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화
37장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계약서에 서명한 유키코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웃으면서도 얼굴에 수심이 어려 있어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유키코가 먼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고서 백진영이 진혁에게 속삭였다.
“저번에 뒷모습만 봤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은 했는데, 엄청나게 미인이시다.”
“흠.”
“옛날 중국에 찌푸려도 예쁜 여자 이야기 있지 않았어? 미인이 찌푸리고 돌아다니니까 전국 여자들이 다 찡그리고 다녔다고.”
“정확히는 효빈(效嚬)이라는 고사야. 장자(莊子)에 언급되어 있지.”
“너, 중국 고전도 잘 알아? 대체 모르는 게 뭐냐?”
백진영이 감탄하며 물었다. 진혁은 서시에 대한 고사를 떠올렸다.
‘마음의 병이 있는 서시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추녀가 그렇게 하면 미인이 될 줄 알고 얼굴을 찡그렸다고 하던가.’
서시를 모방해 얼굴을 찡그린 추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대로를 돌아다녔다. 그 모습이 매우 흉해 부자들은 문을 닫아걸고 빗장을 질렀으며 가난한 자들은 처자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은 원래 그것이 아니긴 하지만, 옛날에도 외모지상주의는 만만치 않았다는 증거지.’
“상식이잖아.”
“그 이야기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장자에 나온다는 건 진짜 금시초문이다.”
백진영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여하튼 보통은 웃는 얼굴이 예쁜데 찡그린 얼굴도 예쁘다는 건 정말 미인이라는 거니까. 하지만 가게 입장에선 안 좋을 수도 있어.”
“왜?”
“아무리 미인이라도 찡그린 얼굴로 빵을 만들고 있으면 곤란하지. 우리는 100퍼센트 오픈 키친인데, 주방에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돌아다니면 손님들이 가게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건 실제로 주방에서 작업하는 걸 보면서 얘기해보자고.”
진혁이 말했다.
“촬영할 때 찡그리고 돌아다니지는 않았거든. 성인인데 표정관리 정도야 할 수 있겠지.”
“웃으면 더 미인일 텐데.”
백진영이 유키코의 얼굴 타령을 하는 것을 보며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케이크를 만드는 데 면상이 무슨 소용이라고.’
관심 없이 어깨를 으쓱한 진혁에게 백진영이 속삭였다.
“여태까지는 너 때문에 여자 손님이 압도적으로 많았잖아. 유키코 씨가 오면 이제 남자 손님들이 늘어날 걸?”
백진영이 눈을 빛냈다.
“이정도면 사촌 형하고 누나한테 한 방 먹여줄 수 있지.”
“뭐, 내기라도 했어?”
평소에 백정흠의 친자식인 사촌들 이야기가 나오면 비루먹은 말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화제를 돌리던 백진영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임진혁이 관심을 보이자 백진영이 고개를 저으며 소년처럼 웃었다.
“아직은 비밀이야. 결정 나면 얘기해줄게.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그래.”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유키코의 테이스팅 테스트는 촬영 사흘 전에 이루어졌다.
“이미 취업이 확정됐다고 생각했는데, 테이스팅 테스트는 왜 하는 거예요?”
“지금 판매하는 빵을 어느 속도로 만들 수 있는지 파악해서, 실제로 오픈 키친에 섰을 때 무엇을 얼마나 만들지 미리 상의해야 하니까요.”
“그렇네요.”
그녀는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았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친절하고 상냥해요. 아이도 좋아하고요. 먼젓번 보육원에서 옮기기 싫다고 떼쓰고 울어서 걱정했는데 막상 옮기니까 새 친구들이 있다며 잔뜩 신이 났어요.”
“그럼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부터 시작해보죠.”
진혁이 레시피를 내밀었다. 그 레시피는 한두 장이 아니었다. 총 여섯 장의 레시피를 보고서 유키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오늘 오후에는 조금 일찍 가도 괜찮을까요?”
“원래 오후에는 랑비에 씨의 회사에 밀가루를 보러 갈 예정이었습니다만. 같이 가셔서 주로 쓰시는 밀가루를 보고 고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랑비에 씨요? 젤로스사 한국 지부장 말씀이세요?”
유키코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분은 사적인 접대는 절대로 받지 않는 걸로 유명한데.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도 랑비에 씨는 바이어를 직접 상대하지 않아서, 그 아래 직원들만 만났다고요.”
‘그렇게 콧대 높은 아저씨였어?’
진혁이 기억하는 랑비에는 한국어가 유창하고 배가 튀어나온, 평범한 중년 아저씨였다.
“서래마을에서 했던 페스티벌에 오셨어요. 가게 단골 고객 분에게 소개를 받았죠.”
“아니, 그런 자리면 당연히 가야 되는데…….”
유키코가 발을 동동 굴렀다.
“실은 오늘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어서요.”
“위치가 어딘데요?”
“광장시장 근처에요.”
진혁이 결정을 내렸다.
“랑비에 씨를 만나기로 한 곳도 그 근처니까, 30분 이내로 처리하실 수 있는 일이면 거기에 같이 들러도 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미소를 지은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이건 대단한데요? 직접 개발하신 레시피라고 하셨죠.”
유키코는 진혁이 만든 레시피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치즈 세 가지를 다르게 써서 맛을 낸 거군요.”
하지만 유키코가 여유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다른 레시피들을 받으면서 점점 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몽블랑, 밀푀유, 오페라, 치킨 파이, 베이컨 파이, 블랙 어니언 타르트,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 거기에 그린워터 샌드위치 5종?”
입을 딱 벌리고서 그녀가 물었다.
“이걸 전부 진혁 씨 혼자 만들어왔다고요? 그 시간 동안에?”
“예. 어제 오후에 숙성시켜서 오늘 새벽에 구웠죠.”
진혁이 대답하자 유키코가 백진영을 노려보았다.
“진혁 씨가 사회초년생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착취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예?”
백진영이 억울하다는 듯이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이놈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걱정인데요.”
“이노옴이라고요오?”
유키코가 말꼬리를 높이자, 백진영이 진심어린 눈으로 두 손을 모아 쥐며 고개를 저었다.
“일을 줄이라고 해도 자기가 알아서 계속 만들어오는 쉐프님이십니다. 지금 메뉴를 추가하겠다고 날뛰는 것도 임진혁 쉐프님이고요.”
“레시피는 디테일하지만 숙련된 쉐프라면 실제로 구워내는 데에 시간은 덜 걸릴 수도 있겠죠……. 제가 작업을 해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레시피를 보고 재료를 찾기 시작했다.
“밀가루는 여기에 있을 테고. 이 달걀 제가 써도 될까요?”
“예, 그리고 버터는 이쪽에 있습니다.”
“전부 소농장 출신 제품을 쓰시네요? 설마 이거 다 유기농이에요……?”
낯익은 녹색 농부 조합의 버터와 우유, 달걀 등을 확인한 유키코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완제품 유기가공식품 인증이잖아. 이 케이크와 과자류 전부 인증을 받았다고?’
「친환경농어업 육성 및 유기 식품 등의 관리·지원에 관한 법률」 제60조에 따르면 판매 중인 완제품을 기준으로 유기가공식품 인증을 취득하여야 한다.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유기농 케이크라고 해서 바로 유기농이라고 메뉴에 표기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대기업은 완제품에도 유기농 인증을 받아서 표시했다. 하지만 일일이 매 제품마다 유기농 인증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모든 재료를 유기농으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세상에. 버터랑 우유를 비롯해서 꿀까지. 이거 전부 다…….”
좋은 재료를 써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마무라 베이커리 역시 프리미엄 유기농 베이커리 라인을 따로 내놓고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 유기농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의 제품만 유기농으로 사용했다. 그편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나마무라 베이커리는 오랜 기간 동안 영업해온 전국적인 상업 베이커리 체인인 만큼, 비용 절약에 민감하지.’
처음 H & J 카페 앤 베이커리에 들어섰을 때, 메뉴판의 모든 제과제빵류 제품에 유기농 인증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서 그녀는 조금 놀랐다.
‘소규모 가게까지 단속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이 유기농 재료를 조금 써서 만들었다고 멋대로 메뉴에 적어놓는 경우가 많아. 그리고 나중에 단속에 걸리면 몰랐다고 울면서 징징대지.’
소규모 사업자의 경우 법적으로 인정받는 유기농 완제품에 별도 등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돈을 내고 인증 받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일일이 완제품 인증을 받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냥 메뉴판에 유기농이라고 써놓고 단속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대단하군요.”
그녀는 짧게 감탄했다. 재료에 한눈이 팔린 것은 한순간, 유키코는 재료의 위치를 확인하고 계량을 시작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반죽을 하며 힘 있게 덩어리를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모양을 성형하는 것 역시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도 시판 제품만 보고 바로바로 똑같이 만들고 있었다.
“아, 이건 꼭지를 조금 더 세우는 편이 예쁘네요.”
혹 실수를 해도 바로 견본을 보면서 모양을 고쳤다. 진혁은 옆에서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일봉이나 아버지보다는 속도가 빨라. 그렇지만 내가 기대했던 속도보다는 느리다.’
그녀가 테이스팅 테스트를 완료하는 데에는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 원체 굽기로 한 양이 많았던 탓이다. 그리고 유키코가 빵을 굽는 동안 진혁이 놀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음날 팔 예정인 숙성 반죽들을 만들고 있었다.
‘뭐야, 임진혁 쉐프. 엄청나게 빨라……!’
쇼를 촬영하고 있을 때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단둘이서 좁은 주방에 서 있으니 남자의 동선이 명확하게 보였다. 한 번 움직이면서 두 가지, 세 가지를 동시에 했다.
‘팬에서 양파를 졸이면서 동시에 반죽을 하고, 양파가 타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 바로 페이스트리에 양파를 얹으면서 스탠드믹서에서 돌고 있는 머랭을 체크하고 있어.’
프로페셔널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누구나 두세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는 스킬을 익혔다. 그래야 시간이 절약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임진혁이 하는 것처럼 일곱 가지, 여덟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어?!’
힐끔힐끔 진혁을 살펴보면서도 그녀는 케이크를 구워내는 것을 다 마쳤다. 완벽한 모양의 크림슨 트리플 케이크만이 아니었다. 몽블랑과 밀푀유, 그리고 오페라 케이크를 구워낸 유키코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네 가지만도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가는데……. 베이컨 파이하고 치킨 파이는 도대체 어떻게 만드시는 거예요? 말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