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화
“나는 이번 프로그램 촬영 전에도 임 쉐프를 본 적이 있는데. 임진혁은 그때도 기교라는 면에서는 대단히 실력이 좋았어. 그런데 그동안 온갖 것을 배워왔다는 느낌인데? 그냥 대단히 빨리 배워.”
“빨리 배운다면……?”
“제빵을 가르치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 보통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알아. 열 명 중에 다섯 명 정도가 그렇지.”
아드레아노 존부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보였다. 그리고 그가 이어 말했다.
“서너 명은 하나를 알려 줘도 알지를 못해. 남들보다 감각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눈치가 없기도 하고.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하지. 다양한 이유가 있어.”
그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특정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두 명은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알아.”
“그럼 임진혁 쉐프는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아는 쉐프인가요?”
“만 명에 하나쯤 있을까 말까 한 녀석이야. 스펀지하고 똑같아.”
“스펀지……?”
“하나를 알려주면 열 개를 알아. 그리고 내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든 것을 보고 빨아들여서 제 것으로 만들어서 소화하는 녀석이지.”
“엄청나군요.”
“우리 페이스트리 키친에서 미니 시크릿 티아라 레시피를 알려주었을 때, 한 번에 바로 성공한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이었어. 그리고 그걸 개량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존부가 말했다.
“꼭 우승해서 우리 회사에 데리고 왔으면 좋겠군. 신메뉴 개발에 쓰기 적당한 인재야.”
“그렇게까지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해도 너무 나이가 어리지 않아요? 미적인 센스도 엉망이고.”
“정확히 바닐라 아몬드 크런치를 만들어내는 것만 봐도 미각이 보통이 아니야. 이건 많이 만들어서 많이 먹어본다고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지. 선천적인 미각 자체가 예민한 거야.”
주영모 쉐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그런 면이 없지는 않은데.”
“미각이 뛰어나기만 한 이들은 많아. 절대 음감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절대 음감을 갖고 있다고 모두가 뛰어난 연주자나 성악가가 되는 건 아니지. 느끼는 것과 그걸 재현해 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야.”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즉석에서 티아라를 링으로 바꾸고, 초콜릿 구슬 안에 견과류를 박아넣다니. 이건 그전에 스스로 많은 걸 만들어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어떤 재료가 어떤 맛을 낼지, 다른 재료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상상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거든.”
그가 마무리 지었다.
“그가 어떤 인재로 자라날지 기대되는군.”
“임진혁 쉐프가 우승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이희주가 물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고개를 저었다.
“우승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 뛰어난 실력과 우승은 별개의 문제야. 우승에 가까운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그가 지금 이대로 정진한다면 30년 후에 세계 최고의 페이스트리 쉐프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엄청나게 멀리 보시는군요, 아드레아노.”
스텔라 위스커스가 웃었다.
“내가 현역으로 30년 동안 있을 테니까, 날 넘어서려면 그 정도는 걸리지.”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메인 피디는 핸드폰이 울린 걸 보고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갑자기 사무실을 나가는 메인 피디를 바라보며 이희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야?”
메인 피디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유키코 김이 미혼모라고? 그런 기사가 떴어?”
“예. 노이즈 마케팅 때문에 피디님이 일부러 내신 건가 해서.”
“지금 시청률이 피크에 달한 쇼에 노이즈 마케팅을 왜 해? 어디서 나온 기사야?”
그가 짜증을 냈다.
“한창 임진혁이라는 한국 토박이 쉐프가 뛰어난 실력으로 쇼를 재미있게 끌어나가고 있는데.”
◈ ◈ ◈
소망중학교의 오전 자율학습이 시작하기 30분 전.
아침 일찍부터 등교한 중학생 김도을은 학교를 향해 걷고 있었다. 동네 빵집에서 빵을 먹기 시작한 지 거의 10개월이 되어가는 지금 소년은 꽤 자랐다. 중학교 입학 당시에 빡빡 깎았던 머리카락은 잔디가 조금씩 자라나 길어지듯 무성하게 자라서 더벅머리가 되었다. 머리카락만이 아니라 키도 부쩍 컸다. 올해 봄만 해도 반에서 제일 앞줄에 앉았지만 이제 키가 부쩍 커서 제일 뒤쪽에 앉아야 한다.
등교하면 스마트폰을 걷어가서 나중에 돌려주기 때문에 핸드폰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에 걸어갈 때밖에 없다. 트위터를 확인하던 김도을이 씩 웃었다.
[@옥황빵제 : 제빵의 신이 나타났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인정한 #임진혁 #디저트서바이벌 #페이스트리쉐프 #세젤멋]
“리트윗이 1만 개가 넘었네? 좋아.”
학원 시간과 겹쳐서 어젯밤 디저트 서바이벌 쇼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를 편집해 놓은 동영상을 보았고, 앱을 통해 하이라이트만 잘라서 리트윗했더니 리트윗 수가 놀랄 정도로 늘어났다.
“역시 멋있다니깐.”
진혁이 형네 빵집에 다닌 이후로 피부가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키도 부쩍 컸다. 어머니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라고 했지만 도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키가 큰다면 나 말고 도연이 형도 키가 컸어야지.’
나이 터울이 있는 도연이 형은 대기업 생산직에 취업해서 다른 도시에서 산다. 형은 168cm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지만 자기 키가 170cm라고 우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형보다 쬐끔 작았지만 지금은 형을 내려다볼 수 있는 키가 되었다. 도을이는 이것이 전부 작은 사장님네 빵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가는 길, 언제나처럼 열려 있는 빵집 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도을이 외쳤다.
“일봉이 형! 이거 봤어요?”
작은 사장님인 임진혁 쉐프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빵집 맛이 조금 변했다. 대신 일봉이 형은 작은 사장님보다 더 친절하고 사근사근하다. 나이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나자 일봉이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도을이 왔구나.”
일봉이 앞치마에 밀가루를 묻힌 채 나오며 웃었다.
“어서 와라.”
주방 안쪽에서 반죽을 치대는 큰 사장님이 인사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도을이는 자신만만하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것 봐요. 임진혁 쉐프님 어제 하이라이트에요.”
“오. 네가 직접 편집한 거야?”
“리트윗이 1만을 넘었다니까요? 반응 장난 아니에요. 다들 막 사러 가고 싶다고 난리임.”
자기 일처럼 신나 하는 김도을을 보며 일봉이 입꼬리를 올렸다. 일봉이 주방에 소리 높여 외쳤다.
“큰 사장님! 이것 좀 보세요. 꼭 봐야 해요.”
“오븐 좀 돌리고 나갈게!”
곧 오븐에 빵을 넣고서 타이머를 맞춘 임운정이 주방에서 나왔다. 셋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도을이 보여주는 영상을 보았다. 임운정이 진지하게 물었다.
“리트윗 1만이 무슨 뜻이라고 했지?”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걸 자기 계정에 복사해서 퍼트리는 거예요.”
“그래.”
정확히 이해는 못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다. 임운정이 다시 물었다.
“영상은 네가 직접 만든 거냐?”
화면 속에서 금발의 외국인이 케이크를 입에 넣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의미심장하게 자막이 떴다. <아드레아노 존부, 디저트 킹> 이라는 자막 위에는 금빛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장난스러운 자막이 사라지고 나서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It tastes better than mine.”
아드레아노 존부가 눈을 깜빡이고 입을 뻐끔거렸다. 뻐끔, 뻐끔하는 자막이 떠오르며 한국어 자막이 나타났다.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데?”
금붕어가 입을 뻐끔거리는 카툰 이미지가 지나가고 나서, 존부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빠른 영어로 칭찬하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개량하라고 했는데 정말로 개량해버리다니! 대단합니다. 임진혁 쉐프.“]
영상이 끝나고 나서 리트윗이 1만5천 회가 넘은 화면을 보여주며 도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만든 건 아니고 제가 15초만 잘랐어요. 그새 만오천 됐네.”
“엄청나네.”
일봉이 짝짝 박수를 쳐 주는데 임운정이 물었다.
“영상 말고 스크린샷 같은 것도 있어? 내가 카카오톡으로 ”
“짤방은 따로 돌아다니는 거 있어요.”
“그래?”
임운정이 흥미를 보이자 도을이 대답했다.
“짤방도 보여드릴까요?”
“그래.”
바로 검색한 끝에 나온 이미지는 조금 전 영상에서 자막째 따온 것이었다. 유명한 출판만화 이미지에 대사만 바꾼 것도 있었다. 주르륵 쏟아지는 그림들을 보고 임운정이 놀라워하는데, 도을이 신나서 말했다.
“지금 제일 유명한 건 이거에요, 이거.”
아드레아노 존부와 임진혁이 나란히 서 있는데, 진혁의 케이크에 더 맛있어요! 하는 글씨가 붙어 있다. 그림을 보고서 운정이 감탄했다.
“짤방이란 것이 한두 개가 아니네?”
“요번에 작은 사장님이 흥하면서 종류가 많이 나왔어요.”
임운정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아저씨한테도 좀 보내줄 수 있겠니?”
김도을이 입이 찢어지라 웃었다.
“네!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이건 별건 아니지만 학교 가져가서 친구들이랑 좀 나눠 먹어라.”
“우왓싸! 감사합니다!”
도을이 점심값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양의 빵이다. 소년은 사양하지 않았다.
“잘 먹을게요!”
치킨 파이에 베이컨 파이, 치즈 케이크에 도을이 제일 좋아하게 된 미니 카스텔라 스틱까지 가득 담긴 빵 봉지를 안고서 소년은 행복해했다.
“우리 진혁이 홍보 잘 해주고.”
“제가 바로 희망중학교 공식 임진혁 쉐프님 홍보팀입니다. 앞으로도 잘해 볼게요!”
신나서 뛰쳐나가던 소년이 문을 나가려던 직후, 문이 반대쪽에서 열렸다.
-딸그랑, 딸그랑!
종소리가 울리며 단골손님이 들어왔다. 이 시간이면 방문하는 다른 단골손님, 금천복 여사가 나타난 것이다.
“중학생 꼬맹이 왔누. 벌써 가는 거야?”
“꼬맹이 아니라니까요, 할머니. 그리고 전 원래 이 시간에 학교 가요.”
그리고 그 뒤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감 씨 할아버지까지, 이 시간에 모이는 사람들은 전부 모였다. 막 나가려던 김도을이 스마트폰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진혁이 형이 진짜 잘 나가고 있어요. 어젠 실검 10위 안에 들기도 했다니까요.”
“너 학교 안 가냐? 늦는다?”
일봉이 시간을 상기시켜 주자, 화들짝 놀란 김도을이 빵 봉지를 안은 채 뛰기 시작했다.
“저 늦었어요! 학교 갑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임운정이 허허하고 웃었다.
“씩씩한 녀석. 진혁이도 저맘때쯤에 저렇게 돌아다녔는데.”
일봉이 물었다.
“저렇게라뇨?”
“핸드폰에 고개 처박고 돌아다녔지.”
임운정이 피식피식 웃었다.
“뭐, 요새 애들이야 스마트폰 보면서 걸어 다니는 건 다 그렇죠. 저도 그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