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화
38장
두툼한 흰 봉투를 앞으로 내밀고서 유키코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진혁의 안력은 그 흰 봉투 안에 얼마가 들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180만원.’
그녀가 오늘 받은 돈 중 90%였다.
“이번에 불쾌한 신문사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죠. 정정 보도를 원하신다면 추가 금액이…….”
유키코는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비굴하거나 한 태도가 아니었다.
“아니에요.”
그런 여유도 없을 것이다.
‘10%는 보육원 비니까. 멍청하게 전재산을 여기에 처바르고 있군.’
흥신소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 임진혁 역시 마주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흥신소에 부탁할 게 있는데, 먼저 나가서 기다리시겠어요? 유키코 씨.”
“나가서 기다릴게요, 이 앞의 커피숍에 가 있을 테니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유키코는 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먼저 나갔다. 자리에 서 있던 남자가 만면에 희색을 띄고서 말했다.
“저희가 일은 참 잘합니다.”
진혁은 잠시 입을 다물고 맞은편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잘하든지.”
“뭐, 뭣?!”
소장이 발끈하면서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어디서 감히,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어른에게 그딴 소리를 해!”
그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책상을 탕 하고 치며 몸을 낮추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책상 위의 낡은 명패에는 ‘소장 이상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먼지가 켜켜이 앉은 오래된 명패를 힐끗 보고서 진혁이 물었다.
“소장 이상용.”
이상용은 다짜고짜 반말 짓거리부터 해대는 것을 보니 눈앞의 애송이는 주먹에는 꽤 자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주먹부터 휘두르면 좋지. 내가 한 대 맞아주고 바로 정당방위 먹여 버린다.’
사무실에는 일반인들은 눈치 채지 못하게 화분 뒤에 CCTV가 돌아가고 있었다. 음성은 녹음되지 않기 때문에, 말은 험하게 내뱉어도 됐다. 이상용이 으르렁거렸다.
“너 이 새끼, 같은 놈은 내가 바로 담가버려도 돼. 아무도 모른다고.”
이상용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일본 X한테 사기를 치고 있는 걸 들켰으면, 아예 경찰을 데리고 왔을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르면서 일단 블러핑을 치고 있는 게 분명해.’
소장 이상용. 나이는 49살, 작은 흥신소를 개업해서 19년째 운영하고 있다. 내년이면 흥신소를 운영한지 스무 해가 된다. 여태까지 흥신소를 운영하면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은 특별히 그가 솜씨가 좋아서만은 아니다. 탈이 날만한 일은 미리 낌새를 채고 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좋은 눈치가 그를 배신했다.
쿵.
갑자기 세상이 새까맣게 물들며 어디선가 비릿한 철 냄새가 났다.
“아아아아아악……!”
뒤늦은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이상용을 세차게 때렸다. 그는 양손으로 코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커흑, 흑.”
전혀 아프지 않았다가 다음 순간에 엄청난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이상용의 뇌리에 며칠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보았던 다큐멘터리가 스쳐지나갔다.
[통증은 단순히 불편하고 아픈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체의 1순위 경보 체계로서 기능한다. 뜨거운 것을 느껴야 화상을 입기 전에 피하고, 바늘 끝이 따끔한 것을 느껴야 바늘이 피부 속에 끝까지 파고들어가기 전에 빼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 몸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다가오면 방어기전의 일종으로 순간적으로 신경계를 차단시켜 버린다. 그래서 정말로 아픈 것은-아예 아프지 않은 것이다. 신경까지 망가져 버리면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된다고.
“여, 여기.”
코뼈가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얼굴 정면에 맞은 정권이 너무나 아파서 지금도 양 눈까지 쓰라렸다. 이상용은 쏟아지는 코피를 옷소매로 감싸며, 부러진 이빨을 퉤 하고 뱉어냈다. 그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단 한 가지의 수호신에 매달렸다.
“C, CCTV, 있어.”
입안에 다시 피가 고이며 눈앞이 아찔했다. 주먹부터 휘두르는 걸 보면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얼굴도 보여준 것으로 봐서는 살려둘 생각이 없을지도 몰랐다. 이상용이 신음소리처럼 짜내는 소리를 들은 진혁이 싱긋 웃었다.
“이거 말이야?”
화분 뒤에 숨어 있던 CCTV 렌즈는 너무나 손쉽게 딸려 나왔다. 렌즈 탐지기를 가동한 낌새도 없었는데 언제 찾아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 너, 프.”
‘프로 청부꾼이구나. 잘못 건드렸어.’
지금 이 남자는 진짜였다. 어린 애송이 따위라면 지금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못한다.
‘죽을지도 모른다.’
이상용이 용서를 구걸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남자가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
손가락에서부터 차가운 것이 머릿속을 마비시키는 것처럼 흘러들어왔다.
“!?”
“지금부터 질문하는 것에 사실대로 대답해 봐.”
맡겨놓은 대답을 꺼내는 양, 남자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네 이름은 뭐지?”
“……이헌용.”
중년 남자-이상용을 자칭하고 있던 이헌용은 턱이 빠질 정도로 놀랐다. 이상용이라는 이름으로 사무소를 개업하고 본명을 잊고 산 지도 어언 19년이었다.
“가명이라.”
남자의 눈이 점점 더 깊어졌다. 지옥처럼 깊은 그 눈을 마주보며 이헌용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물어보는 것에만 대답해.”
갑자기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훨씬 크게 느껴졌다. 사내의 눈이 붉은 빛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헌용은 남자가 묻는 모든 것에 술술 대답했다.
“유키코는 좋은 봉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돈을 갖다 줍니다.”
버튼을 누르면 답을 뱉어내는 장난감 기계처럼 그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예, 실제로 사람들을 조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런 봉들은 적당히 한 번씩 조사하는 척하는 것만으로도 돈을 주니까 진짜로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듣고 난 진혁이 씩 웃었다.
“그럼 이제 제대로 조사를 해보라고.”
“예, 예, 물론입죠! 선생님! 그대로 하겠습니다!”
이헌용은 진심을 다해 외쳤다. 어머니 장례식 이후에 절실하게 무언가를 빌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몇 번이고 하겠다고 외쳤다.
“꼭, 꼭 찾아내겠습니다!”
“그 말대로 하지 못하면 후회하게 될 거다.”
남자가 나간 지도 한참이 지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 진짜 갔나?”
어느새 코에서 흐르는 피는 멈추었다. 이헌용은 바닥에 피가 묻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니 얼굴은 피 한 방울 흘린 데 없이 멀쩡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니, 설마.”
그는 화분에 숨겨둔 CCTV를 확인했다. CCTV의 렌즈는 깔끔한 솜씨로 파괴되어 있었다.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것이다.
“이, 이럴 때가 아니야.”
그는 다급하게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씨! 김씨, 나야. 그 일본 유학생 찾는 건, 그거 지금 바로 착수해 줘야겠어. 아니, 내일이 아니야! 당장 해야 한다고!”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크게 외쳤다.
“내가 사무소 닫고 바로 그리로 갈 테니까 뛰쳐나와!”
◈ ◈ ◈
“처음 뵙겠습니다, 랑비에 씨.”
유키코가 뺨을 붉히며 인사했다. 좋아하는 가수를 만나는 것처럼 설레어하는 태도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통역을 맡은 정지숙입니다.”
정지숙은 유키코를 반겼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봤어요, 유키코 쉐프님.”
“오늘도 통역으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지숙 씨.”
진혁이 고개를 숙이자 정지숙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도 좋아서 하는 건데. 그리고 그냥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부탁하신 바게트하고 케이크는 여기에 있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랑비에 씨를 위한 바게트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그 밀가루를 사용했습니까?”
“예.”
진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쪽 절반은 유키코 쉐프님이 만드신 바게트입니다. 이것도 만족해하실 겁니다.”
랑비에가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며 영어로 말했다.
[나마무라 베이커리의 유키코 팀장님 아니십니까?]
[지금은 H & J 베이커리 앤 카페로 이직했습니다.]
[오! 그러셨군요. 임 쉐프와 팀이군요.]
차갑게 굴던 랑비에가 누그러지며 말했다.
[나마무라 베이커리와는 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괜히 이렇게 아름다우신 쉐프님을 오해할 뻔 했군요.]
[……사실 저하고도 일이 좀 있는 회사입니다.]
랑비에와 유키코가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지숙은 방금 받은 케이크 상자를 풀어보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드시려고요?”
진혁이 놀리는 듯 이야기하자 정지숙이 뺨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만드셨는지 너무 궁금해서요. ……어머나!”
붉은 벨벳 양탄자가 덮인 원형 케이크 위에는 검은색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88개의 검고 흰 건반이 정교하게 도드라진 그 위에는,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양복을 입고 금방이라도 피아노를 두드릴 듯 몸을 곧추세우고 있다. 크게 뜬 눈과 흥분한 얼굴, 미소 지은 입술과 약간 비뚤어진 귀, 거기에 헝클어진 곱슬머리까지 세밀하게 재현해냈다.
“어쩜 좋아, 우리 동현이랑 똑같아요.”
“슈가크래프트, 아니, 설탕 공예로 만든 거라서 드실 수 있습니다.”
진혁이 웃으며 설명했다.
“임 쉐프님! 이걸 어떻게 먹어요.”
정지숙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너무, 너무 예뻐요. 동현이 13살 생일 파티에서 메인 케이크로 쓰기에 딱 좋아요.”
“아드님이 피아노를 치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이번에 주니어 콩쿠르에서 금상을 탔거든요. 제가 예술을 하다 보니 이 바닥이 힘든 걸 알아서, 아들은 아버지 따라서 사업을 했으면 했는데.”
정지숙은 양손으로 뺨을 가리고선 기쁨에 취해 말했다.
“제가 드린 건 그냥 피아노 치는 사진 한 장인데, 어쩌면 이렇게 살아 있는 것 같이.”
“그렇습니까.”
“저희 가족사진을 겸해서 3D 프린터로 조형한 가족 조각이 있는데, 그것보다 더 생생해요. 살아 있는 것 같아.”
정지숙이 여러 차례 감탄하며 탄성을 내자,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랑비에와 유키코가 이쪽을 보았다. 두 사람 역시 가까이 다가와 케이크를 관찰했다. 랑비에가 빠른 프랑스어로 정지숙에게 물었다.
<믿을 수가 없군! 이건 미세스 정의 아들 아닙니까.>
<사진 한 장 드렸는데 이렇게 만들어 주셨어요.>
<이럴 수가. 나에게도 아내와 아이가 있습니다. 임 쉐프님이 내가 주문을 해도 받아줄까요?>
<사실 제가 주문한 게 아니라 호의로 해주신 거라서……. 제가 물어볼게요.>
유키코는 뚫어져라 케이크를 노려보았다.
“임 쉐프, 이거 언제 만드신 거예요?”
“어제 밤에……?”
실은 오늘 새벽에 만들어 굳혔지만, 진혁은 대강 둘러댔다. 슈가크래프트의 경우 굳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최소한 하루 전에 만들었다고 대답해야 했다.
“어제 빵을 그렇게나 많이 만들고, 퇴근한 게 아니라 남아서 이걸 만들었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