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2화
“Hey, bro(어이, 친구!)”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동안 구레나룻이 부쩍 길었다. 새까만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안토니오가 생기 넘치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살짝 흔들리는 화면으로 이 영상이 프로 카메라맨이 찍은 것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직접 촬영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스마트폰의 카메라 화면을 돌려 뒤에 있는 건물은 보여주었다.
“Father Paul wants to say hi.(바울 신부님이 인사하고 싶대.)”
건물은 미국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평범한 2층 주택이었다. 잔디밭 앞에는 휠체어를 타고 무릎에 담요를 걸친 늙은 백인 노인이 앉아 있었다.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그 노인이 카메라 너머를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Thank you very much(감사합니다).”
“Your recipe is perfect. It gave Father Paul whole new life.(네 요리법은 완벽해, 리처드는 완전히 새 인생을 살고 있어.)”
미국으로 돌아간 안토니오는 비행하는 19시간 동안 진혁이 넘긴 레시피를 가지고 엄청나게 고민했다. 아무리 위를 절제했다고는 해도 개를 위해 만든 자연식이를 인간에게 주어도 되는지가 그 첫 번째 고민이었다.
그는 바울 신부님을 위해서 오래 고민해 왔다. 위 절제 수술 후 식이에 대해서는 감히 영양학적 전문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꼭꼭 씹어서 소량 자주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식사량이 적고, 작은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 좋았다. 고기나 생선, 두부나 콩 등 단백질 식품이 다량 함유된 것이 좋았다. 지방은 음식물이 위장을 통과하는 속도 자체에 영향을 주어 느리게 해주기 때문에 적절한 양을 쓰면 좋다. 설탕과 같은 단순 당질은 피한다. 그밖에도 카페인이 들어간 커피나 홍차류, 대추와 건포도를 포함한 말린 곡류, 견과류나 젤리, 겨자와 후추 등의 자극적인 음식 또한 피해야 했다. 하지만 임진혁이 최상급 재료로 만든 개용 레시피는 그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놀랍게도 인간의 입맛에 맞게 소금 간을 조금 더하는 정도로, 충분히 먹을 만하면서 영양 면에서도 풍족한 음식이 되었다. 이미 담백하면서도 소화가 잘되는, 영양소가 풍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굳이 개량하지 않아도 좋았다. 오히려 강한 허브나 향신료를 사용하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게 되어버려서 음식의 존재 의의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완벽한 레시피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빠른 영어로 몇 번이나 감사의 말을 하는 안토니오였다. 한 번 더 감사의 말을 하는 바울 신부를 보면서 임진혁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냥 개밥 레시피를 나눠 줬는데……. 저렇게까지 좋아하니까 오히려 미안할 정돈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진혁에게 주영모 쉐프가 말했다.
“좋아하잖아, 잘됐는데.”
“개밥을 줬는데 저놈…… 아니 안토니오 쉐프가 그걸 사람한테 줬잖습니까.”
카메라를 의식해서 고운 말을 써 주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찡그린 채였다. 줄 때도 분명히 개량해서 인간용으로 다시 만들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대로 써도 좋다면서 신나하는 걸 보니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사람이 먹던 것을 남겨 개에게 주면서 짬밥이라 하는 경우는 봤는데, 개를 위해 만든 음식을 사람에게 준 셈이니 맘이 편치 않았다. 주영모 쉐프는 진혁이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 했다.
“아주 도움이 되었다고 좋아하는데? 그것도 레시피가 한두 개가 아니네.”
영상 편지는 아주 길었다. 안토니오는 진혁이 만든 레시피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후기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다. 호박 연어 찜이 부드러웠다든지, 닭가슴살로 도우를 만든 저염 페퍼로니 피자를 바울 신부님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돼지고기를 직접 잘라 소금 양념을 하지 않고 튀긴 베이컨 칩이 얼마나 바삭바삭했는지. 긴 영상 편지가 끝나고 주영모 쉐프가 박수를 쳤다.
“요리사가 자신이 레시피를 나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대단하군…….”
감탄을 멈추지 못하는 주영모 쉐프에게 임진혁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레시피를 나눠 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죠.”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이 상업적으로 이용한다거나, 왜곡한다거나 하는 건 두렵지 않나?”
진혁이 웃었다.
“레시피로만 제가 만든 것을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혁이 레시피를 적어준다고 해도, 그가 빵을 만들면서 실제로 사용하는 무공을 모방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치즈케이크를 만들면서 새로운 무공의 경지를 깨달은 지금은 더욱더 그랬다. 검왕(劍王)이라 불리던 남궁소천이 오더라도 지금의 진혁처럼 섬세하게 강기를 그물로 짜서 크림과 시트를 분리하거나, 강기로 떠받쳐 정교한 설탕 세공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 광오한 발언을 들은 주영모 쉐프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퍽 자신만만한데? 이번 라운드에서는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두라고.”
“흠……?”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기 전에 주영모 쉐프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현재 일하는 곳에 유키코 쉐프가 취업했다던데.”
“예.”
“특별한 관계 아니야?”
“저는 내내 군대에 있었는데요. 일본 땅에는 발을 디뎌본 적도 없고, 여기서 처음 만났습니다.”
못 알아들은 척 딴 소리를 하는 진혁에게 주영모 쉐프가 물었다.
“그런데 왜 같이 일하고 싶어 했는데?”
“실력이 좋으니까요.”
“예뻐서?”
스태프 임종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끼어들었다.
“주영모 쉐프님!”
“아아, 조심한다고. 조심할게. 임 쉐프, 계속 그 자세로 가라고. 요즘은 소문이 안 좋지만, 오늘 전부 해명이 될 거야.”
윙크를 하는 주영모 쉐프 뒤로, 스태프 임종태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자를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시잖아요……. 편집 팀 좀 살려 주세요, 주영모 쉐프님.”
“하하하하!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짧은 인터뷰가 끝나고 진혁은 주영모 쉐프를 따라서 무대로 향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모여서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진혁이 무대로 오르자 주영모 쉐프는 무대 뒤쪽으로 사라졌다. 붉은색과 파란색, 노란색과 초록색, 화려한 원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온 후 심사 위원들이 등장했다.
출연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이번 라운드에서는 2인 1조로 팀이 됩니다.”
이희주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운이 좋은 한 명은 부전승으로 올라가게 되지요.”
짝수 줄에 있던 쉐프들이 앞으로 나와서 통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빨간 공을 집은 사람은 팀원을 한 명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루이스 강이었다. 붉은 공을 손에 쥔 루이스 강은 망설임 없이 임진혁을 선택했다.
“임진혁 쉐프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브라이언 신과 유키코 김이 쳇, 하고 루이스 강을 노려보았다. 루이스가 씨익 웃었다.
“내 패션 센스와 임진혁 쉐프의 맛 내는 실력이라면 우리는 우승할 수 있으니까.”
’잠깐, 내 패션 센스가 어디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혁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쉽군…….”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브라이언 신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흰 공을 뽑고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별이 그려진 공을 뽑았다면 부전승이었을 것이다.
“하얀 공을 뽑으신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파트너로 선발되기를 기다리며 브라이언 신이 투덜거렸다.
“내 패션 센스가 루이스 강 쉐프보다는 나은데…….”
“하하! 이미 임진혁 쉐프는 나와 함께하고 있다고.”
잡담을 나누는 동안 앞으로 나선 유키코 김 쉐프는 손에 쥔 붉은 공을 내려다보았다.
“브라이언 신 쉐프, 저와 함께 하시겠어요?”
“영광입니다.”
남은 사람들도 하나 둘씩 공을 꺼냈다. 리처드 베이커는 이용태 쉐프의 파트너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별이 그려진 공을 꺼낸 것은 서니 윌슨이었다. 미국에서 온 흑인 쉐프로, 과일 타르트가 특기다. 그는 숨길 수 없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다음 라운드에서 만나자고, 친구들.”
그가 호쾌하게 웃음짓는 동안 다른 이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이희주 사회자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윌슨 쉐프, 축하드립니다. 이제 다른 분들에게 규칙을 설명드리죠. 두 사람 중 한 명은 머리, 다른 한 명은 손을 담당하게 됩니다.”
당연히 시즌 1 때처럼, 두 명이 한꺼번에 구상하고 함께 케이크를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
스텔라 위스커스가 이어서 설명했다.
“머리가 구상한 작품을 어떻게 만들지, 커튼 너머에서 입으로 이야기해주면 손이 만듭니다. 점수는 두 사람이 동일하게 나누어 갖습니다.”
“누가 머리고 누가 손이죠?”
리처드 베이커가 질문하자 이희주가 대답했다.
“붉은 공이 머리를 맡게 됩니다.”
이희주가 규칙을 마저 설명해 주었다.
임진혁과 루이스 강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
“손이라, 재미있겠네.”
“30분간 구상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테마는 ’전래동화‘입니다.”
이희주가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머리는 손에게 어떤 전래동화인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순수하게 작업 단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십시오.”
◈ ◈ ◈
머리를 맡은 이들은 끙끙대며 종이에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준비할 것이 없는 임진혁은 편안한 마음으로 조리대에 몸을 기댔다.
“임진혁 쉐프, 초콜릿 모델링이 특기지?”
“따로 특기는 아니지만, 솜씨가 나쁘지는 않지.”
옆에 다가온 주영모 쉐프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어이, 어이. 손은 원래 말을 못 한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무대 앞에서 이희주가 마이크를 들고 또렷하게 말했다.
“머리는 말할 수 있지만, 손은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하시는 것은 이해해드립니다!”
‘광대놀음이 따로 없군.’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스 강이 눈치 없이 신나하며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걸 과연 다 만들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동생의 복수를 해주마.”
‘이봐. 우리 같은 팀이다……?’
과연 이 녀석과 같은 팀이 된 것이 좋은 결정이었을까? 진혁은 혼자였다면 최선의 실력을 발휘할 자신이 있었지만, 이 천방지축에 장난꾸러기인 녀석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진혁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내 지시대로만 그대로 따른다면 우승은 우리의 것이야!”
진혁에게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그는 스케치북에 빠르게 초안을 그려냈다. 그가 전에 보았던 데커레이션 페어의 ’승천하는 용‘은 확실히 초콜릿 모델링의 신기원이었다. 임진혁이 어느 정도까지 섬세하게 초콜릿을 자아낼 수 있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즐거웠다.
곧 30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루이스 강은 하나하나 불러주기 시작했다.
“임 쉐프, 70% 초콜릿 템퍼링!”
‘이 자식이.’
여기 보관되어 있는 70% 초콜릿은 세 가지 브랜드가 있었다. 진혁은 정확하지 않은 지시에 마음속 깊이 짜증을 느끼며, 세 종류의 70% 초콜릿을 전부 가져와서 템퍼링하기 시작했다. 조리대의 가스레인지 위에 놓여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초콜릿들이 만족스러운 농도가 되었을 무렵, 다시 루이스 강이 외쳤다.
“5인치 반구형 틀 안에 초콜릿을 부어서 급속 냉동고에 넣어 주세요.”
‘멍청한 놈. 대체 어느 정도 두께로 할지는 왜 말을 하지 않는 건가?’
진혁은 열두 개의 반구형 틀을 가져왔다. 2mm 두께, 4mm 두께, 6mm 두께. 각각 다른 두께로 초콜릿을 굳혀가면서 진혁은 힐끔 다른 팀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유키코를 향하고 있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무슨 동화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