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1화
“남자친구라고 해야 하나…… 아이 아빠에요.”
유키코가 수줍게 웃었다.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백진영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있다는 걸 원래 모르던 것도 아닌데 왜 새삼스럽게 남자가 있다고 해서 놀라는지 모르겠다. 일 잘하는 의형이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괜히 임진혁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임진혁은 백진영의 등을 툭 쳐주었다.
‘정신 좀 차려.’
백진영이 쩔쩔매며 서 있는데 유키코가 곤란해 하며 엄지손가락 손톱을 살짝 물었다.
“지금 당장 찾아와 달라고 하는데, 거리가 좀 멀어서 고민이 되네요…….”
“내일 촬영도 있으시잖아요?”
“사실 TV 출연도 원래 재민 씨를 찾으려고 나가려고 했던 거긴 한데.”
고민에 빠진 유키코를 응시하면서 진혁은 무표정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안 나가겠다는 건가?’
일월신교의 신도들은 교의(敎義)를 믿고 따르며 무림인은 신의(信疑)를 지킨다. 약속의 무게는 금과도 같다고 여겨진다. 거기에 계약서까지 썼다면 당연히 그건 지켜야 한다. 유키코 역시 진혁처럼 촬영 계약서를 썼을 것인데 가족의 일이라고 해서 책임을 방기하고 갑자기 그만둬도 될까?
‘……새삼스럽게 하루 정도 늦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나. 이미 한다고 약속한 거니까 내일 촬영은 시간 맞춰 나가야지.’
아니다. 도망갈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진혁은 그 재민이라는 사람을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재민이란 놈이 하는 짓은 기루의 기둥서방과 다르지 않았다. 즉 여자를 꼬드겨 여자의 능력으로 놀면서 먹고 사는 사기꾼이란 이야기다. 능력은 좋지만 신의도 없고 믿음도 없는 놈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기둥서방 같은 놈이라고 생각해보면 하루가 지나면 도망쳐버릴 수도 있겠네. 오늘 가는 게 좋을 수도 있겠군.’
그래도 자신의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진혁은 유키코가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에 따라서 앞으로 그녀를 평생 데려갈지, 아니면 계약대로 딱 일 년만 함께하고 헤어져야 할지를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우대만 멀쩡한 무림맹(武林盟)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들은 그들이 맹의 일보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고 자존심을 챙겼기 때문이지. 책임감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어.’
진혁이 자신의 주방에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경험이 풍부하며 직업의식이 투철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제 시간에 출근하고, 자신의 시간처럼 남들의 시간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기본이었다.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하겠다고 약속한 일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림인들이 안휘성의 남궁세가(南宮世家) 사천성의 당문(唐門)처럼 역사 깊은 문파를 신뢰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말을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일월신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은 과거 교주들이 그 말을 지키려 노력했으나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혁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 유키코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만에 하나 상처를 입을까 걱정되고, 아이를 여기에 두고 갈 수도 없고요.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생각만큼 머리가 꽃밭에 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
그녀는 상황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속일 수는 있지만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혁은 아이에 대한 책임감은 높이 샀다. 쇼에 최선의 상태로 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아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누구나 우선순위는 다르고, 진혁에게 있어서 최우선인 것은 가족이었다. 그는 유키코가 자신이 빨리 남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보다 아이의 감정과 상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점은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어머니로서의 책임감인가.’
백진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꼭 오늘 가셔야 합니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상황이요?”
“내일 새벽부터 촬영이잖아요.”
“그러네요. 어떡하죠, 오늘 꼭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하는데.”
유키코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엄지손톱을 씹어 먹을 기세로 질겅질겅 물어뜯었다.
“몇 년간이나 계속 찾았는데, 마침내 이런 날이 오다니 현실 같지 않아요. 하룻밤 자고 일어났다가 사실은 못 찾았습니다, 할까봐 걱정도 되고요.”
“진짜 찾은 건 맞다고 합니까?”
진혁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지금 가야만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거면, 그게 더 수상쩍은데요.”
“그건 그래요.”
여자가 수긍했다.
“내가 아는 그이라면 내 소식을 듣자마자 여기로 바로 찾아 왔어야 해요. 지금 오라는 건…… 그이가 이쪽으로 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잖아요.”
‘아니면 그냥 오기 싫은 걸 수도 있지.’
유키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진혁이 손을 내밀었다.
“어디로 오라고 합니까?”
“사무실까지 오라고 하네요.”
갈팡질팡하는 그녀를 바라보고는 진혁이 혀를 차고서 말했다.
“이리로 오라고 하죠.”
“예?!”
“어차피 그 재민이라는 사람 집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이쪽으로 오는 편이 낫죠. 저희는 세 명이니까요.”
“아니, 두 분이 같이 가주실 필요는…….”
“아이까지 합하면 네 명이군요. 만나서 설명을 하고 싶은 거면 이리 와서 하라고 합시다.”
그렇게 부탁드려도 되려나, 하고 망설이는 얼굴을 보고 진혁이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이리로 오라고 하면 올 겁니다.”
“원래 항상 그쪽으로 오라고 하셨는데, 과연 올까요?”
망설이는 유키코에게 진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전에 의뢰했던 것도 부탁할 게 있으니 와달라고 이야기해 보세요.”
진혁은 그가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안 오면 맞아야지.’
유키코가 와주실 수 없겠느냐는 연락을 하고서, 흥신소장은 19분 만에 카페에 도착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신호 위반을 하면서 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빠른 속도였다.
◈ ◈ ◈
“안녕하시오.”
깊어진 주름과 눈 아래 짙은 그늘, 깎지 않아 덥수룩한 수염과 구레나룻까지, 흥신소장은 놀라보게 초췌해져 있었다. 유키코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건넨 그가 뒤에 서 있는 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절이라도 할 것처럼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백진영은 혼자 생각했다.
‘진혁이가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무서워하지….’
흥신소장이 빨리 온 덕분에,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한 시간 정도 더 봐주는 데에 동의했다. 이 일은 유키코의 사적인 일이었으므로 두 남자가 들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 일이니, 유키코의 아이가 같이 들어야 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유키코가 같이 있어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임진혁과 백진영은 그곳에 서 있었다. 겨우 이틀을 같이 일한 동료 입장인데 이렇게 믿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그만큼 신뢰를 얻었다는 이야기였다. 백진영은 생각했다.
‘아니면 저 남자를 무서워해서 우리라도 같이 있어줬으면 하는 걸 수도 있지.’
여기까지 온 흥신소장과 유키코. 의뢰인은 분명히 유키코인데도 불구하고 이 상황의 주도권을 쥔 것은 임진혁이었다.
“여기 앉지.”
그는 영업을 마친 카페의 테이블 구석으로 흥신소장을 인도하고 유키코를 마주보게 앉혔다. 나이가 한참 많은 흥신소장에게 어린 사람 대하듯 하대를 했는데 신기하게 그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흥신소장 역시 자신에게 반말하는 진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가끔 하는 행동을 보면 백정흠 삼촌보다 더 나이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이야.’
진혁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백진영이 이해하지 못하자 가볍게 어깨에 손을 둘러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만한 주방 구석으로 함께 움직였다.
“찬물이라도 한 잔 내줄까?”
백진영이 물어보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방해하지 말지.’
그는 입술에 쉿, 하고 검지를 올려 보였다. 유키코는 고맙다는 듯 눈짓을 보냈고, 흥신소장은 두 사람이 멀리 간 것을 보더니 바로 서류를 꺼내 보이며 유키코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음.”
백진영은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내일 아침에 테스트할 예정이었던, 볼리비아에서 들어온 좋은 원두를 갈았다. 스승님이 개업을 기념해서 선물해준 목제 그라인더로 갈면 좋은 소리가 났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선 진혁이 평했다.
“냄새 좋다. 좀 다른 건가?”
“이번에 선생님이 새로 추천해 주신 거야. 너 코가 진짜 좋다. 마약 수색견 해도 되겠어.”
“그거 칭찬이야?”
백진영이 진혁과 아무렇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필터 아래로 똑 똑 떨어지는 커피 방울이 새까맣다. 백진영은 애써 저쪽을 보지 않으려 하며 고개를 돌렸다.
◈ ◈ ◈
다음날 새벽, SBC 방송국.
촬영이 예정대로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화장을 마친 출연자들 모두가 무대 앞에 모였다. 유키코를 포함해서 아무도 지각한 사람은 없었다.
“오늘따라 다들 더 멋져 보이십니다!”
김산호 PD가 흡족해하며 말했다. 그가 임진혁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시청률이 아주 좋습니다. 다들 잘해주신 덕분이죠.”
모두에게 하는 말 같았지만 사실 진혁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가 가지고 나온 복고풍 아이템인 ‘2002년 월드컵 셔츠’는 옛날 축구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패자부활전에서 더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었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진혁은 간단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은 전체 무대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 인터뷰 촬영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인터뷰 실로 불려간 사람은 유키코였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먼저 인터뷰실로 들어간 후 다른 사람들도 각자 스태프의 부름을 받았다. 브라이언 신과 루이스 강이 차례대로 불려간 이후, 곧 다른 보조 스태프가 진혁을 불렀다.
“임 쉐프님 추가 인터뷰는 이쪽입니다!”
촬영하기 전, 촬영 도중, 그리고 촬영하고 난 후. 세 차례의 인터뷰는 처음부터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편집되고 나서 방영되는 것은 극히 일부였다. 하지만 진혁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특이하게 창문과 텔레비전이 있는 넓은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마 이번에 하는 건 유키코 쉐프에 대한 질문이겠지.’
본인이 털어놓지 않는 것을 타인 입장에서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스태프가 물어본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안토니오 펠리페 칼루치오 쉐프님이 영상 편지를 보냈습니다.”
“예?”
진혁의 이번 사전 인터뷰는 주영모 쉐프가 맡았다. 그 질문에 진혁이 이맛살을 찡그리며 대답하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편지가 왔다는데 왜 그렇게 싫어해?”
“이건 편집될 거니까 미리 말하자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던 임종태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주영모 쉐프는 이렇게 편집 팀의 일을 늘려주는 일을 종종 했다. 촬영하는 상대방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건 알겠지만, 쓸 만한 장면이 나와도 앞뒤를 다 잘라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
“이건 분명히 화면 탄다. 그러니까 그렇게 대놓고 싫은 얼굴 할 것 없어. 방송 분량도 확보되고 좋잖아. 가게 홍보도 되고.”
주영모는 처음에 진혁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너무 경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은 이후부터는 아끼는 후배처럼 대했다.
“사내놈이 외국어로 편지를 보냈다는데 그게 좋을 건 또 뭡니까.”
진혁이 지레 뚱한 척 대답하자 주영모가 배를 잡으며 웃었다.
“들으니 그렇네. 번역은 알아서 해줬을 거야.”
주영모가 사인을 주자 맞은편 벽에 있던 TV가 켜졌다. 바로 영상 편지가 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