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화
진혁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남는 빵이 없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 말고 다른 데서 빵 받고 싶다고, 목록에서 빼 달라고 하더라.”
백진영이 서류를 넘겨 보여주었다.
“이미 우리한테 서류상으로 빵을 받고 있는 중이라서, 다른 데 또 신청하기가 애매한가 봐.”
“우리가 빵을 팔다가 남을 수도 있…… 지 않군.”
“절대 안 남지.”
백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저기 잠깐 들러서 사과하는 말이라도 직접 하고 싶은데 시간이 안 돼서 안타까워. 기부금 조로 아예 빵을 따로 챙겨줄까도 싶었는데 우리가 지금 그 정도 여력이 없잖냐.”
“금전적으로는 여유가 있지만…… 빵을 더 만들 여유는 없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공을 선보인다면 더 많은 빵을 만들 수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기부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형은 지금 매일 근무만으로도 녹초가 되어 있잖아. 그런데 고아원까지 가서 사과를 한다고? 어차피 우리가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닌데. 거기까지 가게?”
고아원은 강남 근처에 있지 않았다. 차로 운전해서 50분 가까이 가야 하는 경기도의 구석진 도시에 있었다.
‘처음부터 빵을 왜 저렇게 멀리까지 갖다 주나 싶긴 했는데.’
빵집에서 남는 빵을 주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빵집에서도 같은 소망시에 있는 동네 고아원에 갖다주지, 이렇게 먼 곳에 갖다주지는 않는다.
“음, 그게.”
백진영이 머쓱하게 말했다.
“나하고 좀 인연이 있는 곳이야.”
“인연?”
“삼촌이 나를 찾아오기 전에 내가 잠깐 맡겨졌던 데거든. 솔직히 좋은 기억은 아닌데, 그래도 거기 원장 수녀님이 잘 대해주셨던 기억은 있으니까. 한 번이라도 빵 좀 갖다 주고 그러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구나.’
진혁이 백진영을 바라보았다. 임진혁의 기준에서 백진영은 금수저에 속했다. 부자인 삼촌 아래에서 어려움 없이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삼촌이 내준 가게 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다리를 조금 절고 있지만 인생 사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정파에서 그늘 없이 자란 젊은 녀석들은 보통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오만하기 그지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진영은 배려심이 깊고 주변 사람들을 잘 살폈다. 진혁은 백진영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자랐는지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백정흠이 친아들처럼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뿐이다.
‘고아원이라.‘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퇴근하고, 내가 따로 빵을 만들어 줄 테니까.”
“그건 안 돼.”
백진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기 애들이 네 빵을 먹게 되면 입맛 버려. 내가 메이커 제품으로 삼백 개 정도 사서 갈 거야.”
“입맛을 버린다고?”
“너무 맛있는 거 먹어서 입이 고급이 되면 살기 힘들어.”
“음.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진혁이 피식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진혁이 남아서 초과 근무를 하며 빵을 만들지 말라고 배려하는 것임을 안다.
“같이 가고 싶으면 같이 가든가. 내가 운전해서 다녀올 거니까 금방 갔다 올 거야.”
진혁은 백진영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피곤해 보인다. 내일 일하고 나면 더 피곤해 보일 것이다.
‘딱히 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하루 정도라면 상관없지.’
백진영이 혼자 고아원에 갔다가 지쳐 쓰러지면 곤란하다. 다른 네 직원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음료를 훌륭하게 만들 수 있지만 특제 커피를 내릴 수 있는 것은 백진영밖에 없다. 진혁 역시 백진영에게서 음료 만드는 기술을 일부 배웠다. 하지만 그는 빵을 만들면서 동시에 음료를 만들 수는 없었다.
‘이형환위를 써서 빵과 음료를 동시에 만들 수는 없으니.’
진혁이 사용하는 이형환위는 극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기술로, 움직이고 난 후에 잔영이 남아 마치 진혁이 여러 사람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술쇼라도 한다면 모를까, 일반인들 앞에서 쓸만한 기술은 아니다.
“알았어, 같이 가자.”
“고마워, 너밖에 없다.”
백진영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저녁.
유키코는 집을 나서서 아이를 맡겼다.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손수 쓴 이력서를 챙겨 서울까지 올라왔다. 이전에 스카우트 제안을 했던 회사를 두 군데 방문했지만, 둘 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미혼모라는 소문은 이미 그곳까지 전부 퍼져 있었다. 그녀는 재외동포이기 때문에 다른 외국인처럼 취업비자를 받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당장 월급이 없으면 먹고 살 수 없다.
유키코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출연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그녀가 이 낯선 땅에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유키코는 불안을 감싸고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어깨가 무거웠다.
“어서 오세요.”
보육교사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었다. 남들이 다 돌아가는 늦은 시간까지 아이를 봐준 탓이다.
“퇴근하셔야 하는데 저 때문에 늦게까지 있으시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가톨릭계 비영리법인에서 설립한 보육원은 가격이 저렴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곳이었다. 기적적으로 빈자리가 있어 유키코는 이곳에 아들을 맡길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꼭 7시엔 오셔야 해요.”
“죄송합니다.”
유키코는 아들을 받아들었다. 이제 세 살이 된 아들은 기다리다 지쳐 울면서 잠들었는지 눈가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아들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보육교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선호가 엄마를 오래 기다렸어요.”
“예.”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멋지시던데요?”
“앗…… 보셨어요? 부끄럽게.”
유키코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보육교사가 말했다.
“저도 좋아하는 쇼예요. 디저트 서바이벌 쇼, 그거 최종 라운드까지 가면 가족들이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나요?”
“하지만 선호를 부르지는 않으려고요.”
“그래요.”
보육교사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신문기사를 보았겠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길거리를 걸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힐끔 보는 것처럼 느꼈다. 그 시선은 그녀를 평가하고 재단하여 얇게 썰어버리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재민 씨를 찾아야 하는데.’
그녀는 대학교에서 유학생이었던 선호의 아버지를 만났다. 1년간 연애하다가 그가 그녀가 살던 자취방으로 이사 와서 같이 살았다. 졸업하면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크게 기뻐했다. 그는 결혼해서 일본에서 살자고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국제 전화는 받지 않았고, 메신저는 없어져 버렸다. 그녀는 임신 9개월의 몸을 이끌고 재민이 산다던 옛 주소로 찾아갔지만 가족들은 이미 이사하고 없었다.
원래 한국인 사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부모님은 크게 화를 냈다. 그가 유키코를 속인 것이 분명하다며 낙태를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아이를 낳았다. 유키코가 절대로 싫다고 거절하자 아예 아이를 동생으로 입적시키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권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자신의 적에 올렸다.
‘재민 씨의 마음이 변했을 리가 없어.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한국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업체에 취업하여 한국에 건너왔다. 속상해하는 부모와 연을 끊다시피 하고 벌써 5년이 넘게 지났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자친구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어가 유창해지고 그녀는 일본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계 프랜차이즈 제빵 회사로 취업하였다. 더 많은 연봉 때문이었다. 혼자 아이를 양육하면서 가진 저금을 다 써버렸다. 그녀는 텔레비전에 나오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금을 받아서 흥신소에 부탁하는 거야.’
한국의 흥신소라는 곳은 죽은 사람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착수금으로만 오백만 원을 불렀다.
‘이게 마지막이야.’
아이 아버지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끝내 찾지를 못했다. 아이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힘겨웠다. 사장의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쇼에 등장하기로 승낙한 것은 재민이 자신을 보고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3회차 방영이 끝나고서도 재민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제는 상금만이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돈이 있으면 선호에게 아빠를 찾아줄 수 있어.’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면, 찾고 있다면 벌써 돌아왔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찾아야 한다는 이 사실은 이제 집착과 아집이 되어 더 이상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의 마음이 변했다면? 그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면? 이미 결혼했다면? 수많은 의문들이 고통이 되어 유키코를 괴롭혔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렇게, 그를 꼭 빼닮은 선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호’라는 이름조차 그가 지어준 것이다.
“선호야, 엄마 왔어.”
“응!”
아이가 일본어를 해서 보육원에서 따돌림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녀는 아이에게 한국어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한쪽 손에는 서류를 받는 것조차 거절당한 이력서 봉투를 안고, 다른 팔에는 아이를 안았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밤은 춥다. 그녀는 아이를 꼬옥 껴안으며 앞으로 걸었다. 주차장을 지나면 곧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앗.”
맞은편에서 자동차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자동차가 다가오면서 바람에 휘날려 이력서가 든 봉투가 날아갔다. 그녀는 황급히 봉투를 쫓아갔다.
“어머나!”
멈춘 차에서 내린 것은 임진혁과 백진영이었다. 백진영이 다리를 절면서 절뚝절뚝 다가가 서류를 주웠다.
“형, 내가 주울게.”
온종일 일해 피곤해하는 백진영이 느린 걸음으로 서류를 한 장씩 줍는 것을 보다 못한 임진혁이 다가가 대신 종이를 주웠다. 사진이 붙어 있는 서류는 이력서로 보였다.
“여기 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서류를 받아든 여자는 임진혁이 아는 얼굴이었다. 임진혁은 서류를 한 번 내려다보고 여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가 물었다.
“지금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아? 예? 예.”
유키코 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아이를 숨기려는 듯이 꼭 끌어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임진혁이 흔쾌히 결정을 내렸다.
“H&J 카페 앤 베이커리에서 쉐프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예에?”
그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무어라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서 굳어버린 그녀에게 진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관심이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진혁은 가게 명함을 내밀었다. 유키코는 당혹해 하며 명함을 받아들고서,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여자가 가버린 후에 백진영이 느릿느릿 절룩거리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