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1화
진혁이의 미친 듯한 제빵 실력과 성실한 모습, 잘생긴 외모에 대해서는 본디 저런 놈이라 생각하고 부러워하지 않았다. 건강히 살아 계셔서 진혁을 유독 아끼는 부모님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삼촌뻘 되는 이모들과 이모부들이 세 쌍이나 진혁을 자식처럼 대하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
장려하고 화려한 클래식 음악이 전조처럼 흐르고, 디저트 서바이벌 쇼의 3라운드 방송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클로즈업된 것은 진혁이 아닌 유키코 김 쉐프의 얼굴이었다. 진혁은 천천히 밑 준비를 하면서 화면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 역시 처음 보는 유키코의 대국민 인터뷰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시는 대로 저에게는 아이가 있어요.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들입니다. 아이에게 아빠를 되찾아주고 싶어서,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디에 있기에 되찾아준다고 하시는 건가요?”
이희주는 질문을 서두르지 않았다. 느긋하고 편안하게, 유키코가 떨지 않도록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유키코가 설핏 웃었다.
“아이 아버지는 박재민이라는 사람입니다. 도쿄제과학교에 유학을 와서 저와 만났고,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한국에 귀국한 후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던 이모님들이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박재민을 찾고 있으며, TV에 출연해 얼굴이 널리 알려지면 재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순간에는 다 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미 다음 화의 전개를 미리 알고 있는 진혁은 생각했다.
‘재민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다음 방송분에 나오겠군. 일부러 간격을 둔 건가?’
큰 이모가 화를 내며 자기 허벅지를 철썩 하고 내리쳤다.
“저런, 저런 몹쓸 놈이 있나. 아주 주리를 틀어버릴 놈이여.”
“아니여, 저런 놈은 똥지게를 어깨에 메고 밭까지 거름을 365일 날라야 할 놈이지!”
평소 밭을 관리하느라 거름을 나르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큰 이모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보, 거름을 나르는 게 어디가 어때서.”
“당근 천 개를 껍질 벗겨 깍둑썰기 시켜야 할 놈!”
매일같이 빵을 썰고 요리 재료를 준비하는 임운정이 끼어들었다.
“큰처형, 당근은 죄가 없어요……. 베타카로틴도 많고 건강에 좋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커험!”
둘째 이모와 셋째 이모 역시 혀를 찼다.
“순진한 아가씨가 먼 땅에 와서 고생이 많누, 그래.”
“여자는 남자 잘못 만나면 고생이야.”
“우리 진효도 운정이를 만나서 고생 좀 했지?”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데.”
“그래. 요즘은 행복하게 살지. 그런데 전에도 행복했냐고 하면 그건 아니잖아. 너 손 험해진 것 좀 봐라.”
둘째 이모와 셋째 이모가 악의 없이 빠르게 쏘아붙이는 말에 임운정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장사 안 되는 동네 빵집 고집하지 말고 내려와서 같이 농사를 짓자는 말을 몇 번이나 거절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장사도 잘되는 시점에 옛날이야기를 꺼내면 민망하고 괴로웠다. 자신이 능력이 부족해 아내가 십여 년간 파출부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감정 변화를 눈치 챈 임진혁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이모님들, 조금 있으면 저 나옵니다.”
“와! 진혁이네!”
“참말로 테레비에 나온 것보다 실물이 더 좋아 보이니 신기하구먼.”
“우리 진혁이 인물은 어디 내놔도 안 빠지지! 역시 날 닮아서 그래.”
‘둘째 이모를 닮은 건 아니고 환골탈태해서 그렇지만요…….’
화면 속의 진혁이 붉은색 색소를 섞은 반죽을 구울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
“진혁이가 만든 옷이 뭔지 아시우?”
“글쎄. 빨간 색소를 뽑아놓은 걸 보면…… 내 구두가 아닐까? 진혁이랑 진희가 돈을 모아서 선물한 은강 제화의 양가죽 구두인데, 진혁이도 아주 예쁘다고 했거든.”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발을 보여주었다. 오늘도 신고 온 제일 아끼는 구두였다. 세 자매가 나란히 얼굴을 모아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새것 같네.”
“어찌나 관리를 잘 했으문.”
“우리 애들은 이런 거 하나 안 사주고 뭐 해?”
‘이런 식이구나.’
이제 셋째 이모의 큰딸은 갑자기 왜 너는 구두 하나 안 사주니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진혁은 사촌누나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하지만 웃음은 곧 멈추었다. 진혁이 반팔 티셔츠 모양으로 케이크 시트를 잘라내고 그 위에 설탕 시럽을 바르는 동안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전에 진혁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어 진혁이 잠옷 대용으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본 적이 있는 백진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 티셔츠냐?”
◈ ◈ ◈
‘진영이 형도 저번에 방송을 안 봤나?’
그러고 보니 바빠서 못 봤다고, 이번에 같이 볼 거라고 얘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놀라지 않은 것은 김가영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 놀라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는 방금 언급된 티셔츠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장은효가 아들에게 완곡하게 물어보았다.
“지금 그 티셔츠 위에 붉은색으로 아이싱을 할 셈이니?”
바로 옆에 섞어놓은 색깔은 빨간색과 노란색, 그리고 검은색이었다. 어머니는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이나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전국민 앞에서 하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티셔츠를 만들려는 생각은 아닐 거라 믿었다.
‘설마.’
아버지가 진혁에게 열렬하게 눈짓을 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라, 아들아. 니 엄마 쓰러질라.’
눈치 없는 아들 녀석은 엄마가 촌스러운 걸 좋아해서 이 옷을 사왔다고 오해한 것 같았다. 그저 당시 집안엔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옷 한 벌 사기 어려워 쩔쩔매던 나날이 계속되던 즈음, 큰 언니 장은숙이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창이 시다로 일하는 공장을 하나 소개해 주었다.
“상표를 거꾸로 붙였다거나 미싱 질이 예쁘지 않게 박혔다거나, 그런 옷이야. 두 상자에 이만 원인데, 살래?”
입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질 좋은 옷들이라고 했다. 폐기 처분할 옷을 저렴하게 파는 것이었다. 대신 종류만 고를 수 없다고 했다.
외출복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이 있을까 기대를 하며 박스를 뜯어 본 장은효는 경악했다. 상자 안에는 붉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절대로 외출용으로 입을 수 없는 남성용 붉은 티셔츠가 가득했는데, 울지도 웃지도 못했더랬다. 큰 언니한테 속상하다고 하소연했더니 뭐가 문제냐며, 자기는 그 옷을 잘 입는다고 대답했다.
반품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것들을 일부러 골라 사온 척 잠옷으로나 입으라고 아들과 남편에게 주었다. 당시에는 촌스럽다며 질색하며 입기 싫어하던 아들놈이었다. 엄마는 왜 이딴 걸 좋아하느냐며 엄마의 패션 센스에 짜증을 내던 아들은, 언제부턴가 그 티셔츠를 자연스럽게 잠옷 대용으로 입기 시작했다. 군대를 갔다 온 이후에는 지나치게 성숙해진 나머지 그 옷을 입고 외출을 하려고 하다가, 진희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은효에게 있어 그 옷은 가난과, 자신의 실수와, 금액에 맞지 않는 헛된 욕심에 대한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혁은 어머니가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어머니가 선물해주신 옷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셨구나.’
“아마도 생각하시는 그 옷이 맞을 겁니다.”
“역시 진혁이는 뭘 좀 알아.”
큰 이모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가 두 겹 스웨터를 훌렁 들어올렸다.
“봐, 나는 지금도 입고 있다고. 이게 부드러워서 까끌까끌한 걸 막아준단 말이야.”
둘째 이모가 기겁을 하며 큰 이모의 스웨터를 내려 붉은 티셔츠를 가려주었다.
“언니! 남들 다 있는데 그렇게 옷을 벗으면 어떡해!”
“내 나이가 내년이면 칠십인데 옷 좀 벗으면 어때서?”
“여기가 집 안도 아닌데! 백진영 사장님하고 직원들도 있고, 그리고 핏덩이 같은 조카한테 왜 삼층 뱃살을 보여 주냐고.”
둘째 이모가 소리 죽여 따졌다.
“언니는 정말 품위가 없다니깐!”
“뭐어? 내가 품위가 없어?!”
두 언니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장은효는 입을 다물었다. 진혁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물었다.
“어머니?”
“아니다.”
진혁이 설핏 웃었다.
“거의 다됐습니다.”
눈치 없이 떠들어대는 장은숙과 달리, 둘째와 셋째 언니들은 조용해졌다. 장은효 역시 입을 다물었는데 임운정은 그런 아내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임씨 가족들의 침묵에도 상관없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빠르게 진행됐다. 화면 속에서 임진혁의 레드 데빌 셔츠 케이크가 완성되었고, 심사위원들이 시식을 진행했다. 후보로 올라온 케이크 중, 맛을 칭찬받으면서도 진혁은 케이크의 겉모양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혹평을 받았다.
<“……어머니께서 남자 티셔츠를 박스 단위로 아주 싸게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분해서 옷을 사 오셨어요. 아버지 사이즈와 제 사이즈로 두 박스를 사 오신 건데, 박스를 열어보니 온통 붉은 악마 티셔츠인 겁니다. 가족 모두가 크게 웃었죠. 집에 그 티셔츠만 백 벌이 넘었는데…….”>
화면 속의 임진혁이 먼 곳을 바라보는 동안, 실제 임진혁은 어머니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머니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허탈하게 진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지 진혁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일부 걸레로 쓰기도 했지만…… 저희 가족들에게는 즐거운 추억 중 하나입니다.”>
텔레비전 속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진혁이 씩 웃었다. 처음으로 벌꿀을 맛본 아기 곰처럼 기뻐 보이는 미소였다.
장은효는 그 얼굴을 보면서 입을 벌렸다.
“아…….”
아들이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저는 그 티셔츠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납니다.”>
그녀의 아들은 원래 평범한 애였다.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며, 엄마가 직접 만든 두부가 맛없다고 사다 먹자고 하는 녀석이었다. 문제집을 사야 한다고 만원을 받아 가면 중고로 오천 원짜리를 산 다음에 오천 원으로는 오락실이나 PC방에 가는 애였다. 동갑내기인 진희와 비교하면 한참이나 어린 애였다. 남자애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고, 자신이 잘못 키워서 그런 건 아닌가 하고 걱정도 했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세상 무엇보다도 존경하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아들은 변해버렸다. 주말마다 아버지의 빵집에 따라가서 빵 만드는 걸 구경하고 싶어 하던 국민학생 아들에서, 학교 수업이 파하자마자 PC방으로 도망가는 중학생 아들로 커버렸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정신을 차렸는지 제과제빵을 공부하겠다며 향인대학교를 목표로 했을 때에는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아들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의 학생이나 교수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불평했고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을 했다. 그러다가 입영통지서를 받고 군대에 간 아들은 놀랍게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