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화
두 번째 겪는 실패에 진혁이 심통난 듯 손을 뻗었다. 생크림과 조각난 케이크 시트가 흩어져 깨끗한 바닥을 더럽히기 직전, 진혁은 오른손을 치켜 올렸다. 공기의 흐름 자체를 허공으로 끌어올리자 작은 소용돌이가 크림과 산산조각난 케이크 시트를 빨아올리며 떠올랐다.
“이건 파르페로나 만들어야겠군.”
재료는 소중하고 음식은 버리면 안 된다. 진혁은 음식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항상 명심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손을 휘젓자 크림과 빵조각이 뒤범벅된 혼합물은 스테인리스 보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케이크의 시트는 인간의 뇌 역할을 하며, 생크림은 두개골인 셈이다. 안쪽에 박혀있는 딸기 조각은 큰이모의 뇌속에 숨은 뇌종양과 똑같은 크기다.
‘강환을 이용하면 뇌종양만 파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차라리 기둥을 파괴해서 건물을 쓰러뜨리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심안을 통해 뇌종양의 위치를 꿰뚫어 보았다고 해도 그것뿐이다. 진혁이 외과의사인 것도 아니고, 주변의 섬세한 신경과 조직을 다치게 하지 않고 종양만 파괴할 방법이 없었다.
큰이모부는 내로라하는 외과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아내의 뇌를 수술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위치가 너무 나쁘다며 거절했다.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수술을 하려고 해도 지나치게 깊숙한 부분에 있기 때문에, 수술을 하다가 폐인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했다.
손쓸 수 없는 무력감.
진혁에게는 정말로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원하는 일은 일월신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현대로 돌아온 이후에는 더욱 더 그렇다. 빵을 만들면 맛있다. 부모님이 환골탈태하니 건강해졌다. 텔레비전에 나오니 가게가 잘 되었다. 승승장구하는 지금, 유일하게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큰이모의 뇌종양.’
이모의 눈 뒤쪽에 자리한 작은 뇌종양은 자라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진혁은 강제로 파괴하거나 없애버리지 않고 큰이모의 몸에 생기가 흐르게 하여 자연스럽게 건강하게 만들면 나아질까 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큰이모에게 준 레드 셔츠 케이크에 특별히 손을 보았다. 진기를 한 푼 가량 주입해 케이크의 생기를 활성화시켰다.
‘하지만 원하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였지.’
레드 셔츠 케이크를 먹자, 오히려 암덩어리가 한순간 생기를 얻어버렸다. 신체가 일시적으로 활력을 되찾으면서 종양 역시 기운을 나눠 받은 것이다. 심안으로 지켜보고 있던 임진혁은 크게 실망했다.
‘건강한 사람을 더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암환자의 암덩어리도 커지게 해버리면 안 돼.’
그러고 보면 전에 임진희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있다. 10대 암환자의 경우 노인보다 더 진행이 빠르다고 했다. 성장기의 청소년이 건강하게 자라면서, 종양 역시 빠르고 크게 자란다는 이야기였다. 들으면서 묘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는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줄은 몰랐다.
“두 번째.”
두 번째 케이크는 반으로 쪼개져 버렸고, 세 번째 케이크는 위아래로 뜯겨 산산이 비산했다. 풍비박산이 난 네 번째 케이크와, 동강동강 조각나 널브러진 다섯 번째 케이크도 운명이 다르지 않았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케이크 역시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조각으로 화했다.
이쯤 되면 파르페를 만들기에도 지나치게 많은 양이다. 그냥 먹어버릴 수밖에 없다. 스테인리스 보울에 가득 담긴 일곱 개 분의 케이크와 크림을 숟가락으로 퍼먹으며 진혁은 착잡한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실제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연습하는 편이 훨씬 효과는 좋겠지.’
이전이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두 명 정도,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술꾼들을 잡아서 연습 상대로 삼으면 된다.
만일 죽는다면 삼매진화로 시체를 불태워버리면 그걸로 깔끔하게 끝이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으면 살인 사건의 수사는 좀처럼 시작되지 않으니 의문의 실종 사건으로 끝나버릴 뿐이다.
‘부모님이 알 수 있을리도 없고.’
진혁은 지금의 자신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현대의 가치관을 존중하려고 해도 순간순간 과거의 경험이 불쑥 튀어나와 버린다.
이전에도 흥신소장, 이헌용이라는 인간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 뻔했다. 살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살려 두는 편이 써먹기 용이하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놈이 너무 약했던 것이다. 진희가 욕했던 의사 놈도 지나치게 나약해 금방 죽어버렸다. 중원의 무림인이었다면 삼류 무인이라도 그 정도는 버텼을 것이다.
현대의 법률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누구도 죽이면 안 된다. 하지만 진혁에게 있어 인간은 허약하기 그지없어, 조그만 실수만 해도 금방 죽어버린다.
“부모님이 알면 불쾌해하실 거야.”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하나 저질러 버렸다. 절대 들킬 생각은 없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다.
진혁은 여덟 번째 케이크에 강환을 쏘아 보냈다. 총알에 맞은 것처럼 한줄기 구멍이 죽 뚫린 케이크는 그대로 회전을 멈추고 벽 뒤쪽으로 날아갔다. 진혁은 허공섭물로 케이크의 추락을 멈추고, 빵칼을 던졌다.
케이크 위에서 멈추어 방향을 바꾼 빵칼은 케이크를 여덟 조각으로 잘라냈다. 하나씩 하나씩 각자 접시에 날아가 앉은 케이크 총 8조각.
케이크 조각에 포크를 가져간 진혁이 한 덩어리를 움푹 퍼서 입 안에 넣었다. 담백하고 지나치게 달지 않은 크림이 입술부터 잇몸까지, 희디희게 듬뿍 닿아온다. 보들보들하고 안온한 크림의 뒤에 따라오는 것은 폭신한 케이크 시트의 촉감이다.
“박살난 빵조각이 크림 사이에 골고루 섞인 것보다 이게 더 정통적인 케이크 맛이야.”
한 번 강환 때문에 산산조각 났던 케이크보다 제대로 케이크의 형태를 하고 있는 편이 더 맛있다. 크림과 시트가 어우러져 씹는 질감 역시 살아있다. 크림과 상큼한 딸기 조각을 입안에서 씹어뭉개며 진혁이 중얼거렸다.
“크림과 빵가루를 섞으면 맛있을 줄 알았는데, 7개쯤 먹으면 질리나. 역시 제대로 된 쪽이 더 먹을만해.”
다음부터는 강환보다는 탄지공 쪽을 써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직 큰이모를 포기하지 않았다.
“큰이모가 양말을 사다 주셨지.”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조카다. 진혁의 아버지가 아들놈이 조리화를 신을 때마다 발이 아프다고 불평한다고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셨는지, 두꺼운 겨울 양말을 스무 켤레나 사오셨다. ‘빚’을 진 것이다. 그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빚을 갚을 생각이었다.
‘신체의 일부에서 뻗어 나오는 게 아니라 허공에서 강기를 생성하는 방법을 익히지 않으면 이건 할 수 없지.’
◈ ◈ ◈
프랑스, 파리의 한 원룸에서는 강마리오가 어머니와 화상 통화 중이었다. 파리와 로스앤젤레스의 시차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밖에 통화를 하지 못한다. 벌써 몇 주째 어머니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마리오 역시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엄마, 나는 형이 나온 방송에는 관심 없다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어 방송하는 거라면 모를까.”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네 방송 그만 둔지 한참 됐잖니. 형 방송을 보고 응원을 해 줘!”
“새벽 4시 30분부터 나가서 빵을 만드는데 언제 형이 나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앉아 있으라는 거야.”
어머니는 약속된 승리의 검을 꺼내들어 위협했다.
“오늘까지 안 보면 너, 이번 달 용돈은 없다.”
“엄마아아아아!”
마리오가 비명을 질렀다.
“방송으로 번 돈도 많은 놈이 엄살은.”
“미국 주식에 투자했더니 폭삭 망해 버렸단 말이야…….”
그가 투덜거리며 수락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되는데?”
“너, 그동안 엄마가 보내준 이메일 하나도 안 봤니?! 지금 방송이 시작할 테니까 빨리 틀어서 보라고! 스트리밍 링크 하나 클릭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지금 보면 되잖아. 보면!”
전화를 끊고 강마리오는 노트북을 켜서 이메일을 확인했다. 어머니는 매회, 미리 최신화의 링크를 꼬박꼬박 메일로 보내오고 있었다.
“내일도 새벽에 나가려면 지금은 자야 한다고. 엄마한테는 형이 텔레비전에 나온 건 중요해도 내가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건 중요하지 않은 거야.”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형만 차별하는 것 같다. 강마리오는 투덜거리며 최신화를 다운로드받기 시작했다.
“오프닝만 대충 보고 다 봤다고 해야지.”
하지만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하고 거기에 나온 한 인물을 보고서 강마리오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일 멋지게 케이크를 만들어주신 분은…….”>
텔레비전 속의 이희주 사회자가 우렁차게 외쳤다.
<“임진혁 쉐프입니다!”>
◈ ◈ ◈
한국, 소망시에서는 임진혁과 가족들이 다같이 모여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진혁아, 축하해!”
진희가 화면을 바라보며 손뼉을 쳤다. 어머니 역시 기쁜 기색이었다.
“이제 두 라운드째 우승이지?!”
어머니와 진희가 흥분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과묵하게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던 아버지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학교 애들이 네가 유력한 우승 후보라고 하더라.”
“감사합니다.”
사흘 전, 이모들과 부모님이 다녀온 이후 진희는 부루퉁해졌다. 일봉에게 따로 제빵을 배우고 있는 그녀는 연습할 것이 있다며 굳이 소망시에 남았다. 고양이 진호를 챙겨줄 겸 해서 남았던 것이었는데, 정작 고양이는 몰래 숨어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이번에 먹어본 레드 셔츠 케이크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세 이모가 떠들며 약을 올리기까지 했다.
진희는 크게 실망하고 풀이 죽어 같이 갈 걸 하고 후회했다. 그런 진희를 본 어머니가 진혁에게 혹시 이번 방송은 같이 볼 수 있는지 물었고, 그렇게 해서 온가족이 같이 모여서 방송을 보게 되었다.
이는 유키코 쉐프가 H & J 베이커리 앤 카페의 주방을 맡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화면 속에서 심사위원들이 유쾌하게 떠들었다.
“각자 멋진 케이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잡한 주제지만 유쾌하게 진행해 주셨죠.”
“레시피 그대로 재현해냈죠. 이건 케이크의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더 놀라운 점은, 루이스 강 쉐프의 지시를 완벽하게 이행하면서도, 강 쉐프가 의도한 것보다 더 맛있게 만들었다는 점이죠.”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임진혁이 만든 케이크를 맛보며 그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이어 말했다.
“루이스 강 쉐프가 지시하면서 빠뜨린 부분이 있어요. 그는 케이크 중간에 쌓을 초콜릿 판의 두께를 6mm 정도로 굵게 잡았지만 그 두께를 불러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초콜릿 판을 여러 종류로 만든 임진혁 쉐프는 그 중 가장 잘 어울리는 두께로, 4mm를 만들고 그걸로 케이크를 만들었습니다.”
“원래 강 쉐프가 의도한 6mm 두께로 했다면 초콜릿의 맛이 지나치게 진했을 겁니다. 지금 이 정도 맛이 딱 정당해요. 과하지 않은 단맛이 크림과 함께 어우러지고 뒷맛은 상큼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