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34화 (134/656)

제 134화

“하아.”

이용태가 불러주는 두 번째 목록을 들으며 리처드는 놀랐다.

”여성용 구두굽, 발가락을 감싸는 스트랩과 발목 스트랩 몰드. 몰드는 이 세 종류입니다. 그리고 면장갑과 실리콘 매트, 나무 판, 내열 유리컵, 스패튤라, 식용 반짝이, 투명 이소말트(isomalt)…….“

레시피를 듣지 않아도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투명한 구두가 나오는 동화는 단 하나밖에 없다. 흥분한 리처드 베이커는 이용태가 불러주는 마지막 재료를 놓쳤다.

”그리고…… 붉은색 식용 색소.“

나라에 따라 여자의 신분도, 남자의 신분도 다르지만 최근에는 유명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2D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한 것이 제일 유명하다.

못된 계모와 의붓언니들 사이에서 구박받으며 무도회에 가지 못하던 ’재투성이‘, 즉 신데렐라는 요정 대모의 도움을 받아 무도회에 가고 그곳에서 왕자님을 만난다. 하지만 마법이 풀리는 자정 정각이 되어 왕자를 뿌리치고 급하게 그 자리를 떠나게 되는데 이때 구두를 한 짝 남겨놓고 간다. 왕자는 구두를 단서로 신데렐라를 찾는 데 성공하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결혼한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일 수밖에 없어.’

이소말트는 설탕 대용 단맛을 내는 식품의 한 종류다. 천연 비트에서 추출하며, 혈당 증가 지수가 2로 설탕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 당뇨 환자나 저탄수화물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감미료로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소장에서 흡수하지 않아 소화가 불완전한 탓에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좋지 않은 증상을 보일 수 있어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반죽은 설탕 반죽보다 더 말랑말랑하여 유동성이 강해, 설탕 공예에서 투명한 색깔을 표현할 때는 이소말트를 주로 쓰며 광택이나 색깔을 예쁘게 내고 싶으면 설탕을 쓴다.

”이소말트 100그램을 내열 컵에 담고 가열합니다. 식용 반짝이를 뿌려서 목제 꼬챙이로 섞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단조로운 지시를 들으며 그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지는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일일이 불러 주지 않아도 반짝이와 이소말트, 굽이 있다면 뭘 만들지 예상할 수 있다. 반짝이가 들어가서 조명 아래에서 더 빛나는 유리 구두를 만들려는 것이다. 커튼 너머의 이용태도 지금 서 있는 리처드 베이커도 안다. 하지만 리처드는 이 세심한 지시가 짜증이 났다.

‘손이 아니라 머리가 되었어야 한다고. 지금 이 자식이 이소말트를 녹이는 방법은 정석이 아니잖아.’

리처드 베이커는 항상 정통 베이킹을 해 왔다. 그가 주로 하는 것은 제빵보다는 제과 쪽에 가깝다. 호텔의 디저트 메뉴를 맡았다. 조그맣고 예쁜 디저트들을 계절에 맞게 개발하고 수십, 수백 명의 손님에게 서빙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슈가 크래프트를 자주 하지는 않았으나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 제과제빵 학교에 다닐 때 두어 번 실습해 본 경험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텔레비전 카메라가 돌아가는 앞에서 실수할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마 ‘손’ 역할을 맡은 다른 쉐프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붉은 실리콘 몰드는 길쭉한 깔대기를 죽 늘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구둣굽 틀에 녹은 이소말트를 붓고 나서 이소말트에 여유가 있는 것을 본 리처드는 이렇게 굽이 있는 스트랩 샌들로는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꽃과 구슬 모양 틀도 가져와 남은 이소말트를 부었다,

‘아차, 이걸 먼저 해야지.’

납작한 발자국 모양의 실리콘 몰드에 이소말트를 조심스럽게 따른다. 이것은 신발 깔창이 될 것이다.

그것도 의외로 꽤 기분이 괜찮았다. 마치 머랭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니야. 이 기분은 머랭 치기와는 또 달라.’

머랭 치기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기술이었다. 8살 때 또래보다 한참 덩치가 크던 리처드 베이커는 아주 말썽쟁이였다.

그는 축구공을 걷어차 옆집 스텐 할머니 댁 유리창을 깬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호되게 야단치며 스텐 할머니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했다.

꼬마 리처드는 그런 마녀의 집에 가는 건 싫다며 거부하였고, 미시즈 베이커는 아들의 인생 수집품인 야구 카드를 전부 찢어 버리겠다고 화를 내셨다.

평소와는 달리 엄청나게 화내는 어머니에게 기가 죽은 리처드 베이커는 “내 카드를 찢으면 난 죽어 버릴 거야!”라며 마당으로 도망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는 2층의 붉은 박공지붕까지 닿는 가지가 죽 죽 뻗어 있었다.

나무에 올라간 리처드는 지붕에 붙은 창문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었다.

문우드 호텔의 제과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항상 집밖에 있었는데, 그날따라 집에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리처드를 혼내지 않았다.

창문으로 몸을 꺼내, 나뭇가지와 지붕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고 있던 리처드를 안아들어 창문 안으로 끌어들였다.

손바닥에 나뭇가시가 박히고 뺨은 가지에 스쳐 긁힌 채 아들이 울려고 하자, 아버지는 리처드를 꼬옥 안고서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훌륭한 남자들만 할 수 있는 기술을 알려주지.”

아버지는 리처드를 다락방에서 씻겼다. 다친 상처에는 연고를 바르고 계단을 걸어내려가 부엌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곳에서 가르쳐 준 것이 ‘머랭 치기’였다.

리처드에게 이것이 훌륭한 남자들만 할 수 있는 기술이라며 응원해 주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팔짱을 끼고서 꼬마 리처드를 지켜보았다.

솔직히 어머니가 화를 내면서 야구 카드를 찢어버린다고 위협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던 것이다!

어린 리처드는 곧 야구 카드에 대한 걱정을 잊어버리고 거품기와 스테인리스 볼, 그리고 말갛고 투명하기만 한 흰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거품기를 움직여도 아빠가 한 것처럼 되지는 않았다.

“또 안 됐어!”

여덟 살 리처드는 고집이 셌다. 아버지는 10분 만에 달걀흰자를 저어 훌륭한 머랭을 만들어냈다. 그날 리처드는 포기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흰자를 붙잡고 젓다가 지쳐서 잠이 들고 말았다.

리처드의 아버지는 잠든 아들을 안아 침대로 데려다 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끈기가 있으니까 나중에 좋은 요리사가 되겠어.”

리처드는 그 후에도 몇 번이고 시도를 했고, 일 년여에 걸친 시도 끝에 아홉 살 때에는 머랭을 치는 방법을 익혔다.

또래에 비해 큰 체구에 학교의 체육 교사에게 따로 배운 근력 트레이닝이 도움이 되었다. 그 이후 그는 계속해서 머랭을 쳐 왔다.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을 때도, 원하던 제과 학교에 불합격했을 때도, 세 달 늦게 일을 시작한 후배가 자신보다 먼저 승진했을 때도, 리처드 베이커는 묵묵히 머랭을 쳤다.

적절하게 부풀어오르는 머랭을 보면, 세상 모든 문제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해결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흰 달걀이 은빛 스테인리스 보울 안에 들어가 거품을 뿜어내며 휘돌기 시작하면 첫 번째 설탕을 뿌린다.

완벽한 순간을 질감을 눈여겨보며 두 번째, 세 번째 설탕을 섞고 나면 이제 걸쭉해진 크림이 부풀어 오른다.

이 단순하고 아름다운 작업은 예배에 참여하는 것처럼 즐겁다.

하지만 오늘 지금 여기서 머랭은 필요 없다. 머랭이 되기 전, 휘핑크림의 상태로 식혀서 보관하고 나서 이소말트 구두를 마무리해야 한다.

‘메인 케이크는 밀가루를 뺀 초콜릿 무스 케이크지. 그 위에 우아하게 구두를 올려주는 거야.’

이소말트가 녹아서 굳는 시간이 있으니까 이제 케이크 무스를 만들기 시작한다.

초콜릿 머랭 케이크의 레시피는 기본 그 자체라고 해야 할까, 나름대로 괜찮았다. 스퀘어 모양의 케이크를 구워낸 후 그 위에 투명한 하이힐을 올려놓으려는 모양이다.

‘분명히 아름다울 거야.’

그는 하지 않던 것에 새로이 도전하는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즐거웠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온몸의 혈관에 신선한 피를 전달한다. 깨어나는 것 같은 이 순간이 황홀하다.

‘놀랄만큼 실력이 좋은 후배들도 있고, 동료들도 있고.’

팀제로 한다고 해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나쁘지 않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서 책임자로 일하면서 단단한 벽돌같이 한 자리에 계속 있었다.

발렌타인데이 기념 디저트나 추수감사절을 위한 특별한 메뉴, 크리스마스를 위한 빨갛고 초록색 쿠키를 만들어온지 5년째다. 리처드는 눈앞에 있는 메뉴에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이 구두를 보면 재미있어하실 텐데.’

최근에는 드물지 않은 장식이지만 아버지가 한창 때 일하던 시절에는 이 정도로 화려한 장식 케이크는 많지 않았다. 예쁘고 좋은 것들을 볼 때마다 리처드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번 라운드에서는 내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보여줄 테니까,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으라고요, 아버지.‘

케이크를 만드는 데에 여념이 없던 리처드 베이커는 마지막까지 붉은 구두를 소재로 한 또다른 동화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          ◈          ◈

“유일봉 선배님!”

“왜? 물어볼 게 있어?”

향인대 출신의 후배인 1학년 실습생 김연수가 수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일처리가 빠르세요? 포장이랑 계산, 그리고 청소까지.”

다른 일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들어온 허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봉 매니저님이 일하시는 걸 보면 존경스러울 정도지. 아침 일찍 와서 성실하게 청소하고. 청소하고 있었나 싶으면 또 사라져서 안에서 빵 꺼내고 있고. 반죽하고 성형하는 솜씨는 이 일을 평생 해온 사람 같고. 무슨 슈퍼맨 같아.”

유일봉보다 네 살이 더 많은 허민준은 소망교회 목사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일봉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

매니저와 직원 관계라고 해도 존댓말을 들을 수 없다고 일봉이 먼저 부탁해서, 매니저라는 칭호에만 ‘님’자를 붙이는 것으로 합의했다.

유일봉이 고개를 저었다.

“민준이 형이 진혁이 형을 못 봐서 그래.”

향인대학교에 다니며 제빵을 하던 시절, 일봉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수업을 들으면 쉽고 빵을 만들라고 하면 그대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임진혁을 보고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임진혁을 나비라고 한다면 유일봉은 번데기고, 그가 모기라면 일봉은 장구벌레에 불과하다. 학교에서 동급생들 사이에서 조금 할 줄 안다고 자랑하던 작년의 자신이 부끄럽다.

‘향경전에서 계속 패배할 때도 내가 못해서라기보다 강마리오가 특별한 녀석이라서 지는 거라고 생각했지.’

향경전은 단 하나의 대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이어지는, 대학생과 일반인들이 출전하는 여러 개의 대회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두 학교의 학생만이 참석할 수 있는 대회도 있지만 일반인들이 참석 가능한 대회도 섞여 있다. 그 대회에서 줄줄이 1등을 하는 것은 실력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고 싶지 않았다. 강마리오가 유튜브를 하면서 팬을 끌어모았기 때문에 자신이 심사위원 심사에서 불리하다고 여겼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는 모르고 남이 못하는 점만 찾아내서 탓하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럽다.

‘지금도 진혁이 형을 따라가려면 아직 부족해.‘

하지만 임진혁은 다르다. 그릇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일봉이 만든 빵이 진혁의 레시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맛이 다른데, 거기에 대해서 무어라 하지 않았다. 일봉이 죄송하다고 사과하자 레시피를 알아도 맛을 재현하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격려보다 그 말 한 마디가 더 와닿았다.

형에게 인정받고 싶고, 실력을 보여주고 싶다. 지금은 아직 부족하다고 해도 조금만 더,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눈앞에 본받고 싶은 사람이 있는 지금 유일봉은 매일매일 부쩍부쩍 실력이 늘고 있었다.

‘소망 베이커리에서 빵을 만들면, 집이나 학교에서 연습하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

실제로는 오행진의 공능 때문이지만, 일봉은 그것이 형이 있던 자리에서 연습하는 심리적인 요인일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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