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6화
스태프들이 소근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슈르를 발견한 진호의 눈빛이 번뜩였다.
“야아오오오옹!”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고양이가 팔짝 뛰어올랐다.
“으악!”
자기를 습격하는 줄 알고 놀란 박하연이 비명을 지르며 양팔로 이마를 가렸다.
“어머! 스태프님!”
장은효가 놀라며 앞으로 뛰어나가 고양이를 잡으려고 했으나 늦었다. 그녀는 진호의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 고양이가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들이 서로 어리둥절해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있다!”
임종태가 손가락질을 했다. 진호는 슈르를 입에 물고 유유히 카메라 위에 서 있었다. 고양이는 결코 넓지 않은 발 받침 위에서 10kg은 되어 보일 육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깃털처럼 사뿐 사뿐히 움직였다.
“이 카메라가 얼마짜린데!”
몇천만 원짜리 고가의 카메라 위에 짐승이 올라간 것을 본 책임자, 김산호 PD가 비명을 질렀다. 진호는 김산호 PD를 흘깃 바라보더니 발톱으로 비닐 가운데를 가르고 간식을 입에 물었다.
-챱챱챱챱챱챱
고양이가 액체형 간식을 핥아먹는 동안, 다들 긴장해서 고양이를 주시했다. 장은효가 중얼거렸다.
“저런 간식을 줘 본 적이 없는데 맛있는 건 줄 어떻게 알았지?”
진희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게 고양이들에게 인기 있는 간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참치 맛을 사서 준 적이 있어요…….”
장은효와 임운정이 어이없다는 듯 딸을 바라보았다. 지금 고양이가 먹고 있는 것은 가다랑어포 맛이라고 쓰여 있었다. 진호는 액체를 카메라에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잘 먹었다.
아까 강산호 PD의 비명 소리에 놀라 희망 베이커리 바깥으로 나와 있던 유일봉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저는 아주 가끔만 줬습니다. 고양이들이 좋아한다길래 가다랑어포 맛을 조금…….”
그는 아까 메인 PD의 비명 소리에 놀라서 가게 바깥으로 나왔던 터다. 김산호 PD가 혀를 차며 초조하게 발로 땅을 굴렀다.
“저거, 저거, 저거…… 저놈의 고양이를 옮겨야 합니다. 이 카메라가 망가지면 제 월급을 일 년 치 전부 갖다 바쳐도 모자란다고요! 배상을 할 수가 없어요!”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큰 덩치에 목에는 핏대가 서고 이마에는 힘줄이 튀어나와 있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한 것만 같다. 진희가 진정하라는 듯 김산호 PD에게 흘깃 눈짓을 해보이고서 침착하게 움직였다.
“진호야.”
그녀는 나긋하게 다가가 고양이를 불렀다.
“진호야, 카메라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이리 와.”
간식을 다 먹은 고양이는 앞발을 들어서 핥고서 진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걸까? 보조 카메라를 들고 있던 임종태는 아까 고양이가 문 앞에 있을 때부터 이 광경을 계속해서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이 고양이가 사람 말을 이해하고 따를까?’
진호는 다른 쪽 발을 들어 올려 주욱 뻗었다. 고양이는 태연하게 발바닥을 핥았다.
-할짝
역시 인간의 말을 고양이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까는 그냥 우연이었나 보군.’
임종태는 조금 실망했다. 그때 장은효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진호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체하지 않고 진호가 카메라 위에서 뛰어 내려왔다. 육중한 무게의 고양이가 그 위에서 뛰어내리는데도 카메라는 단 1mm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카메라의 상단부 위에 잠시 남아 있던, 찢겨지고 텅 빈 간식 봉지만이 바람에 날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냐아아아앙.”
진호는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장은효 옆에 서서 빨간 구두에 얼굴을 비볐다. 뺨을 비비는 고양이를 안아 들고서 장은효가 당황해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임운정과 임진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같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카메라가 망가지지 않아 다행이네요.”
김산호 PD는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
“시간이 늦어졌으니 들어가서 촬영부터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고양이는 굳이 같이 촬영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네!”
주방이나 음식을 취급하는 공간에서 촬영하는 것을 꺼려하는 임운정과 장은효를 고려하여 주방 옆에 딸린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반사판과 카메라를 포함한 기자재를 전부 설치하고 난 후에 정식으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 자연스럽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게 잘 안 되네요.”
임운정과 장은효는 카메라 앞에서 로봇처럼 어색하게 굴었다.
비교적 행동이 자연스러운 진희가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고 해도, 셋이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말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았다.
“고양이가 장은효 여사님을 꽤 따르던데, 같이 인터뷰를 하면 어떨까요?”
임종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김산호가 염라대왕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임종태를 노려보았다.
‘카메라 박살 날 뻔한 거 못 봤냐?’
‘보니까 저 여사님 말은 잘 듣던데요. 이제는 카메라 근처에도 안 오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임 씨 가족에게는 들리지 않게 속닥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최근 청력이 좋아진 세 명은 대화 내용이 아주 잘 들렸으나 예의상 모르는 척해 주었다.
임종태가 마지막으로 덧붙여 말했다.
“아까 안고 계실 때 표정이 훨씬 자연스러워지셨으니까요.”
뷰파인더로 아까 찍은 화면을 보여주자 김산호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두 분 괜찮으시겠습니까?”
진호와 함께 촬영하게 되자, 두 부부는 카메라 앞에서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우리 애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하는 애였죠.”
“엄마, 인간적으로 그건 아니다.”
“그렇지만 군대 갔다오고 나서는 더 열심히 하는 애가 됐어요. 이제는 애도 아니지만.”
“그건 나도 동의하지.”
“야오오옹.”
가족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장면까지 빈틈없이 촬영했다. 인터뷰 촬영은 원래 예정했던 2시간보다 조금 더, 세 시간이 넘어서야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야아오오오오옹.”
장은효와 임운정 부부와 딸 임진희도 나와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가족들이 인사를 마치고 들어갔는데도, 무거운 장비를 밴에 싣는 동안 고양이는 배웅하는 것처럼 문가에 서 있었다. 박하연은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있어, 야옹아!”
돌아가는 길에는 이미 어스름하던 해가 완전히 져서 깜깜했다. 어두운 도로 위에서 전조등을 켜고 달리던 촬영용 밴 속에서 박하연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아.”
임종태가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피곤해?”
“오늘 늦게 들어가는데, 빈손으로 들어가면 돌괭이가 화낼 것 같아서요…….”
“거, 고양이 엄청 챙기네.”
김산호 PD가 한소리 했다. 박하연이 입을 다물었다. 하늘 같은 메인 PD에게 막내가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 그 고양이 진짜 똑똑하더라. 원래 고양이가 개보다 똑똑하다더니.”
‘우리 집 돌괭이는 멍청하고 귀여운데…….’
아까 보았던 덩치 큰 삼색 고양이를 생각하며 박하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고양이는 얼굴이 아주 크니까 고양이 세계에서는 아주 미묘(美猫)일 텐데.’
수컷 고양이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다량 분비될수록 얼굴이 커진다.
그래서 대두 즉 머리가 클수록 고양이 세계에서는 미남이라고 한다.
인간의 눈에 그것이 귀여워 보일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암컷 고양이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고양이일 것이다.
‘그 동네 고양이들을 전부 휘어잡고 있겠지. 두목 고양이일 거야.’
“그 고양이 영상 좀 보여줘 봐.”
흔들리는 차 안에서 조그만 뷰파인더를 집중해서 바라보던 김산호 PD가 중얼거렸다.
“이거는 꼭 써야 하는데. 어디에 넣어야 좋은 영상이 되려나.”
“이걸 넣는다고요?”
“원래 시청자들은 아이와 동물을 좋아해.”
“하지만 우리는 동물 다큐멘터리가 아니잖아요, 요리 프로그램이지.”
“임진혁 쉐프하고 임 쉐프 가족들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다들 알게 될 거 아냐?”
“뭐, 이번에 유키코 쉐프를 스카우트해간 건 진짜 놀랐지만요. 젊은 나이에 그러기 쉽지 않은데 대단한 위인이야.”
“이번에 유키코 쉐프가 어떤 사정인지 털어놓으면서, 남편이 그동안 혼수상태에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하면 시청자들이 흐엉엉! 하고 다 같이 눈물바다가 될 거라고. 그때 임진혁 쉐프의 가족들이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다, 그래서 유키코 쉐프에게 기회를 줄 수 있었다, 이렇게 나가는 거야.”
“임진혁 쉐프가 있는 H & J에서 지금 유키코 쉐프가 일하는 걸 굳이 방송에서 밝힐 필요가 있습니까?”
임종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리가 밝히지 않아도 이미 다 알아. 그러니까 거기에 이런 사연이 있다~ 이런 건 풀어 주는 편이 좋아.”
“그건 그렇겠네요.”
“완전히 아침드라마잖아. 매력적인 히로인! 비극적인 스토리! 시청자들이 좋아할 거라고.”
‘김산호 PD님은 능력도 있고 다 좋은데 저런 식으로 시청률만 생각하는 것처럼 말할 때가 거슬린단 말이야.’
박하연은 마음속으로 불평했다. 김산호가 마저 말을 계속했다.
“믿고 기다리기 힘든 상황에서도 고생하면서 기다렸는데, 끝내 그 믿음은 보답을 받은 거잖아. 이번에 성금도 조성해서 같이 건네면 어떨까 하는데. 의식을 잃은 애 아빠를 치료해서 아빠가 아기 얼굴을 보여줄 수 있게 해 주자고.”
“우리는 디저트 쇼를 하는 거지, 휴먼드라마 다큐멘터리를 하는 게 아닌데 성금 조성을 어떻게 합니까. 방향이 완전 다른데.”
임종태가 눈썹을 구기며 말하자 김선호 PD가 씩 웃었다.
“원래 라운드 7에서는 가족들을 초청해서 만나잖아. 이번 인터뷰는 그 전에 미리 찍어 두는 거고.”
“그렇죠.”
“라운드 4에서 각자 인터뷰를 주면서, 캐릭터 메이킹 좀 해서 시청률을 끌어올리려고 하는 거라고 하면 국장님도 이해해주실 거야.”
“거기까진 괜찮은데 병원비 모금은 너무 나갔잖아요. 비현실적이야.”
“그럼 본편 말고 시청자 게시판에서 선동 좀 해 봐. 유키코 쉐프 댁 예비 시부모님은 병원비를 못 대서 집도 팔고 이사 갔다며. 지금 돈이 거의 다 떨어져 가서 당장 병원에서 쫓겨날 위기라는데 어떡하냐고.”
“그 정도야 가능하긴 한데…… 설마 저한테 하라는 거 아니죠?”
“그럼 누가 해? 내가 하랴?”
박하연은 사수와 메인 PD가 티격태격하며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김산호 메인 PD님도 이것저것 생각하고 계셨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음은 따뜻한 분이다. 박하연이 입꼬리를 저절로 올리며 슬쩍 웃었다.
‘우리가 이렇게 지방에 내려왔는데, 본무대 촬영 팀들도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