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화
“네가 여기에 아는 사람이 다 있네. 신기하다.”
“형도 아는 사람일걸? 유키코 김 쉐프님이야.”
“에에엑?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어?”
“모르지. 방금 명함 줬어.”
“명함은 왜?”
얼떨떨해하며 눈을 깜빡거리는 백진영에게 진혁이 말했다.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사람 뽑고 있다고 했어.”
“나마무라 베이커리 신제품 개발팀 팀장을 일반 쉐프로 데려온다고?”
백진영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 생각했던 건 쉐프 견습생인데…….”
“일을 배워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장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 기본급을 낮게 잡고 매출에 따라서 인센티브를 주면 되지 않을까?”
“경력도 나이도 많은 여잔데 너보다 낮은 직급으로 들어오는 걸 괜찮아하겠어? 소문도 안 좋고.”
“소문?”
진혁이 물었다.
“미혼모라고 소문 다 났잖아.”
백진영이 스마트폰을 들어서 기사를 보여주었다.
“원래 나마무라 베이커리 팀장급인데 갑자기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니는 거 보면 뻔하지. 거기서 잘린 거야.”
진혁이 웃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실력만 있으면 되지.”
“……음.”
백진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냥 명함을 줬을 뿐이야.”
“그래. 어차피 네가 데리고 일할 사람이고…… 실력 면에서는 문제가 없으니까.”
백진영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가게 손님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오해?”
“우리 가게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잖아.”
진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영 형. 저 정도 쉐프가 우리 가게에 와줄 수도 있다면 나도 일을 맡기고 자리를 비울 수 있어. 그 미만은 역할을 못 하니까 뽑으나 마나고.”
“그건 저번에도 네가 했던 얘기니까…….”
진혁이 걸어가면서 말했다.
“금자는 이로 깨물어서 흠집이 나도 금자라고. 값이 깎이지 않아. 저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자기 가게를 차릴 수 있는데 지금 딱 보니까 그럴 상황이 안돼서 남의 밑에 있는 거잖아. 혼자 애를 데리고 있으니.”
백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말은 알겠는데…… 금자? 그건 뭐야?”
진혁이 손가락으로 모양을 만들어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옛날에 쓰던 돈 말이야. 금괴 같은 거.”
“무협지에서 금자, 은자 하는 그거 말이냐? 그 얘기는 갑자기 왜 나와.”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됐어. 고아원이나 가자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는 진혁의 뒤에서 백진영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다.
“알았어, 천천히 가! 너무 빠르다고!”
◈ ◈ ◈
유키코가 연락을 해온 것은 고아원에 다녀온 지 사흘이 지난 후였다.
“근로 조건이 궁금해요.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진혁이 전폭적으로 지지한 결과 백진영은 유키코를 고용하는 데에 동의했다. 그는 직장 내 보육시설과 기숙사 역시 제공할 수 있다고 했지만, 임진혁에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삼촌한테는 네가 직접 얘기해.”
“어렵지 않지.”
임진혁이 유키코의 고용 건에 관해서 이야기하자, 백정흠이 직접 채용 면접을 보겠다고 고집했다.
“실력이야 이미 알고 있고. 기본 빵 만드는 면접을 보려고 하는데……, 사장님은 대체 뭘 물어보려고요?”
“사장님은 무슨, 삼촌이라고 불러.”
백정흠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화웅 기숙사하고 화웅 보육원까지 위탁해서 쓸 수 있게 해 줬는데. 면접은 직접 봐야지. 기숙사에서 오가면서 우리 직원들하고 어울릴 거고, 그 애도 우리 직원 자녀들하고 어울릴 거 아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우리 회사에 들인다.”
“……알겠습니다.”
진혁은 백정흠이 말하는 이유에 납득했다. 보육시설과 기숙사를 지원해주는 것이 백정흠 입장에서 크게 배려해주는 거란 사실은 모르지 않았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진영이가 걱정하더라. 네가 이런 식으로 혼자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하다가 쓰러져 죽겠다고.”
“예에? 그럴 일은 없는데요.”
태연하게 말을 받아치는 임진혁을 보며 백정흠이 잘라 말했다.
“지금은 네가 젊어서 모르는 거야. 지금 그렇게 무리한 게 다 나이 들면 돌아와. 내가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쑤시는 게 그냥 쑤시는 게 아니라고. 다~아 젊었을 때 무리해서 그래.”
“…….”
진혁은 백 살이 넘었어도 허리가 쑤셔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쑤실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는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에 무어라 토를 달지 않고 침묵했다.
“네가 인정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쉐프를 구하기는 힘들다고 하니까, 이 여자를 데려오는 데 동의한 거야. 새 쉐프를 위해서 책정해놓은 인건비에 복지를 해주면 그냥 온다고 하니까. 하지만 보육시설이니 기숙사니 하면 회사에서 나가는 돈이 그렇게 적은 건 아니야. 세금 혜택을 받긴 하지만 원래 진영이가 생각했던 예산보다 한참 썼다고 불평하지 않디?”
“그렇긴 합니다만.”
“지금도 매출이 잘 나오고 있으니까 그 한 명이 와서 빵을 만들 수 있는 양이 늘어나면 더 좋기야 하겠지. 너도 쉴 수 있고.”
“예.”
“사람을 뽑기는 쉽지만 내보내기는 어려워. 그리고 실력이 좋다고 해서 꼭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인 건 아니잖나. 인성이 중요하지. 그러니 선발할 때 신중해야 해.”
“그거야 그렇죠.”
“거기에 외국인이라며. 한국어가 유창하다고는 해도 문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 어떤 사람인지 더 확실하게 알아봐야지.”
“알겠습니다.”
진혁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더라도 상관없이 실력으로 찍어눌러 말을 듣게 할 자신이 있었기에 인성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정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나름의 철학이 느껴져 고개를 끄덕였다.
‘중소기업을 몇십 년간 운영해와서 그런가.’
일월신교의 교인은 교인으로 태어나 교인으로 죽는다. 진혁이 저 부서로 가라 하면 저 부서로 가고 이 부서로 오라고 하면 이 부서로 온다. 그는 지금 이렇게 백진영이나 백정흠과 의견을 조율하는 것 자체를 신선하게 느꼈다.
‘무슨 말을 해도 예, 예 하는 것보다 훨씬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고 좋군.’
◈ ◈ ◈
하지만 진혁은 곧 후회하게 되었다.
“조금 개인적인 질문을 하겠는데. 결혼을 하지 않고서 아이를 낳은 이유가 뭔지 들을 수 있을까?”
그래서 유키코를 면접하는 자리에서 백정흠이 대뜸 질문을 꺼냈을 때, 임진혁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제 개인사는 상관없는 문제에요. 괜찮다고 생각하셔서 여기서 면접 제의를 하신 게 아닌가요?”
유키코는 표정 없이 말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들어왔을 불쾌한 질문에 그녀는 아무것도 내보여주지 않는 벽을 보였다. 백정흠이 인자하게 말했다.
“유키코 씨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우리는 유키코 씨한테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기숙사도, 보육원도 제공하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나?”
유키코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백정흠은 태연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우리가 유키코 씨 입장에 서서 유키코 씨를 도와주려면 알아야 한다는 거지. 인터뷰는 다 거절하고 있는 거로 알고 있지만, 우리 회사 직원이 된다면 우리 가족이 되는 거야.”
“…….”
유키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화웅의 직원은 아니죠. H&J 카페 앤 베이커리의 직원이니까.”
진혁이 선을 그었다.
“여기까지 감사했습니다. 유키코 씨, 면접은 끝났습니다. 잠시 나가서 기다려 주세요.”
“진혁아?”
유키코는 무표정하게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백정흠 사장이 말했다.
“왜 얘기를 못 한다는 거야?”
“저야 모르죠.”
진혁이 백정흠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진혁이 태산처럼 커 보여서 백정흠은 눈을 크게 떴다.
“어……?”
“방금 무례하셨습니다. 제가 제안한 면접 제안 자체를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셨죠.”
“어어…….”
“저는 저 여자의 개인사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그냥 일만 해주면 됩니다. 나가서 사과하시죠.”
이가 덜덜 떨리고 척추에는 소름이 쫙 끼친다. 백정흠이 갑자기 닥쳐온 오한과 추위에 몸을 움츠리자 진혁이 차분하게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조금 위엄있는 모습만 보일 생각이었는데.’
진혁이 생각하는 것보다 현대인들은 더 연약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이마를 짚는 백정흠의 등에 손을 짚었다.
“자, 자. 백 사장님. 정신 차리시죠.”
“으으…… 으.”
눈을 뜬 백정흠이 힘겹게 말했다.
“사람들 생각이 그게 아니라니까. 괜히 너를 오해할 수도 있어.”
“뭔 생각을 하건 상관없게 빵만 맛있게 만들면 된다니까요.”
온몸을 감싸고 있던 추위가 점차 사라진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마음도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백정흠이 말했다.
“뭐, 그 정도로 네 빵이 맛있긴 하지.”
진혁이 웃었다.
“그럼 채용하는 겁니다.”
“진영이한테 전해. 기본급은 지금대로 가고 매출에 따라서 인센티브를 주는 조건으로 가라고.”
백정흠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 임진혁은 바로 건물을 나섰다. 하지만 문앞에 유키코는 없었다.
“흠.”
그녀는 이미 건물 바깥으로 나가고 없었다. 진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8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면 바로 쫓아갈 수 있을 테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동네라면 더욱더 그렇다.
‘번거롭게, 쯧.’
그는 빠르게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진혁이 천마강림보를 사용해 비상계단을 소리 없이 내려가는 것은 엘리베이터보다 더 빨랐다.
“유키코 쉐프님!”
“임진혁 쉐프님.”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에 어린 눈물을 찍어냈다. 유키코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채용할 생각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편했을 텐데요.”
“조금 전에는 미안합니다.”
진혁이 유키코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만나보신 분은 자금을 출자하신 투자자로, 저희 회사하고는 간접적인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요?”
“유키코 씨가 괜찮으시다면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당신은 안 물어보나요?”
“뭘요?”
“애 아빠는 어떻게 됐다던가, 그런 거요.”
“말했다시피 개인사는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요. 관심도 없습니다.”
유키코가 피식 웃었다. 정말로 관심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애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궁금해요. 한국으로 돌아간 후 연락을 준다고 하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거든요.”
“책임감 없는 놈이군요.”
“그렇게 생각되죠?”
유키코는 코를 풀고서 손수건을 접었다. 그녀가 눈물 어린 눈으로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찾고 있는 거예요.”
그녀가 단언했다.
“재민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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