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8화
이휘주가 크게 외쳤다.
“4라운드의 팀전 대결이 끝났습니다!”
“테이블에서 손을 떼세요!”
브라이언 신과 리처드 베이커, 임진혁을 비롯한 출연자들이 손을 떼고서 뒤로 물러났다.
커튼을 젖힌 쉐프들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완성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유키코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이건 완전히 틀렸어.’
다섯 살짜리 아들도 이걸 봉래산의 옥 가지라고 설명하면 웃을 것이다. 단순히 부쉬 드 노엘에 진주처럼 생긴 구슬을 올려놓았을 뿐이다.
‘두드러기가 난 통나무 같잖아.’
좌절한 유키코가 덜덜 손을 떨고 있는 동안 다른 쉐프들 역시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용태는 눈앞에 있는 투명 구두 슈가 아트를 보고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다시 벌렸다.
“투, 투명 구두라니.”
그는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고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한편 루이스 강은 눈을 깜빡이며 임진혁이 만든 케이크를 관찰했다.
‘뭐야, 이건 대체 뭐냐고. 일곱 명의 난쟁이가 아니라 일곱 명의 노움(Gnome), 아니 고블린(Goblin) 같잖아. 쓸데없이 너무 정교해.’
노움도 고블린도 전부 유명한 환상소설에 등장하는 키 작은 생명체들이다. 전자는 땅의 요정으로 못생긴 얼굴에 키가 작고 근육질이며, 후자는 키 작고 머리카락이 없으며 녹색 피부를 가진 종족이다.
‘난쟁이가 너무 디테일해서 전혀 사과에 시선이 가지 않아. 이건…… 그냥 사과와 흉측한 난쟁이들이다.’
루이스 강은 임진혁이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재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개중에 멀쩡하게 생긴 난쟁이가 하나 있네.’
다들 개성 있게 못생겼다. 어떤 난쟁이는 덩치가 크고 흉악하고, 어떤 난쟁이는 비열하게 생겼고, 놈들 사이에서 정의롭고 당당해 보이는 녀석이 한 명 있다. 캐릭터가 너무나 살아있어서 사과에 시선이 가지 않을 정도다.
“이건 차라리 에덴동산의 사과를 지키는 묵시록의 기사 4명과 아담과 아벨, 카인 아닌가?”
루이스 강이 불평하자, 옆에 가까이 다가온 이희주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에덴동산에 묵시록의 사도가 왜 나오는데요?!”
“타임머신을 타고 아담이 사고 치기 전으로 돌아온 거지.”
이희주가 짚어주었다.
“아담이 사고 치기 전이면 아벨과 카인이 거기에 있을 리가 없고요.”
“…… 그러네요.”
루이스 강이 중얼거렸다.
기독교 성경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사과를 먹고 쫓겨난 후에야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을 낳게 된다. 시간상으로 맞지 않는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4기사가 못생겼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습니다만.”
“진짜 임 쉐프의 상상력은…… 자기만의 스타일이 확실히 있단 말이지.”
루이스 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임진혁은 침묵했다. 자신이 만든 초콜릿 인형들이 루이스 강의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할 말이 없다.
“…….”
‘저놈들이 좀 흉신악살처럼 생기긴 했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백수십 년을 함께한 녀석들이다. 개중에는 진혁보다 먼저 죽은 이도 없지 않다. 세밀하게 빚어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정말로 그 녀석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금은 초콜릿으로 만들어져 굳어있는 저 얼굴들은 한때는 그의 곁에서 웃고 떠들고 울고 화냈었다.
‘말도 잘 듣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혼인하라고 잔소리를 하던 놈. 아버지를 죽이고 절망에 빠져 검을 휘두르던 놈. 성질이 급해서 항상 말보다 먼저 칼을 휘두르던 놈…….
‘순진한 데가 있어서 내가 지켜 줘야 했던 녀석들이지.’
진혁은 멍하니 서 있었다. 일곱 명의 키 작은 초콜릿 난쟁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자식들을 보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어디서 왔는지 잊고 싶지 않은 거지.’
현재로 돌아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이제 봄이 오고 있다.
처음에는 평생 동안 아버지의 곁에서 일을 도우면서 살겠다고 결심했다. 좁고 불편한 가게가 아늑하게만 느껴졌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했지만 다른 주방에서 타인의 수하(手下)로 일할 자신이 없었기도 했다. 주방에는 군대와도 유사한 군기가 있고 선후배 관계와 상명하복이 철저하다. 그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아래에서 지시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을 때 그것이 어리석은 지시라고 생각되면 화가 나서 상대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까 봐 신경 쓰였다.
사람 한둘 죽어도 적당히 묻어버릴 수는 있지만 취업한 곳에서 상급자가 하나둘씩 죽어 나가면 번거로워진다.
현대에서 취업해 일하는 이들은 대개 혼자가 아니다. 당장 매일매일 출근하던 사람이 없어지면 시체를 녹이거나 태워 없애 죽음을 은폐해도 그의 직장 동료와 가족들이 부재(不在)를 눈치챌 것이다. 그래서 진혁은 별다른 미래계획 없이 아버지의 빵집, 소망 베이커리에서 평생 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보다 더 미각이 예민해진 진혁은 점점 더 재료에 까다롭게 굴기 시작했다.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아버지는 좋은 재료를 쓴 프리미엄 빵이 더 맛있다는 것은 인정했으나 여태까지 빵집에 오던 손님들이 원하던 저렴한 빵을 남겨 두길 원했다. 아버지는 전부터 친구가 일하는 호텔 같은 다양한 일자리를 추천했고 진혁은 전부 거절했다. 그러던 차에 들어온 백정흠 사장의 제안은 솔깃한 것이었다.
‘나만의 주방을 갖고서 내 마음에 드는 직원을 고용해서 훈련시켜도 좋다니, 내 연차에는 들어올 수 없는 기적적인 제안이지.’
진혁은 자신의 위치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맛에 조금 예민하고, 솜씨가 조금 좋다고 해서 풍부한 경험을 해오며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온 동년배나 선배들을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진혁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산골 구석에서 갑자기 연자(連者)의 안배를 찾아 내공을 전수받고 천고의 비급을 물려받았다고 해서 무림의 제1인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진혁은 분명 뛰어난 미각과 놀라운 육체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뿐이다. 요리 프로페셔널의 세계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당장 지금 이 쇼에서만도 그렇다.
식욕을 돋우는 붉은색을 이용해 실제의 추억을 재현한 케이크를 먹음직스럽다고 생각해서 자신만만하게 내놓았다가 ‘패션 센스가 좋지 않다’라는 평을 듣기까지 했다.
전에는 자신은 알 만큼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세상은 넓다.
진혁은 자신만의 세계에 잠겨 있다가 이희주가 선언하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라운드 4의 시식 후, 점수 발표가 있겠습니다!”
웅장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심사위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제일 먼저 평가받을 것은 리처드 베이커와 이용태 팀이었다.
리처드가 들고 나온 케이크를 보고서 청중들이 박수를 쳤다.
“예뻐요!”
누군가가 외쳤다. 그 말대로 케이크는 아주 예뻤다.
벨벳 쿠션 위, 조명을 반사해 반짝이는 크리스탈 하이힐.
스트랩 하이힐의 발등에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나비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사뿐히 앉아 있어 시선을 확 끌어당긴다.
원형 케이크는 절묘하게 뒷굽과 앞굽이 놓인 부분이 조금 패여 있어 보드라운 쿠션처럼 보였다. 이희주가 재촉했다.
“이용태 쉐프님, 케이크의 컨셉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죠.”
“초콜릿 케이크로, 붉은 구두라는 동화를 테마로 했습니다.”
이용태가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투명한 구두가 올라간 초콜릿 머랭 케이크를 보고서 바로 실패를 예감했던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가 놀라서 이용태를 바라보았다.
“What, red shoes?! (붉은 구두라고요?!)”
통역사가 통역을 해주기도 전에 이용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레드 슈즈 맞습니다.”
“……!!”
리처드 베이커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기 전에 이희주가 물었다.
“자, 자. 그럼 그 동화는 어떤 내용이고, 그걸 어떻게 케이크로 표현했는지 설명해 주시지요.”
“빨간 구두를 신고 영원히 춤을 추는 저주를 받은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밀가루를 쓰지 않고 초콜릿 케이크를 구워냈고, 죄는 달콤하지만 벌은 영원하다는 이야기를 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신데렐라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끼어들자 이용태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유리구두라고밖에…….”
리처드 베이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심사위원의 시선이 차갑다.
두 남자는 풀이 죽은 채로 자리로 돌아갔다.
이희주가 냉정하게 말했다.
“다음은 유키코 김 쉐프와 브라이언 신 쉐프, 케이크를 가져와 주세요.”
두 사람이 들어가고, 유키코와 브라이언이 앞으로 나섰다.
브라이언은 아까부터 유키코의 눈치를 보며 주눅이 들어 있었다. 유키코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케이크를 들고 있는 손을 떨고 있어, 그녀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선명히 보였다.
“카구야히메, 한국말로는 대나무 공주라는 일본의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했습니다. 봉래산의 옥 가지를 만들었지요. 부쉬 드 노엘과 유사한 초콜릿 파운드 케이크에 복숭아 무스를 곁들여 글레이징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쉬 드 노엘이 가지…… 라면 퍽 굵은 나무겠군요.”
“맞아요. 이건 봉래산의 옥 가지라기보다 텍사스의 통나무 같군요. 도로시의 집이 태풍에 휩쓸리고 남은 통나무에 옥구슬이 굴러떨어진 느낌이랄까.”
스텔라 위스커스는 유명한 소설 이야기를 꺼냈다. 아드레아노 존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오즈의 마법사 같군요. 은 구두까지 있었으면 완벽했겠군.”
“…….”
유키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브라이언 신이 씁쓸하게 말했다.
“저는 크리스마스 캐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예?”
유키코가 어이없어하는데 브라이언이 애써 설명하려고 했다.
“부쉬 드 노엘은 크리스마스고, 거기에 귀한 진주가 올라가 있으니까 스크루지가 반성하는 뜻에서…….”
“…….”
유키코가 어렵게 입을 떼려고 하는 순간 이희주가 말했다.
“두 분은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늦었어.’
그래서 유키코는 자신이 왜 봉래산의 옥 가지를 만들려고 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렸다.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마지막이다. 임진혁과 루이스 강의 차례였다.
루이스 강이 황망한 얼굴로 케이크를 들고 나왔다.
붉은색 사과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다음에 시선을 끄는 것은 새빨간 사과와 대조되도록 선명한 녹색의 평평한 바닥이다.
산뜻한 녹색 스퀘어 케이크 위에는 일곱 명의 개성있는 초콜릿 조각상들이 올라가 있다.
루이스 강이 눈썹을 실룩이며 말했다.
“트리플 초콜릿 케이크로, 동화 백설공주와 일곱 명의 난쟁이를 소재로 했습니다.”
“흥부와 놀부가 아니었다니.”
한국 동화라고 생각해 기다리고 있던 주영모가 탄식을 흘렸다. 루이스 강의 동공이 흔들렸다.
“흥부와 놀부라니요.”
심사위원에게 퉁명스럽게 말해버리고 나서, 루이스 강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주영모가 웃으며 덧붙였다.
“듣고 다시 보니 난쟁이 같기는 하군요.”
“각자 성격이 있달까, 짧은 시간 동안 얼굴만 봐도 성격을 알 수 있게 디자인한 점이 대단합니다. 이 감각이 패션 코디를 할 때도 나와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는데 말이에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시식을 하겠습니다, 세 팀 모두 케이크를 잘라서 나누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