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30화 (130/656)

제 130화

“제 아래로 후배가 들어온다고요? 엄청 바빴는데 잘됐다.”

막내 예은이 신나서 말했다. 김가영이 고개를 저었다.

“네 아래는 아니고, 유키코 쉐프님 밑으로.”

“엥? 일한 지 사흘밖에 안됐는데 벌써 견습생을 받는대요? 임진혁 쉐프님은 계속 견습생 없이 일하셨잖아요.”

“진혁 쉐프님이 자기는 아직 미숙해서 제자 생각이 없대.”

“임진혁 쉐프님은 자기 자신을 모르신다니까. 원데이 클래스 하면 백 명이 모여들 걸요? 백 명이 뭐야, 삼천 명이 올 수도 있지.”

“의자왕도 아니고. 삼천궁녀냐?”

퇴근하면서 여자 직원들은 구석에 있는 여자 직원 전용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좁지만 나름 사물함도 준비되어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김가영이 블라우스 상의를 접어 걸고서 편안한 회색 후드 티셔츠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보다 백진영 바리스타님하고 유키코 쉐프님. 관심 있는 것 같지 않아?”

막내 예은이 재잘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요.”

“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유키코 쉐프님도 눈이 있는데, 어떻게 임 쉐프님을 두고 바리스타님한테 반할 수가 있어요?”

예은이가 고개를 젓자 김가영이 답답해하며 말했다.

“넌 내 이야기를 코로 들었어, 입으로 들었어? 백진영 바리스타님‘이’ 유키코 김 쉐프님한테 반한 것 같다니깐.”

“실제로 보니까 더 미인이라고 하긴 하셨죠. 그것보다 새로 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래요?”

“무슨 옛날 전래동화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름이었는데. 금동인가 은동인가 그랬어.”

정확히는 김은동이었지만 김가영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꺼낸 화제이긴 했지만 막상 이야기하기는 싫어서 화제를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 뻔한 의도를 눈치 챈 예은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언니가 진짜 얘기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잖아요.”

“응?”

“백진영 바리스타님, 좋아하잖아요.”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건 임진혁 쉐프님…….”

김가영이 자신의 입을 황급히 가렸다. 예은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분은 연예인이고. 연예인 좋아하는 거랑 내가 사바세계의 사람을 좋아하는 거랑 다르죠. 팬클럽도 따로 있던데?”

“서, 설마 너도 가입했어?”

김가영이 말을 더듬자 예은이 말했다.

“아뇨, 비공개 가입 신청도 받기는 하던데 거기 가입하는 것도 너무 어렵고 해서 저는 안 했어요.”

‘다행이다.’

진바라기의 17호 회원, 김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예은이 역시 진바라기의 회원이라면, 닉네임만 봐도 자기가 실제로 누군지 금방 눈치를 챌 것이다. 진바라기의 ‘kim88’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덕밍아웃을 후배에게 하고 싶지는 않아.’

어쩌면 예은이까지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에 하나 백진영 바리스타님이나 임진혁 쉐프님에게 들키는 날에는 더 이상 카페에 출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울 것이다. 김가영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어째서 임 쉐프님이 아니라 바리스타님을 먼저 생각했을까? 임진혁 쉐프님 팬클럽인 게 왜 바리스타님한테 들키면 부끄러울 일이지?’

생각과 마음과 욕심이 폭풍처럼 휘몰아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가영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옷을 다 갈아입은 두 사람은 나란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김가영은 머리를 빗고, 예은은 입술에 립글로즈를 발랐다. 예은이 새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언니는 자기가 임진혁 쉐프님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아니에요. 바리스타님이 유키코 쉐프님 빤히 볼 때 언니가 어떤 눈빛으로 유키코 쉐프님 보고 있었는지는 알아요?”

“내가?!”

김가영은 머리를 빗다가 두피에서 머리카락을 다 뽑아 버릴 뻔했다. 자신이 깨닫는 것과 남이 이야기해주는 것은 분명 달랐다. 그녀는 빗을 내려놓고 예은을 노려보았다. 예은이는 눈치 없이 신나게 재잘댔다.

“만날 보면 언니가 임 쉐프님 볼 때랑, 백진영 바리스타님 볼 때랑은 시선이 완전 다르다고요. 언니가 오프닝 멤버라서 그런가, 바리스타님이 언니를 많이 믿고 의지하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언니도 바리스타님을 챙겨줘야 할 사람같이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뭐, 어차피 다 소용없는 얘기죠. 바리스타님은 유키코 쉐프님을 좋아하니깐.”

예은이가 혀를 낼름 내밀며 얄밉게 말했다.

“얘가 진짜!”

정말로 화를 낼 뻔했다. 김가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어라 말하는 순간 예은이가 탈의실을 박차고 나섰다.

“언니가 먼저 얘기 꺼내 놓고선. 나는 가요!”

“같이 가!”

김가영이 바로 예은이 뒤를 따라서 탈의실에서 뛰쳐나왔다. 탈의실 앞, 주방에서 밀가루 포대를 나르고 있던 임진혁이 손을 들어 배웅해 주었다.

“조심히 가고, 내일 보자.”

“내일 뵙겠습니다, 임 쉐프님!”

“내일 뵙겠습니다!”

가게를 나가는 두 여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임진혁이 피식 웃었다.

‘가게 안에 연애 문제라…… 젊고 활기차서 좋군.’

그는 나이든 노인 같은 생각을 하며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곧 사무실 문을 열고 백진영이 나왔다.

“이것 봐, 김은동 씨 근로계약서. 예은이하고 같은 조건이야.”

“괜찮네.”

간단히 훑어본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영이 물었다.

“원래 제빵 견습생은 안 받는다더니 웬일로 마음을 바꿨어? 어떻게 아는 사이기에?”

“거래처 사장님 댁 아들이야. 실력은 어쨌든, 품성은 좋아.”

거래처 사장님 아들이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김은동은 우리꼬맹이밀농장 농장주의 장남이다. 하지만 그 거래처 사장님 아들이 우리꼬맹이밀로 빵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진혁은 거절했다.

“알려줘도 넌 못 만들어.”

반죽을 만들고 굽는 도중에 반죽 내에 공기를 집어넣어 부풀리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데, 이는 무공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기술이었다.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버지나 일봉도 배우지 못했다.

김은동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은동은 향인대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대학교에서 제과제빵을 전공하고 졸업한 제빵사였다. 대대로 농사 지어온 우리꼬맹이밀로 맛있는 빵을 만들어 파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였는데, 진혁이 그것을 순식간에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만든 비법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경해서 효모 빵 클래스에 등록했다. 진혁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우리꼬맹이밀을 사용한 빵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런저런 비싼 클래스를 전전하는 사이에 갖고 올라온 돈은 다 써버렸다. 꼬리를 내리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기 부끄러워 목적 없이 방황하다가 치킨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우연히 진혁을 다시 만났다.

‘멍청한 짓이었지.’

진희와 함께 먹으려고 치킨을 두 마리 시켰는데, 배달원이 환영마라진(幻影魔羅陣)에 걸려들었다. 김은동의 입장으로서는 길을 지나가다가 똥을 밟은 격이었다. 본래 환영마라진은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두려웠던 것을 보게 만드는 진으로, 잘못하면 피시전자가 백치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강력한 진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현대인의 연약한 정신세계를 고려해 피시전자가 혐오하는 것을 보게 하는 정도로 강도를 낮추었다.

보통의 인간이 환영마라진을 겪다가 누군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을 대신 놓고 도망가려 했다.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더라도,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으니까 그 사람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은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순박한 농가 출신의 청년은 무언지 모를 괴물을 보면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끝까지 이쪽으로 오면 안 된다고 외쳤다. 과거 중원에도 드물던, 아마도 현대에는 더 없을 멍청한 놈이다.

‘멍청하게 착한 놈.’

그래서 임진혁은 농가의 아들 나부랭이에게 빚을 진 것이다.

‘마음의 빚이 제일 귀찮지.’

차라리 환영마라진에 걸려들었다가 진혁까지 끌어들이려고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갔다면 적당히 기억을 지워버리고 돈이라도 몇 푼 쥐어주었으면 됐다. 자기 일을 하려다가 애꿎게 환영마라진에서 고생한 값인 셈이었다. 하지만 하룻강아지는 범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진혁은 그에 대해서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줘야겠다고 결정했다.

유키코는 간략히 생략된 사정을 듣고서-고마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견습으로 들여 우리꼬맹이밀을 사용한 빵을 개발하면서 실무를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기꺼이 수긍했다.

‘직접 가르치기에는 번거로운 일이 많았는데 잘됐어.’

절반 이상의 빵은 무공을 이용해서 만들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란 어려웠다. 일봉이나 아버지에게 가르칠 때에는 특별히 일반인을 위한 기법을 새로이 만드는 공을 들였지만, 굳이 여기서까지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직전 제자(直傳弟子)도 아니고 일일이 가르쳐줄 필요는 없지.’

도가(道可)나 불문(佛門)에서 직전 제자를 두고 이와 구분해 속가제자(俗家弟子)를 두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나 일봉은 진혁에게 있어 선 안에 들어선 사람이지만, 김은동이나 유키코 김은 아직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하긴. 실력은 키우면 되지만 품성은 기르기 어려우니까. 좋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백진영이 혼자 납득하며 중얼거렸다.

“유키코 씨는 지금 악성 루머도 돌고 있어서 신경 쓸 게 많은데, 견습생이 품성이 좋은 편이 낫지.”

그는 고개를 들어 키친 쪽을 바라보았다. 오픈 키친 앞에는 유키코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조리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첫 근무 날답지 않게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지만 확실히 진혁보다는 손이 느렸다. 그래도 다행히 유키코의 시그니처 메뉴인 ‘유키 카스테라’는 반응이 좋았다. 평범해 보이는 카스텔라 안에 생크림을 듬뿍 넣은 유키 카스테라는, 반죽할 때에도 아예 생크림을 섞어 빵 자체를 촉촉하게 만든 것이 비결이었다.

진혁이 미리 준비한 진혁의 시그니처 메뉴인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가 매진된 후 2시간여가 지나서 유키 카스테라 역시 매진되었고 유키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경력직으로 스카우트된 값을 해낸 것이었다.

“유키코 씨!”

백진영이 불렀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아직 근무의 여운을 즐기는지 아직 조리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백진영이 다시 물었다.

“안 가시나요? 내일이 촬영이라 피곤하실 텐데, 일찍 들어가셔야죠.”

진혁은 미간을 찡그렸다.

‘울고 있나?’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키코는 대리석 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가 어깨를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가가 젖어 있었다. 진혁이 물었다.

“오늘 일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유키코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이를 찾았대요.”

“그이요?”

“재민 씨요. 제 남자친구요.”

‘그 흥신소 녀석이 열심히 발로 뛰었나보군.’

백진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남자친구가 있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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