.
“페이를 엄청나게 줘야 했을 텐데.”
“레시피를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이전 안토니오 칼루치오에게 준 레시피를 보고 자기도 자극을 받았대요. 실력을 발전시키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주 잘 된 일이구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아버지가 진혁을 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지, 그 레시피를 보고서…….”
진혁과 레시피를 교환할 수 있는 기회, 리처드 베이커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번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긴 했으나 기본기는 충실한 정통파 페이스트리 쉐프다.
진혁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해 그를 받아들였다. 백진영 역시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이러다가 H & J 가 완전히 디저트 서바이벌 쇼의 쇼케이스장이 되겠어.”
진희가 중얼거렸다.
“설마.”
진혁이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는데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진혁아. 네가 만든 난쟁이들 말이야. 도대체 어떤 동화라고 생각해서 그런 난쟁이들을 상상한 거야? 정말 리얼하던데.”
아버지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진희는 네가 즐겨 하던 게임 캐릭터가 아니냐고 묻더라. 그리고 몇 개 보여줬는데 내가 보기에는 게임 캐릭터 같지는 않더만.”
“요즘은 게임, 하지도 않는걸요.”
진혁이 대답했다.
“……혹부리 영감하고 도깨비가 아닌가 해서 그랬어요. 처음에 커다란 사과라고 눈치 채지 못해서, 떼어놓은 혹을 과장되게 표현한건가 하고.”
“읍푸푸! 거기서 혹부리 영감이 도대체 왜 나와.”
진희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는 납득했다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아주 어렸을 때 들려준 이야기인데도 잘 기억하고 있구나.”
“엥? 어렸을 때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고요?”
“우리 집에 있던 동화책 전집 중에 있었잖아. 기억 안 나?”
아직 한글을 떼기도 전이었던 세 살 적에 어머니가 읽어 주셨다고 한다. 진혁으로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쓸데없는 걸 잘도 기억하고 있구나.”
진혁이 진희를 놀렸다. 진희가 발끈하기 전에 어머니가 중재했다.
“아무튼 고생 많았다, 진혁아.”
진희가 입을 삐죽거리며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진희야, 그걸 진혁이한테 보여줘야지.”
“……아직 좀, 부끄러운데.”
“남매인데 뭐 어때, 보여줄 수 있지.”
진혁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뭔데? 안 보여줘도 돼.”
그 말을 들은 진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우씨, 기다려 봐! 내가 보여주고 만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평범한 소보루빵이었다. 오행기가 미미하게 서려 있는 것을 보면 어디서 만들었는지 명약관화하다. 진혁이 물었다.
“나 먹으라고 빵을 남겨놓은 거야?”
소보루빵은 아버지가 처음으로 혼자 만들게 해 준, 추억의 빵이다. 종종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만들어 먹기도 한다. 진희가 자신만만하게 빵을 내놓았다.
“일단 먹어보기나 하라고.”
“흠.”
거북이 등딱지처럼 갈라진 빵부스러기 아래, 포동포동하게 부풀어오른 빵은 아주 맛있어 보였다. 먹음직스러운 황금빛 빵을 반으로 뚝 가르자 듬뿍 들어있는 커스터드 크림이 노오란 형태를 드러냈다. 그 안에 서린 희미한 진기의 주인이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언제 빵에 진기를 담을 정도로 성장했지?’
“이거, 진희 네가 직접 만들었구나.”
포슬포슬하게 흘러내리는 빵부스러기 하나라도 놓칠세라 입에 물며 진혁이 물었다.
“어때? 내 솜씨도 의외로 괜찮지?”
진희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머쓱해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모양새다.
“네가 만드는 난쟁이 케이크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그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고.”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서 빵집에 따라와 구경을 같이 해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빵을 만들어 보는 것은 이번에 퇴직한 이후가 처음일 텐데 생각보다 솜씨가 좋다.
“아버지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텐데, 학원이라도 다녔어?”
“선생님은 너도 아는 사람이야.”
“설마?”
“유일봉 매니저님입니다!”
진희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와, 일봉이도 많이 컸네. 누굴 다 가르치고.”
진혁이 의외의 대답에 놀라며 말했다. 그가 기억하는 일봉은 성실하지만 손이 느리고 열심히 하는, 노력파 대학생이다.
혼자서 빵을 만드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자신이 서울에 올라가 있는 동안 진희가 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까지 실력을 키웠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즐거운 놀라움이었다.
아버지가 웃으며 덧붙였다.
“일봉이가 꽤 잘 가르치더라.”
“자기가 가르치는 건 너보다 더 잘한다고 신나있던데.”
진희가 신나서 재잘거렸다.
“흠.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
진혁은 순순히 인정했다. 무공을 타인에게 전수할 생각이 없는 이상, 진혁은 좋은 스승이 되기는 틀렸다. 그는 일반인의 신체 능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남들도 조금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좋은 스승의 재목은 못되었다.
진혁이 누군가를 잘 가르치려면 먼저 일반적인 인간의 능력적 한계에 대해 고심하고 고찰할 필요가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는 그러한 데에 시간을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 큰이모의 뇌종양 문제나 TV출연, 공장건설 등 우선순위에 있는 일들이 산재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진혁은 지금 진희의 뛰어난 잠재력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단순히 빵을 만들 수 있는 것과 빵에 진기를 싣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는 무림에서 무기에 자신의 기운을 실어 만드는 대장장이를 본 적이 있었다.
‘아까운 놈이었지.’
그는 사천의 당문(唐門)에서 야금술을 주특기로 하여 당문의 암기를 제작하는 자였다. 돈과 여자로 적당히 유혹해서 일월신교에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려고 했는데 멋대로 자살해버렸다. 세상에는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인간들이 참 많다.
“이 커스터드 소보루빵은 신메뉴를 개발하려고 만들어 본 거야?”
진혁이 묻자 진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황금버터 앙금소보루 만큼은 못하잖아. 메뉴에는 못 올리지.”
아버지가 진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소보루빵은 그게 압도적으로 맛있으니까.”
“진혁이가 몇 년 동안 빵을 만들어왔는데, 고작해야 한 달 정도 공부했다고 따라잡을 수는 없지.”
어머니가 진희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빵 만들기 연습하느라 고생이 많았어.”
진희가 씩씩하게 말했다.
“집안 사업을 돕기로 한 이상 제 몫은 확실하게 하고 싶다고요.”
“요즘 빵이 잘 팔리는 걸 보고 견습생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애들도 많아. 연수와 민준이까지만 받고 당분간 더 이상은 받지 않기로 했다. 가게도 좁은데.”
아버지가 진희가 만든 빵을 떼어 먹었다. 커스터드 크림이 흘러나오는 부분을 빵부스러기에 발라 먹자, 바삭바삭하고 달콤해져 입맛에 쏙 맞았다. 아버지가 대견스럽다는 듯 진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만들었다. 많이 나아졌구나.”
“고마워요, 아버지.”
진혁이 기지개를 펴며 허리를 쭉 폈다.
“아버지, 공장 건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어. 예정보다 오히려 더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그건 정말 잘 된 일이네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도 계속 들러서 현장 보고 계시죠?”
“너도 한 번 보러 가야지.”
“예.”
민병철이 몇 번이나 보러 오라고 했지만, 혼자서 가게를 담당하고 있고 하나뿐인 휴일에는 촬영을 하러 가는 통에 도통 시간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유키코 김 쉐프가 한 축을 차지하고 있어 건설현장을 보러 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병철이가 너를 정식으로 고문 대우해서 모시고 싶다고 하던데.”
“정식으로라…….”
“계속 자문이라는 형태로 네 의견을 듣고 있지만, 좀 더 공식적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지.”
“아버지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쁠 건 없다고 본다.”
아버지가 진중하게 진혁을 바라보았다.
“병철이 녀석은 너한테 보답하고 싶다고 하더라.”
“보답이라면……?”
“유기농 야채나 채소, 치즈나 우유를 개인에게 조금씩 팔아도 크게 돈이 안 되었는데, 지금은 맛있는 샌드위치가 되어서 전국으로 팔려나가고 있으니까. 녹색 농부 조합의 조합원들 모두 그게 전부 네 덕분이라고 생각한단다.”
“그것만은 아닐걸요.”
진혁이 피식 웃었다. 계산속이 빠르고 상업적인 마인드가 강한 민병철이니까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얻고 있는 유명세를 사업에 이용할 속셈인 것이 분명하다.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것은 없지만, 진혁 자신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얻어내야 할 것이다.
“그럼 오늘치 텔레비전도 보았으니까, 하고 계신 기체조는 제대로 하고 계신지 점검해 보죠.”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가 진혁을 바라보았다.
“기체조…….”
어머니가 시선을 피했다.
“……다, 당연하지?”
아버지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탁기가 다시 조금씩 쌓여가는 속도를 보면 아예 안 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들이 당부한 만큼 매일 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듯 미안해하는 부모님의 표정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부모님의 기분이 이런 거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