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0화
H & J 베이커리 앤 카페는 분주했다.
“의자 세팅은 전부 끝났어?”
“텔레비전 각도 조절까지 다 마쳤지.”
“접시는?”
“이쪽에 따로 꺼내놨어요!”
“좋아.”
김가영이 하는 질문에 창덕과 예은이 빠르게 대답했다. 출근한 지 이제 이틀, 홀 세팅에는 참여해본 적이 없는 김은동이 멋쩍게 서 있다가 물었다.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은동 씨는 쉐프 견습으로 오셨으니까요. 홀은 저희한테 맡겨 주세요.”
‘뭔가 돕고 싶은데.’
쩔쩔매는 은동을 구석 의자에 앉혀 두고서 김가영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백진영이 음료를 준비하며 말했다.
“베이킹 쇼는 힘들어서 다시 못하겠다고 하더니, 자청해서 힘든 일을 하느라 고생하네. 항상 고마워.”
“이번에는 정식 베이킹 쇼도 아니고. 임진혁 쉐프님 축하하려고 가족들이 모여서 재방송 보는 자리잖아요.”
김가영이 씩 웃었다.
“저도 오픈 멤버인데 이런 날 빠질 수는 없죠. 새로 오신 은동 씨에 막내까지 다 나온다는데 제가 빠지면 어떡해요.”
“스무 명이 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오늘 대회에 나온 케이크, 만들어서 그 자리에서 시식회 할 거잖아요.”
가영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백진영이 그것으로 마음속 깊이 납득해버렸다.
“맞다, 가영 씨 케이크 좋아하지…….”
케이크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빵도 좋아한다. 처음 먹어본 맛 깊은 빵에 감동해서 인생 진로를 바꿔버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케이크 먹으려고 일부러 나온다고 한 거구나.”
백진영은 마음속 한쪽 깊숙이 있던 미안함을 조금 덜었다. 추가 수당을 준다고는 했지만 쉬는 날에 자발적으로 나와서 일한다고 했을 때 신경이 쓰였는데, 나름 저런 속셈을 갖고 있었다니 다행이었다. 오히려 못 나오게 했으면 변장이라도 해서 숨어들어왔을 기세였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핫핫핫! 아무리 맛 깊은 케이크라도 제 휴일을 포기할 순 없죠. 그냥 제가 봉사하는 마음으로 백 사장님과 임 쉐프님을 위해서 이 한 몸…….”
김가영이 과장되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핫! 핫! 핫!”
옆에서 막내 예은이가 괜히 본인이 부끄러운지 가영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언니…….”
“그런데 가영 씨는 왜 빵이 맛있다고 하지 않고 깊다고 해?”
백진영이 마침 생각나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가영이 재깍 대답했다.
“맛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물처럼 깊고! 바다처럼 넓게 맛있다! 는 그런 느낌이에요. 맛 깊다, 좋죠?”
“어, 음. 그래.”
분명히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세대 차를 진하게 느낀 백진영이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때 조금 후 선보일 베이킹 쇼 재료 준비를 마친 진혁이 나오며 말했다.
“맛 깊다에 그런 뜻이 있었나.”
백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쟤가 만들어낸 신조어지.”
“아.”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고 핸드폰을 갖고는 있어도 잘 들여다보지 않았으며, 주로 보는 것은 제빵과 제과에 대한 책이었다.
‘TV 쇼에 출연하기까지 하면서, 나라면 그 쇼 반응이라도 보려고 핸드폰을 자주 들여다볼 것 같은데 얘는 묘하게 세상사에 초월한 데가 있단 말이지.’
백진영이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지난 주 촬영은 어땠어? 이번 주제는 뭐야?”
“계약서.”
“어차피 말 안 할 걸 아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라고.”
“음.”
그뿐만이 아니라 계약은 철저하게 지키고, 시행하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를 않았다. 또 가족을 끔찍하게 아꼈다.
‘너무 순진해서 어디 가서 사기당할까 걱정이라니까. 아버지 건강에 좋다면서 홍삼 즙 같은 걸 들이밀면 강매당할 것 같은 녀석이라, 내가 챙겨 줘야 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임진혁을 신경 써 주고 있는 백진영이었다. 지난주에 가족들을 초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게 아닌가 하고, 진혁의 가족들을 우선으로 초빙해 베이킹 쇼를 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다. 진혁은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저번에 깜짝 놀랄만한 걸 준비하고 있다며. 그게 이건가?”
백진영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6개월 정도는 더 있어야 돼.”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쯤이면 촬영은 다 끝나겠군.”
“분명히 네가 좋아할 거야.”
“…… 흠.”
‘대체 뭘 생각하는 거지?’
백진영의 심장은 천천히, 안정적으로 뛰고 있다. 그게 무엇이든 진혁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것이었다. 백진영이 시계를 보았다.
“이제 진혁이네 가족 분들 오실 시간인가?”
“형네 가족들은 부르지 않아도 돼?”
“삼촌은 오고 싶어 하셨는데 일이 있으시고, 사촌 누나나 형, 숙모님은 바쁘시니까.”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형, 친구가 없구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소박한 위로에 백진영이 기함했다.
“뭐야, 나 친구 많아! 요즘은 클로즈 베타 게임을 시작해서 매일 퇴근하고 길드에서 다 같이 용 잡으러 레이드도 간다고.”
“그래, 그래.”
그래 봤자 컴퓨터 모니터 속의 친구 아니냐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안쓰러운 기색으로 쳐다보는 진혁을 보며 백진영이 입을 뻥긋거렸다.
‘친구가 없는 건 너잖아!’
함께 일하기 시작한 몇 달 내내 친구 만나러 간다고 나가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백진영은 차마 그 말까지 꺼내지는 못하고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진혁이 웃었다.
“오셨군.”
똑, 똑.
‘Closed’ 팻말이 걸려 있는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번 봐도 신기했다. 아직 노크 소리도 나기 전인데 진혁은 멀리서 나는 인기척을 느끼는 것처럼 사람이 도착한 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여기가 진혁이가 일하는 곳이야?”
“큰 이모님, 어서 오세요.”
“멀리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둘째 이모님, 셋째 이모님, 그리고 이모부님들. 서울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도요.”
김가영이 앞에서 웃으며 함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키 작고 통통한 큰 이모보다 둘째 이모가 조금 더 키가 컸고, 셋째 이모는 두 언니보다 좀 더 키가 컸다. 그리고 막내인 어머니가 제일 컸다. 이모부들은 부인하고 똑같은 키였다.
‘외가 쪽 이모님들이라더니 다 닮았네.’
짜리몽땅한 가족들 사이에서 유난히 진혁의 부모님만 군계일학처럼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진혁이 가족들을 맞이해 직접 앉도록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진혁이 어머니가 끌고 있던 캐리어를 넘겨받았다. 바퀴가 달린 여행가방 손잡이를 잡은 진혁이 낯익은 기척을 느끼고 인상을 썼다.
“어머니?”
“응?”
“진호는 환희가 봐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 맞는데?”
해말간 미소를 짓는 모친을 보며 진혁이 말끝을 흐렸다. 그가 직접 환골탈태시킨 기운이라 착각할 리가 없었다.
“가방 안을 보세요.”
진혁이 가방을 활짝 열어젖히자, 그 안에서 낯익은 털뭉치가 머리를 내밀었다.
“야옹.”
“어머나!”
장은효가 기겁을 하며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진호야! 언제 들어온 거야?! 그러다가 너 숨 막혀서 죽을 수도 있어!”
“여보, 여기는 진영 군하고 진혁이가 영업하는 곳인데…….”
이곳은 명백한 음식점이고, 동물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었다. 어머니가 당황하며 고양이를 안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얘가 여길 언제 들어갔담. 미안해.”
큰이모, 장은숙이 입을 벌리고서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막내 여동생을 야단쳤다.
“고양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여기까지 데려오면 어떻게 하니?”
“언니! 내가 데려온 게 아니야. 얘가 알아서 따라왔어.”
“엄청 귀여운 고양이네요.”
김가영이 관심을 보였다. 그녀가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백진영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저희들밖에 없으니까…… 이 담요로 싸서 안고 계시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녀가 담요를 내밀며 말했다. 김가영이 제안한 절충안에 백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외부 손님은 하나도 없는, 비공식적인 행사였다.
백정흠 삼촌이 있었다면 안 된다고 펄펄 날뛰었을 테지만 지금 여기에는 삼촌도 없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을 것 같네요. 얘가 그, 어머니 말이라면 꼼짝 않고 듣는다던 고양이 맞지요?”
“진혁이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어머니 말은 잘 따른다고 당당하게 얘기하더라고요.”
아무리 사람을 잘 따르는 고양이라도 인간이 아닌 짐승이었다. 오래 키우면 마음이 통한다지만 인간과 말이 통할 리도 없고 어머니 말만 골라 따를 리도 없었다. 잠시 시설에 맡겨져 있던 동안 배은망덕한 토끼를 돌본 적이 있던 백진영은 임진혁이 동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은근히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풀을 갖다 주고 똥을 치워줘도 백진영을 못 알아보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토끼가 있었다. 하지만 그 토끼와 이 고양이는 달랐다. 그가 신기해하며 말했다.
“정말로 어머니 말은 잘 듣네요.”
“얘가 만일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나는 밖으로 나가서 얘랑 같이 있을게.”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머니도 같이 보셔야죠.”
결국 딸기 무늬 담요로 꽁꽁 감싸인 진호는 장은효의 품에 안겨 베이킹 쇼를 함께 보게 되었다. 진혁은 고양이에게 전음을 보냈다.
‘너 이 자식, 나중에 집에 가서 두고 봐라. 누가 엄마 몰래 따라오래?’
“야아오옹.”
고양이가 애처롭게 울었다. 진혁이 진호의 울음소리를 무시하고 어머니와 외가 쪽 친척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방송은 보셨을 테고, 그냥 케이크 만드는 것만 같이 보려고 오신 거잖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모들과 어머니, 아버지가 얼굴을 마주보았다.
“일부러 안 봤는데?”
“예?”
“오늘 너랑 같이 보는 거 알고 있으니까 일부러 안 봤지.”
큰 이모가 말하고 어머니와 둘째 이모, 셋째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역시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백진영이 물었다.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 들은 것도 없으십니까?”
“뭐, 얘기 들을 것이 따로 있나?”
“아니요.”
백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요즘 시청률이 꽤 높아졌다고 하니까, 다른 분들이 내용을 이야기해주시지 않았을까 해서요.”
“아, 얘기하려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는데. 미리 내용 말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아주 잘 시켰지.”
임운정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래서 오늘 아들의 멋진 솜씨에 놀랄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럼, 그럼. 우리 조카 실력이야 어딜 가서도 알아주고말고.”
“진혁이가 만든 케이크가 아주 맛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아버지와 두 이모가 이야기하는 말에, 큰이모와 어머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진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이모님들.”
곧 장려하고 화려한 클래식 음악이 전조처럼 흐르고, 디저트 서바이벌 쇼의 3라운드 방송이 시작되었다.
방송과 동시에 진행되는 것은 가족들만을 위해 진행되는 특별한 베이킹 쇼였다. 미리 준비한 재료들을 조리대에 준비해놓은 진혁은 오픈 키친에 서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아휴, 우리 진혁이 나를 닮아서 이렇게 잘 생겼지.”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것을 기다리면서도 세 이모들은 아무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음료를 쪽쪽 빨면서도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큰언니를 닮기는!”
“큰언니! 은효가 여기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소릴 할 수가 있어.”
은영과 은혜가 한목소리로 큰언니를 나무랐다. 장은효는 아웅다웅하는 언니들 사이에 끼지 않고 고양이를 꼬옥 안고서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광경이 평화로워 보여 백진영은 혼자 킥킥 웃었다.
‘확실히 피는 못 속여. 네 자매 모두 똑 닮으셨네. 진혁이네 어머님이 유달리 미인이시긴 한데, 다 같은 가족이라는 게 한눈에 들어와.’
옛 사진을 보면 백정흠의 동생,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진영의 아버지 역시 백정흠 삼촌을 똑 닮았다. 진영은 삼촌을 아버지처럼 대하며 자랐지만 다른 친구들은 삼촌과 그렇게까지 가깝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모와 이모부들, 삼촌뻘 되는 친척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자 보기 좋았다.
‘우리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이렇게 지내셨겠지.’
조금, 아주 조금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