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33화 (133/656)

제 133화

유키코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가 선택한 동화는…… 타케토리오키나모노가타리(竹取翁物語解)의 카구야히메(輝夜?).’

그녀는 아주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이 심호흡은 그녀가 배운 명상 기술 중의 하나로, 들이마시는 호흡보다 내쉬는 호흡을 2배 더 길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불안할 때 이 심호흡을 하면 정신이 차분해지는 효과가 있어 자주 애용했다.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지만 동화를 공부한 적은 없어.’

아들은 한국의 유치원에 다니면서 한국 동화를 배웠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의 전래동화 중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동화를 테마로 할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대나무를 꺾어다 팔던 노인이 대나무숲에서 여자 아기를 발견해 데려다 키운다. 아기는 3개월만에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났다.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기 때문에 빛나는(輝夜) 공주라고 불리웠고, 수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해왔다. 결혼하기 싫었는지 그녀는 청혼해온 남자들에게 각각 다른 난제(難題)를 냈다.

그중 쿠라모치 황자에게 청한 것은 봉래산(蓬萊山)에서 난 옥(玉)의 가지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실패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황자는 정말로 옥의 가지를 가져왔다. 바다 건너 봉래산까지 삼 년 동안 헤맨 끝에 간신히 가져왔다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도 함께였다. 카구야히메는 거의 속아 그 남자와 결혼할 뻔했다. 하지만 옥의 가지를 제작한 장인이 나타나 자신이 만들었다고 고백하여 진실이 밝혀졌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옛이야기 중의 하나다. 유키코는 그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제일 좋아했다. 소학교 때는 연극반에서 카구야히메를 맡기도 했다. 다른 서양 동화들이 전부 ‘그렇게 그녀는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나는 것과 달리 그녀가 단호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전부 거절하고 달나라로 돌아가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재민씨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카구야히메도 혼인해서 지상에 남아 아이를 낳고 키웠을지도 몰라.’

스물네 살의 유키코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동안 계속 의식 불명 상태였다니.’

흥신소장이 가져온 소식은 유키코가 예상하던 것보다 더 나빴다. 일본의 텔레비전에서 최근 종영한 유명한 한국드라마 같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부모님에게 결혼 허락을 받고 돌아오겠다며 한국으로 귀국했던 박재민은 인천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던 중 트럭에 치었다. 그 이후 반 혼수상태가 되었다.

박재민의 부모는 아들이 일본에서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그 여자 친구가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는 사실이나, 유키코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들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고 이사했고, 돈이 모자라 아들의 핸드폰을 해약했다. 간병에 지쳐 있던 예비 시부모는 존재하는지도 모르던 손자의 소식을 듣고 얼떨떨해하면서도 기뻐했고, 유키코를 환영해 주었다.

긴 시간 동안 유키코가 홀로 견뎌야 했던 고통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절망이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현실에 도래한 문제에 집중했다.

‘병원비가 모자란다고 했지.’

지금은 그 우승 상금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H & J 카페 앤 베이커리는 복지가 좋지만 나마무라 베이커리보다 기본급이 적다. 그녀는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해 우승을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병원비.’

그녀가 이번에 만들려고 하는 케이크는 그 ‘옥의 가지’를 테마로 한 복숭아 무스 케이크다. 탱글탱글한 복숭아 무스를 틀에 굳혀내고 빛나는 진줏빛 글레이징을 입혀 아홉 개의 옥구슬을 가지에 올릴 생각이었다.

‘가지 역할을 할 케이크 시트는 ‘부쉬 드 노엘(buche de Noel)’ 디자인을 기본으로 할 거야.’

원래 부쉬 드 노엘은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 때 주로 먹는 통나무 모양의 케이크다. 장작 모양의 케이크를 선물로 주고받으며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라는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새해가 오기 전 땔감을 전부 불태워 부정(不淨)을 쫓아 보낸다는 설도 있다. 유키코는 두 번째의 의미에 의의를 두고서 부쉬 드 노엘을 만들려 했다.

‘그이가 건강하게 깨어나게 해 주세요.’

혼수상태로 두 달만 지나도 깨어나서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믿었다.

‘죽지만 않았으면 돼.’

죽은 사람은 살려낼 수 없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은 깨어날지도 모른다. 선호는 살아있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지시를 이어갔다.

“밀크 초콜릿 140g에 골드럼 1테이블스푼을 섞어주세요. 커피는 아까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를 내린 것을 2테이블스푼, 커피와 방금 만든 것을 섞어주신 후 저어가면서 생크림 200ml를 넣어주세요.”

복숭아 무스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맛이 진한 초콜릿에 먹혀 버리지 않도록 밀크 초콜릿을 사용했다. 부쉬 드 노엘은 본래 통나무를 절반 자른 모양이다. 그것을 가늘게 통으로 롤처럼 말아 퐁당을 입혀 가지의 일부처럼 보이게 할 예정이다.

옆에는 카구야히메를 상징하는 대나무 한 마디를 기둥처럼 세우고, 웨이퍼 페이퍼로 만든 대잎을 붙일 것이다. 대나무는 테린을 네모나게 구워서 자른 다음 퐁당을 씌울 건데, 화이트초콜릿과 버터, 그리고 달걀과 말차가루를 사용하여 녹차 맛을 내면 초콜릿, 복숭아 무스와 함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초콜릿이 복숭아 무스의 맛을 전부 삼켜버리지 않게 하려면, 초콜릿의 맛은 아주 연하게 하는 게 좋겠어. 말차는 조금 진하게 해서 밸런스를 맞추어야지.’

“흐으음…….”

봉래산의 옥 가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키코는 봉래산 가지의 옥구슬을 녹여 먹으면 만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야사를 믿었다. 잠들어 있는 재민씨가 깨어나기를 기원하면서, 자신이 혹여 불러왔을지도 모르는 부정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녀는 이 메뉴를 선택했다.

단 하나 오산이 있었다면, 그녀는 브라이언 신이 일본 동화는커녕 아시아 동화 자체를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이 모양이 맞나?’

그는 장식하는 기술이 아주 뛰어났지만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몰랐다. 아무리 자세하게 레시피를 불러 준다고 해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일부의 설명을 받아들인 브라이언 신은, 실제 케이크를 만드는 도중에 부족한 정보를 자신의 지식에서 메꾸었다.

‘밀크 초콜릿으로 바꾸긴 했지만 이건 변형된 부쉬 드 노엘 레시피인데?’

브라이언 신은 자신이 짐작한 대로 예쁘고 조그만 반쪽짜리 통나무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부쉬 드 노엘에 만족했다.

‘부쉬 드 노엘은 역시 크리스마스지. 그리고 크리스마스 테마라면, 스크루지 이야기일까?’

찰스 디킨스가 쓴 ‘크리스마스 캐럴’은 스크루지라는 구두쇠가 유령의 환상을 보고 마음을 고쳐 착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는 진주와 같은 보석은 충분히 스크루지의 재산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겨울철 장작으로 쓸 법한 작은 통나무 위에 진주빛 옥구슬을 나란히 올려놓았다. 봉래산 옥의 가지라기보다 스쿠루지가 조카에게 재산을 나눠주려고 장작 위에 보석을 뿌려 놓은 양상이다. 정확히 브라이언 신이 의도한 대로였다. 그것은 유키코가 본래 생각한 케이크와 전혀 달랐지만 그는 알 수 없었다. 커튼 너머에서 유키코는 계속해서 레시피를 읊었다.

“그리고 말차 테린은 밀가루를 사용하지 않는 일본식 레시피로 진행합니다. 먼저 버터와 화이트초콜릿, 그리고 설탕과 꿀, 달걀과 박력분, 말차 가루를 함께 준비해 주시고…….”

커튼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 채 유키코는 차분히 지시를 이어갔다.

◈          ◈          ◈

한편, 루이스 강이 선택한 동화는 ‘백설공주와 일곱 명의 난쟁이’였다.

“모델링 초콜릿은 충분히, 그리고…….”

그가 생각한 캐릭터는 하얀 모자를 쓴 파란 난쟁이들처럼 각자 성격이 또렷하게 구별되는 일곱 명의 난쟁이들이었다.

‘백설공주와 일곱 명의 난쟁이에서 주로 다루는 아이템은 ‘독 사과’지. 초콜릿 모델링으로 7명의 난쟁이들을 만드는 거야. 그들이 한 입 베어문 사과 앞에서 놀라는 장면이야말로 그 동화의 클라이맥스지.’

일부러 공주가 아닌 바닥에 떨어진 사과만을 묘사한다.

그 여백 속에서, 고객은 아주 아름다운 공주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미술적인 재능이 있는 루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재료를 불러 주었다.

아무리 천안투마공의 심안을 익혔다고 해도 남의 머릿속에서 구상한 레시피까지 꿰뚫어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카메라 앞에서 섭혼술을 써서 두뇌 속의 내용물을 꺼내는 것은 지나치게 과하다.

특별히 진혁에게 잘못을 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과제를 마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진혁은 처음으로 제빵 중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놈이 지금 이렇게 못생기고 조그만 난쟁이를 계속 만드는 이유가 뭐지? 도대체 무슨 동화를 만들고 있는 거야?’

난쟁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동화는 많지 않다. 진혁은 신강의 옛 설화를 떠올렸다.

‘왕 서방이 양 뺨에 달린 혹을 달고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자 신이 난 난쟁이들이 그 혹을 떼어 주지. 그리고 이웃집의 부자가 그걸 보고 난쟁이들의 축제에 끼어들었다가 양빰에 다시 혹을 붙이게 돼. 그 이야기를 하는 건가?’

프랑스에서 자라며 태권도를 했다던 루이스 강이 그 옛이야기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진혁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잠깐, 이 혹주머니 노인 도깨비 이야기는 변형된 설화 버전으로 한국에도 존재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한국 버전의 동화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혹부리 영감을 알고 있는 거지.’

그렇다면 지금 만드는 이 작은 난쟁이들이 사실은 도깨비인 걸까? 진혁은 의문에 휩싸였다. 혹부리 영감과 떨어진 혹, 그리고 도깨비들을 생각하는 걸까.

‘너무 어렸을 때 프랑스에 간 나머지 혹부리 영감을 제대로 못 배운 거야. 도깨비를 난쟁이로 착각했나?’

그는 지시대로 조그만 머리 7개를 만들고 거기에 크고 작은 팔다리를 붙여 주었다. 키가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는데 루이스는 다양한 생김새에 집착했다. 뭔가 예쁘고 훌륭한 걸 만드는게 좋을 것 같은데 자꾸 못생긴 난쟁이를 만들라고 한다.

‘잘 모르겠지만 요컨대 다른 얼굴이면 된다는 거지?’

옛날 생각이 났다. 진혁은 하나둘씩 아는 얼굴을 만들었다.

큰 눈에 코가 작고 작은 체구의 광안마.

큰 키에 부리부리한 눈, 멀쩡하게 생긴 얼굴에 키가 크고 건장한 혈도객.

다혈질에 체격이 커서 람보 같은 인상의 혈와수 연모백.

‘이 녀석들 얼굴을 만드니까 재밌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이 있었기에 오랜 시간을 버텼던 걸지도 모른다. 진혁이 진심을 터놓지는 못했지만 나쁜 놈들은 아니었다. 교활한 놈도 있고 멍청한 놈도 있었지만 나름 착했고 말도 잘 들었다.

‘여기 와서 그 녀석들을 그리워할 줄은 몰랐어.’

◈          ◈          ◈

“망했어.”

리처드 베이커는 스탠드 믹서에서 돌아가는 하얀 크림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딱 먹기 좋게 부풀어 오르는 머랭을 보면서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머랭 크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씁.’

그는 초반부터 유력한 우승 후보로 불렸지만 혜성같이 떠오른 다른 쉐프들 때문에 뒤처졌다.

순위권 바깥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찌어찌 탈락 후보에는 들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이 멍청이, 이용태 쉐프와 함께라면, 이번 라운드에 탈락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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