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화
일봉이 웃으며 말했다.
“반년인가? 요즘 애들은 빨리 자라는 것 같다. 키도 컸고, 얼굴도 몰라보게 좋아졌어.”
임운정을 빤히 바라보던 일봉이 말했다.
“큰 사장님하고 사모님 피부가 더 좋은 거 아시죠? 두 분 진짜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알려달라고요.”
“그냥 밥 먹고 일하고. 진혁이가 알려준 기체조하고. 다른 게 없는데?”
일봉이 킥킥 웃었다.
“농담이에요. 진짜 피부 좋으시긴 한데. 저도 여기서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그런지 몸이 좀 좋아졌어요. 요즘은 일하고 나면 오히려 몸이 무거운 게 아니라 가벼운 느낌이라니까요.”
“일이 그렇게 많은데 하고 나서 몸이 가벼워? 그것도 용하다.”
운정이 피식 웃었다.
“젊어서 그런가?”
“사장님도 그렇게 일하시고 실습 교수 일까지 하시면서. 저보다 체력 더 좋으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요즘 몸이 좋긴 좋아. 녹색 농부 조합에서 사서 먹는 유기농 채소나 쌀, 고기가 효과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저는 어렸을 때부터 쭈~욱 먹어와서 별 차이를 모르겠어요. 요즘 형님 덕분에 평화 일봉 농장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니까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저도 일할 때도 마음이 편하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닌가 했거든요.”
일봉 역시 고질병처럼 괴롭던 여드름이 사라진 지 몇 달 됐다. 피부과에서는 원인 불명의 스트레스 때문에 나타난 여드름이라고 하면서 일을 줄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당장 아버지 농장도 형편이 좋지 않고 아르바이트도 계속해야 해서 그는 그 조언을 따르지 못했다. 스위트 바게트가 망하고 난 다음에 여기서 일하게 되면서, 놀랄 정도로 좋은 일이 계속해서 생겼다. 아버지의 사업이 안정적인 궤도로 올라간 것만이 아니다.
“진혁이 올라가고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지는 않고?”
“일이 힘들긴 한데, 책임자로 승진시켜주면서 월급도 올려주셨으니까. 이제 여기서 뼈를 묻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아버지 농장은 물려받지 않고?”
“두 분 건강하신데요, 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금천복 여사는 조용히 빵을 고르고 있었다. 넓적한 트레이에 경로당에 가져다줄 것, 내가 먹을 것, 신랑 줄 것. 하나씩 올리다가 아까 들었던 말이 생각났는지 그녀가 물었다.
“실검 10위가 뭐여?”
금천복 여사가 궁금해하자 일봉이 설명해 주었다.
“실시간 검색어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형이 어떤 사람인지 검색해 보는 겁니다.”
“대단한데!”
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노인정에도 소문이 났어. 요전 뉴스에도 나오고 텔레비전에도 계속 나오니까 우리 마을에 위인이 났다고 다들 자랑스러워하지.”
“위인은 무슨……, 부족한 아들 녀석인데요. 젊은 나이에 과한 평가를 받아서 오만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젊은 나이에 자기 실력에 자신감을 갖는 게 나쁜 일은 아니야. 풍파에 무뎌지기 전에 젊고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건 그때만 할 수 있는 특권 아닌가?”
금천복이 임운정에게 말하자, 감 노인이 거들었다.
“노인네 맘씨까지 알고 배려할 줄 아는 녀석인데. 잘할 거야.”
“저보다 두 분이 더 좋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
금천복 여사가 계산하고 빵을 가져가는데 임운정이 인심 좋게 치킨 파이 두 개를 더 넣어주었다.
“자자, 이건 덤이에요.”
“덤은 무슨 덤이여! 맨날 빵 모자라서 못 파는 녀석이 뭔 덤을 주고 그랴.”
다시 꺼내려는 손을 붙잡고 임운정이 환하게 웃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경로당 가는 빵인데 제가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려, 고마우이.”
금천복 할머니는 요즘 들어 고와졌다. 고물상에 출근하면서도 예전에 입고 다니던 알록달록한 주름바지 같은 것이 아닌, 파스텔톤 캐주얼 정장을 입는다. 그런 그녀를 배웅하고서 감 노인은 빵집에서 빗자루를 꺼내왔다. 그리고 가게 앞을 쓸기 시작했다.
“선생님, 오늘도예요?”
샌드위치 가게가 개업하고서부터 그는 아침마다 나와서 이 거리 전체를 쓸었다. 임운정이 걱정과 고마움, 염려가 뒤섞인 표정으로 권했다.
“아예 정식으로 취업하시지 그러세요.”
감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운동 삼아 소일거리로 하는 일에 어이 돈을 받아. 내가 신세를 진 게 얼마나 많은데.”
“신세는 무슨 신세라고 그러세요. 저희가 선생님 덕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신세를 진 것이 많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인데, 괜찮다고 해도 자꾸 챙겨주는구나.”
“점심거리로 드실 빵은 챙겨드릴 테니 그건 꼭 가져가세요.”
“그래, 그래. 고마워.”
감호철은 요즘 들어 인생 살맛이 났다. 늦은 나이에 맞아들인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밥맛이 돌았다. 여든 평생 살쪄본 적 없이 멸치처럼 말랐던 몸도 요즘은 그럭저럭 살이 오르고 있어 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이 행복은 전부 임진혁과 임운정이, 임 씨 부자 덕분이여. 진혁이 놈이 같이 따라와서 달려주지 않았으면 마라톤을 끝까지 못 했을 것이고, 금 씨 마음도 몰랐을 것이여.’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내 죽기 전에 이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란가 모르겄어. 매일 매일 가게 앞을 쓸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은데.”
“아이고, 선생님!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작은 도시락 가방을 든 장은효가 가게 앞에 섰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머, 어머. 감 선생님. 오늘도 나오셨어요?”
샌드위치 가게는 선주문을 받는 창고 개념으로, 빵집보다 출근 시간이 늦다. 그 뒤에 졸졸졸 따라오는 고양이를 보고 일봉이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야옹아! 왔어?”
고양이는 꼬리를 흔들며 일봉이의 발목에 머리를 한 번 비벼주고서 도도하게 가게 앞에 앉았다. 그것도 방금 감 노인이 깨끗하게 쓸어놓은 자리다. 감 노인이 피식피식 웃으며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거참, 고양이가 신통하단 말이야. 말귀를 알아듣는 게 분명하다니깐.”
“얘도 진호라는 이름이 있어요. 우리 집 막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죠.”
자기 이름이 나오자 고양이가 고개를 들어 울었다.
“야옹!”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 반응에 장은효가 무릎을 꿇고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양이는 눈을 가늘게 감고 기분 좋게 고릉 고릉 고르르릉 소리를 냈다. 빗자루를 잡은 손을 멈추고 감호철이 물었다.
“자식 둘 다 타지에 보내서 많이 외롭지 않수?”
“진호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진희는 이제 소망시에 돌아와서, 같이 일하기로 했어요.”
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빗자루를 잡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맞다, 그랬지. 언제부터였지?”
“다음주부터요.”
“자식 둘이 둘 다 든든하니 부러울 것이 없겠수.”
“호호호호. 제가 키웠나요, 둘이 알아서 컸죠.”
인사를 나눈 장은효가 임운정에게 도시락통을 건네주었다. 가득 담긴 찬합을 보고 임운정이 웃었다.
“많지 않아?”
“일봉이 것도 싸 왔어요.”
“안 그래도 되는데.”
“내 것도 있어요. 시간 되면 점심 같이 먹어요, 여보.”
“고마워.”
곧이어 다른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출근길 전, 원하는 빵이 떨어지기 전에 사 가고 싶어 하는 손님들이다. 매일같이 오는 사람이 많은 덕분에 이제는 누가 언제 올지 대강 예상할 수 있다. 임운정은 멀리서 오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녀회장이 초등학교에 등교하는 아들, 환희의 손을 잡고서 오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인데 매일같이 손을 잡고 다니면 놀림 좀 받을 텐데.’
하지만 다른 집의 자녀 교육에 참견할 것은 아니다. 부녀회장은 반갑게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진혁이 어머니! 안녕하세요.”
“부녀회장님.”
“어제 텔레비전 봤어요. 진혁이가 너무 멋있게 나왔더라구요. 어제는 녹화 성공하셨어요?”
“가르쳐주신 대로 하니까 잘 됐어요.”
부녀회장은 장은효의 구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도 그 구두 신고 나오셨네요? 아드님이 생신 때 선물하셨다는 빨간 구두요.”
“편해서 곧잘 신어요.”
“그 양가죽 구두 저도 샀는데, 금방 까지더라구요. 아드님이 대체 손질을 어떻게 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손재주가 대단하신 게, 빵이 아니라 구두를 만드셔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호호호호!”
아들 칭찬에 장은효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이 양가죽 구두는 진혁이 강시술을 변형해 자신의 피를 넣어 명령을 새긴 특별한 제품으로, 오직 장은효만 신을 수 있는 것이다.
“환희 영어시험 준비한다던 건 잘 봤어요?”
“얘가 이번에 주니어 토익 만점을 받았지 뭐예요!”
부녀회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아들 자랑을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할 때부터 다른 애들하고 다르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만점까지 받을 줄은 몰랐어요. 절 닮아서 얼마나 똑똑한지…….”
눈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환희가 민망해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엄마, 나 학교 먼저 갈게요. 아줌마랑 얘기해요.”
“먼저 가고 있어 봐, 엄마가 금방 따라갈게.”
환희를 보내고 난 후, 부녀회장이 속삭였다.
“그런데 그 여자 얘기 들으셨어요?”
“그 여자요? 무슨 여자요?”
“진혁이랑 같은 쇼에 나오는 한일 혼혈 여자 쉐프요. 미혼모라잖아요.”
“그래요?”
인터넷 기사를 보지 못한 장은효가 어깨를 으쓱했다. 부녀회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아가씨 말이에요. 그렇게 안 봤는데 보기보다 문란한가 봐요.”
“무슨 사정이 있겠죠.”
“처녀가 애를 낳는데 무슨 사정이 있겠어요?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더니 진짜 그런가 봐요. 왜 외국까지 와서 혼자 애를 키우나 몰라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
“말도 통한다고 해도 친척 하나 없이 타지에서 혼자 육아를 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사정은 무슨, 상금을 노리고 왔겠죠. 그런 여자는 밟아 버리고 진혁이가 1등을 했으면 좋겠어요. 1등 하면 우리 아파트에 현수막도 걸까 봐요. 산목 아파트의 자랑이라고요.”
“그래요, 고마워요.”
장은효가 이미 한참 걸어간 환희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환희 엄마, 지금 환희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어서 가야죠.”
“내 정신 좀 봐. 갈게요! 이따 뵈어요!”
빵도 사지 않고 가버린 부녀회장의 뒷모습을 보며 유일봉이 말했다.
“산목 부녀회장님, 오늘은 빵을 안 사 가시네요?”
“말하다가 까먹었나 봐. 이따 또 오겠지.”
“그 미혼모 이야기는 저도 듣긴 들었는데.”
일봉이 선반에 빵을 진열하며 말했다.
“악플 진짜 장난 아니에요.”
“그 정도야?”
장은효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남 말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찌 이리도 많은지.”
임운정이 아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당신은 참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야.”
“내가 뭘요. 그냥 안타까워서 그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