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29화 (129/656)

제 129화

“예.”

“세상에.”

유키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뚫어질 것처럼 빤히 케이크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물었다.

“그랜드 피아노 뒤에 이상한 게 있는데요. 일부러 만드신…… 어라, 저거 설마.”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진혁이 손을 뻗어 조그만 손잡이를 눌렀다. 여리면서도 섬세한 피아노곡이 미디음으로 선명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클래식이네요?”

해피버스데이 같은 단순한 곡을 생각했던 세 사람이 크게 놀랐다. 그중에서도 제일 놀란 것은 정지숙이었다.

“이건 제가 말씀드렸던 곡이잖아요?”

정지숙이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리스트의 베르디 리골레토.”

주세페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리골레토’. 그중에서도 3막의 4중창 ‘Bella figlia dell’amore’를 리스트가 ‘리골레토 패러프레이즈’라는 이름의 피아노곡으로 재편곡했다. 분노와 사랑, 불륜과 복수가 얽힌 4중창을 재편곡한 만큼 풍부한 감성과 정밀한 기교를 필요로 하여 초등학교 6학년이 연주하기에는 쉽지 않은 곡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드문드문 주니어 콩쿨에서 이 곡을 가지고 나오는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질세라 실력에 자신 있는 아이들은 반드시 준비하는 곡 중 하나였다.

“이전에 만났을 때 이 곡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을 때 최근 이 곡을 끝내서 자랑스러워한다고, 내친 김에 떠들기는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피아노를 치는 아들 모양의 사탕 인형을 보며 거기에 흘러나오는 리골레토 패러프레이즈까지 들으니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보니까 건반을 하나하나 누를 수 있게 만들어 놓았어. 어떻게 이렇게 한 거지?’

“예. 오르골을 주문 제작하는 곳이 있어서 같이 부탁했지요. 마침 이번에 테스트용으로 만든 곡 중에 리골레토가 있다고 하기에.”

진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초등학교 6년이 소화할 수 있는 곡에서 최상의 난이도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나서 아예 그걸 바탕으로 테마를 조립했죠. 최근 저희 카페 직원 중에 오르골을 넣은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탕으로 얇게 판을 만들어 조립한 그랜드 피아노 안에는 오르골이 숨어 있었다. 정지숙이 직접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다시 한 번 우아한 선율이 방 안에 펼쳐졌다. 랑비에가 말했다.

<이 아름다운 선율을 불러일으키는 케이크가 무슨 맛일지 꼭, 맛보고 싶군요. 생일 파티에는 저도 초대해 주시렵니까?>

<안타깝게도>

정지숙이 대답했다.

<이 케이크는 저희 집안의 가보로 대대로 물려줄 예정이라서, 맛보시기는 어렵겠네요.>

“드실 때는 사탕 인형만 분리해서 아래를 잘라서 드시면 됩니다.”

진혁이 설명하자 정지숙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안 먹어요. 아니, 못 먹어요. 이걸 어떻게 먹어요, 아깝게.”

그녀는 케이크를 다시 상자에 넣어 버렸다.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아이가 너무나 기뻐할 거예요.”

◈          ◈          ◈

다음날 아침, H & J 카페 앤 베이커리.

일찍 와서 바게트를 굽고 있던 진혁은 종소리를 들었다.

“어서 와.”

“임 쉐프님! 말씀하신 거 가지고 왔어요.”

평소보다 빨리 출근한 김가영이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서 차곡차곡 종이에 쌓인 도기 접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던 진혁이 짧게 말했다.

“그릇 고맙다.”

그는 하나씩 종이를 벗기며 그릇이 깨지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명세서에 서명을 받으며 가영이 씩 웃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선생님도 고맙다고 하셨어요.”

“자연스러운 PPL 말이지?”

“그렇죠!”

화웅 베이커리 시절부터 함께했던 직원인 김가영. 오랫동안 시험 준비를 하던 그녀는 여기에 취업한 이후, 퇴근할 때마다 제과제빵을 배우러 다녔다. 색감이나 조형에 대한 센스가 있고 ’맛있는 것‘을 기가 막히게 구분해내는 능력이 있었지만 맛있는 것을 만들지는 못했다. 몇 달간 낑낑대며 제과제빵을 하다가, 자취방 룸메이트 언니의 권유로 도자기 공방에 나가서 도기를 굽기 시작했다.

‘의외로 도예 분야에 재능이 있었지.’

자격증만 갖고 있는 제과제빵 분야에 대한 야망을 완전히 접고서 도자기 공방 수강생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눈썰미 좋고 손재주가 있어 쉬는 날에도 틈틈이 나가서 돕다 보니 선생님이 예쁘게 봐주셨다고 했다. 공방을 병행하면서 빵집에 출근을 하고 있었다.

“이건 제가 만든 그릇이에요.”

“꽤 괜찮은데.”

진혁은 납작한 도마같이 생긴 그릇을 집어 들었다.

“오페라 같은 걸 내놓으면 괜찮겠어. 진영이 형하고 의논해야겠지만, 같은 걸로 여러 개 가지고 올 수 있나?”

“괜찮죠? 지금 만든 건 네 개 정도 있어요.”

“이번 라운드에서 각자 개인 접시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때 가져가서 쓸까 싶은데. 네 개 다 줄 수 있어?”

“진짜로요?! 우와!”

김가영이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가격을 얘기해 봐.”

“가격이라뇨! 제가 조공으로 바칠게요.”

“고려시대 원나라 사신도 아니고 조공은 무슨 조공이야?”

“임 쉐프님 제1호 팬으로서 꼭! 바치고 싶어요.”

그녀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TV 촬영하고 난 다음에는 쓰실 일 없잖아요? 어차피 잠깐 빌려드리는 건데, 돈을 받을 수는 없지요.”

“음, 계속 쓸 수도 있어. 가게에서 데코레이션 용으로 쓰게.”

“어…… 그런 거면.”

김가영이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했다.

“재료값만 주세요. 개당 이천 원.”

“그 가격은 말이 안 되는데? 내가 알아서 챙긴다.”

진혁이 지갑을 꺼냈다.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물건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런 경우에 직장의 상하관계이니만큼 더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6개쯤 있었으면 좋겠는데, 비슷한 거 두 개는 더 없지?”

“사실 여섯 개 만들었는데 굽다가 깨지는 바람에…….”

김가영이 머쓱해하며 웃었다. 그녀가 물었다.

“어제 오르골 케이크는 어떻게 됐어요? 음악이 나오는 케이크라니, 반전이 있어서 애가 좋아했을 것 같은데.”

그녀가 재잘거리며 떠들었다.

“제 조카라면 슈퍼히어로 케이크 같은 걸 더 좋아하는데.”

“내가 케이크 받을 사람이 초등학생이라는 얘기를 했었어?”

진혁이 물었다. 김가영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 아니요.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으셨는데, 사탕 인형 조형을 워낙 잘하셔서요. 딱 보면 팔 길이나 앳된 얼굴이 초등학생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진혁이 수긍했다.

“오르골 값은 따로 챙겨주지, 덕분에 아주 좋아하셨다.”

“다행이에요!”

“원래 이야기했던 돈보다 열 배쯤 더 주셨거든.”

진혁은 따로 미리 준비했던 봉투를 챙겨 주었다.

“다음에는 도자기로 비녀 같은 걸 부탁하고 싶은데.”

“비녀요?”

“응, 케이크하고 같이 구울 거야.”

“비녀로 도대체 뭘 하시려고요……? 어떤 모양을 생각하고 계신데요?”

“이렇게 생겼는데.”

슥슥 그림을 그려주자 가영이 혀를 내둘렀다.

“이건 너무 정교한데요? 선생님한테 부탁해야겠어요. 그보다 이렇게 확실하게 컨셉이 잡혀 있는 거면, 임 쉐프님이 직접 오셔서 만드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외부인을 공방에 들인다고?”

격세지감이 느껴져 진혁이 반문했다. 그가 방문했던 공방은 사천 당문의 암기를 제작하는 당가공방밖에 없었다. 원래 당문 문주의 초청을 받아서 외부 당가타에 있는 공간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밤에 몰래 담을 넘어 비밀 공방을 구경하러 간 것이다. 암기를 만드는 사람을 좀 빼돌릴 계획이었는데, 독하디 독한 당가 놈들은 손발톱을 뽑고 꿰매버린다고 해도 말을 안 들었다. 섭혼술을 써서 머리를 비우면 암기 제작처럼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곤란했다. 김가영은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요즘 성인 체험도 많이 오는 걸요, 뭐. 저도 체험하다가 아예 발 들인 케이스인데. 쉐프님 오신다고 하면 선생님한테 물어보고 따로 체험 날짜를 잡을게요.”

“나중에. 지금은 바빠서.”

곧 서창덕과 이예은이 나왔다. 순서로는 세 번째였지만 나이로는 막내인 이예은이 싹싹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임 쉐프님, 김가영 선배님!”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백진영의 뒤에 이어서 들어선 유키코는 심란한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제일 늦다니……. 정식 출근 시간인 6시보다 30분 일찍 왔는데. 다들 도대체 언제 오시는 거예요?”

백진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유키코 쉐프님이 오시니까 든든하네요.”

“다음부턴 저도 조금 더 일찍 올게요.”

“저는 개인적으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온 겁니다. 일찍 오실 필요 없어요.”

진혁이 설명했다.

“이제 이틀 후면 다음 라운드가 시작되니까, 연습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실력에 매일같이, 늦게까지 일하면서 새벽에 연습까지 한다고요? 어제 피아노 케이크도 그런 연습의 결과였어요?”

유키코가 눈을 깜빡였다.

“그런 셈이죠.”

“그런…….”

유키코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하지 못하며 망설였다. 백진영이 말했다.

“유키코 씨도 개인 연습할 공간이 필요하시죠?”

“나마무라에 있을 때는 회사의 개발팀 주방에서 했어요. 하지만 여기서 그런 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요.”

“진혁이가 개인 연습하는 시간에는 저도 일부러 시간을 비워 주긴 해요. 두 사람이 라이벌인데 같은 주방에서 같은 시간에 연습할 수는 없고.”

백진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에 화웅 베이커리로 쓰던 곳 주방이 있어요. 화재 때문에 식당 쪽은 무너졌지만, 주방 쪽은 남아 있거든요. 시설은 아마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유키코 씨가 연습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제가 알아볼게요.”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유키코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 여기에서 일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큰 은혜에요.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진혁이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오픈 준비를 시작할까요?”

“알겠습니다!”

유키코가 함께하는, H & J 카페 앤 베이커리의 첫 평일 영업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굳게 다짐하며 가게 문을 열었다.

‘은인에게 도움이 되도록 실력을 보여줘야 해.’

◈          ◈          ◈

퇴근 후, 김가영은 스마트폰을 사용해 비공개 회원제 웹사이트에 로그인했다.

[진바라기의 17번째 회원님께서 로그인하셨습니다.]

임진혁이 텔레비전 방송에 나가기 전부터 존재했던 비공개 회원제 웹사이트였다. 본래 팔십여 명의 카페 손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가족 같은 분위기의 소규모 팬클럽이었다. 하지만 라운드 1이 방영되고 나서 회원 수가 천 명에 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라운드 2가 방영되고 나서는 기하급수적으로 팬이 늘어 지금은 벌써 1만 5천 명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17번째라고 하면, 꽤나 이른 순번이었다.

[Kim88 : 오늘부터 H & J 카페 앤 베이커리에 유키코 김 쉐프님이 합류했어요!]

[Sook : 아까 가게에서 보고 왔어요. 오픈 키친이 너무 좁던데. 둘이 가까이 서 있는 것 보고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애도 있는 여자가, 우리 임 쉐프님한테 꼬리치려는 거 아니에요?]

[Spam71 : 임 쉐프한테는 별다른 생각 없어 보이던데??]

[Sook : 쉐프님한테 사심이 없을 수가 없어. 남신하고 그 거리에서 일하는데 어떻게 별다른 생각이 없겠냐고. 얼굴만 잘생긴 것도 아니고 실력도 엄청난데. 이번에 우리 아들한테 피아노 케이크를 만들어 주셨는데 너무 멋져요. 저번에 말했다시피 초등학생인데, 임 쉐프님 작품에 반해서 피아니스트 때려치우고 파티셰 하고 싶다고 난리라니깐요. ]

김가영이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채팅방에 타자를 쳤다. 직장 상사의 팬클럽 회원이라는 건 부끄러운 일이니까 직장에서는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손님 중 한 명인 정지숙 님, Sook 회원님과 팬클럽 활동을 함께 하면서 친해졌고, 아들이 초등학생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까 진혁 쉐프님에게 말실수해서 들킬 뻔했어. 사실 지숙님 아들한테 케이크 주는 걸 다 알고 있었는데 모르는 척하느라 어색했지.’

[Kim88 : 임 쉐프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일만 하느라 정신없으시던데요. 임 쉐프님 아니고, 바리스타님이 한눈에 반한 거 같아요. 처음 봤는데 작업실을 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뭔가 해주고 싶어 하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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