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화
황용선은 아직 바닐라 가나슈를 젓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듯 머랭을 치고 있는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어린 녀석이 대단히 속도가 빠른데.’
그는 임진혁보다 나이가 많았다. 헤드 셰프로 페이스트리 키친을 맡은 지도 2년, 주방에 선 것은 20년이 넘는다. 저 어린 녀석이 아직 기저귀를 차고 기어 다니고 있었을 무렵 황용선은 주방에 서서 칼을 잡았다. 주영모 쉐프처럼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페이스트리 쉐프는 아니지만 업계에서는 나름 평판이 좋다. 주영모처럼 심사위원 후보로 제안을 받았던 그가 심사위원이 아닌 출연자의 입장으로 이곳에 선 것은 호텔 홍보부에서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보다는 출연자 쪽이 드라마가 된다고 했지.’
다니는 호텔의 홍보를 겸해서 이곳에 섰다. 얼마 전에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서 추가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한 것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가의 아래에서 인턴십을 할 생각은 없으나 상금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냥 테스트를 받고 심사 위원석에 있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트레이에 베이킹 페이퍼를 깔고 나서 믹서기에 달걀흰자를 넣었다. 달걀흰자가 저어져 광택 나는 봉우리들이 솟아오를 때까지 스탠드 믹서는 힘차게 윙윙 소리를 토해냈다. 파이핑 백에 크림을 옮기고 트레이 위에 얇게 크림을 펴 바른다.
이제 금갈색으로 보기 좋게 구워질 때까지 화씨 180도 온도에서 10분 정도 기다리면 된다. 물론 그냥 손을 놓고 기다릴 수는 없다. 그는 화이트 초콜릿을 녹이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황용선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서 진혁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화이트 초콜릿을 녹여 틀에 부은 지 오래다. 그는 흰 구슬들 안에 씹기 좋게 조그마한 견과류 조각도 하나씩 넣었다. 이것이 진혁이 한 첫 번째 ‘개량’이었다.
진혁은 느긋한 속도로 하나씩 하나씩 레이어를 만들어 나갔다. 황용선보다 세 배는 빠른 속도였다. 두 사람 모두 여덟 개의 레이어를 다 만들었을 즈음이었다.
“15분 남았습니다!”
사회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바닐라 샹티이 크림을 냉동고에 넣고.’
황용선은 네모난 케이크 틀 아래에 크림을 얇게 발랐다. 급한 마음에 손이 떨려서 울퉁불퉁하게 발려졌다. 그는 위쪽의 크림을 덜어내고 표면을 평평하게 골랐다. 그는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지.’
샹티이 크림은 틀째 급속 냉동고에 들어갔다. 이 크림이 케이크의 제일 아래쪽 레이어가 될 것이다. 그는 초조하게 구둣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다른 7개의 레이어 모두 제대로 완성되었다. 단지 하나, 레시피를 알려 주지 않은 것은 바닐라 크럼블뿐이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바닐라 크럼블을 만들었다. 크럼블은 본래 영국에서 전래된 과자로, 보통 사과나 블루베리 등 과일을 넣어 반죽한 후 오븐에 넣어 굽는 것이다. 구운 크럼블 위에 아이스크림이나 생크림, 커스터드 크림을 얹어 서빙하기도 한다. 갈색 설탕을 위에 뿌리기도 하는데, 지금 이 크럼블은 그가 모르는 뭔가 다른 맛이 있었다. 하지만 황용선은 그것까지 챙기지는 못했다.
“휴, 다 했다.”
황용선은 이마 위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미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서 있는 임진혁을 보았다. 임진혁의 앞에 놓인 미니 케이크는 완벽한 사각 모양으로, 아까 맛보았던 시제품과 1mm도 다르지 않은 크기로 보였다. 황용선은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다쿠아즈가 조금 두껍게 구워져, 케이크가 미묘하게 사각이 아니라 약간 비뚤어진 모양이 되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으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이런 대회를 나오지 않는 것이 좋았을지도…….’
실력에 자신이 있어 한 선택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애송이 따위에게 발목이 잡히다니. 홍보는커녕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지도 몰라.’
최소한 준우승까지는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 생긴 주름살이 더 깊어졌다.
“3, 2, 1! 타임아웃!”
스텔라 위스커스가 외쳤다. 그녀가 손뼉을 쳤다.
“그럼 이제, 맛을 볼까요?”
황용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모양이어도 맛이 엉망진창일 수도 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와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주영모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케이크를 살펴보았다.
“역시 황 쉐프군요.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훌륭하게 재현했습니다.”
“임진혁 쉐프의 케이크도 겉모습은 완벽한데요? 아드레아노 존부의 케이크를 이렇게까지 똑같이 재현한 사람이 전에 있던가요.”
“두 분 다 솜씨가 만만치 않군요.”
임진혁과 황용선은 둘 다 나란히 서서 심사위원을 지켜보았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칼을 들었다. 그는 카메라에 잘 보이는 각도로, 황용선의 케이크를 절반으로 갈라 보였다. 선명한 8개의 레이어가 보였다.
“호오.”
하지만 그 안에 왕관의 모양은 비뚤어져 있었다. 진혁은 그 층에서 쉬폰 케이크가 조금 두껍고, 다쿠아즈가 아주 두꺼운 사실을 눈여겨보았다. 황용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비율을 잘못 쟀군.’
아드레아노 존부가 진혁의 케이크를 잘랐다. 그 안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반지가 들어있었다. 매끄러운 8층의 레이어는 모두 균일한 높이로 층층이 쌓여있다. 어느 케이크를 더 잘 만들었는지는 누가 보기에도 명확해 보였다.
“반지……?”
바바라 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어머나! 이 케이크는 시크릿 티아라 케이크가 아니라 시크릿 링 케이크네요. 이건 저에게 반지를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세계적인 슈퍼 모델이 우아하게 하는 이야기에도 진혁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미스터 존부가 말한 대로 개량해 보았습니다. 진짜 반지를 넣는 것보다 더 맛있을 겁니다.”
“아하하하하! 대단한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깔깔 웃었다.
“개량하라고 했는데 정말로 개량할 줄은 몰랐네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테스트를 거치지도 않고 이 자리에서 바로 만든 이 ‘링’이 정말로 맛있을지, 어디 기대해보죠.”
심사위원들이 먼저 맛본 것은 황용선의 케이크였다. 심사위원들은 작은 케이크 조각을 한입에 먹어치웠다.
주영모가 말했다.
“짧은 시간 동안 8개 층을 다 만든 것도 대단하군요. 손이 빠르고 정확합니다. 다쿠아즈는 약간 아쉽지만.”
“이런 맛이었군요. 흠. 아까 두 사람이 먹는 걸 보고 어떤 맛인지 궁금했다고요.”
바바라 커가 말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고개를 저었다.
“내 케이크는 이것과는 좀 맛이 다릅니다. 나중에 원본을 맛보시면 아시겠지만.”
“너무 냉정한 것 아닌가요?”
짧은 평이 끝나고 스텔라가 손을 뻗었다.
“이제 임진혁 쉐프의 케이크를 맛보죠.”
“아까부터 반지가 궁금했어요!”
바바라 커가 활기차게 말했다.
“이 반지는 도대체 뭐로 만든 거예요?”
“맛보시면 아실 겁니다.”
진혁은 반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으며 말했다.
“이건…… 정말로…….”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며 더듬거리는 그녀 곁에서, 주영모 쉐프가 중얼거렸다.
“여덟 개 레이어 모두 맛이 살아있으면서 잘 어울리는데……. 미스터 존부의 케이크는 역시 대단하군요. 엄청납니다.”
아드레아노 존부는 묵묵히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흠.”
그는 눈앞에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데?”
아드레아노 존부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방금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공기 밖으로 얼굴 내민 금붕어처럼 몇 번 뻐끔거리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개량하라고 했는데 정말로 개량해버리다니! 대단합니다. 임진혁 쉐프.“
◈ ◈ ◈
출연자들이 멍하니 심사위원들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자기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다고? 정말이야?”
“먹어보고 싶다.”
브라이언 신은 강렬하게 입맛을 다셨다. 저기에 보이는 케이크는 너무나도 작고 아름다웠다.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아쉬웠다.
‘임 쉐프, 케이크를 대단히 잘 만들던데.’
거의 스승님 수준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스승님은 심심하면 맨손으로 머랭을 쳐대는 괴짜였지만 장식 하나만큼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대학 시절 이탈리아에서 조각을 공부했다는 스승은 브라이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꼭 우리 스승님 같아.’
스승은 자기 할 일에는 재능이 넘치며, 실력이 뛰어나고 무뚝뚝하고 필요한 말만 하지만 속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브라이언은 임진혁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
‘가능하면 같이 일하고 싶다. 이것저것 배우고 싶어.’
브라이언이 흐뭇하게 임진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유키코 김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저 사람의 들러리가 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니에요.”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임진혁 쉐프가 재능이 대단한 건 알겠지만…… 저도 이유가 있어서 여기까지 올라온 거라구요. 난 여기서 꼭 우승해야 해요.”
루이스 강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여기 탈락하고 싶어서 올라온 사람이 있겠어? 우승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나만큼 절실하지는 않을걸요.’
유키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이번 라운드에서 아슬아슬하게 탈락자 위치를 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루이스 강처럼 칭찬을 받으면서 통과한 것이 아니다. 나마무라 베이커리에서 총책임자로 일하며 서류 작업을 하면서 손이 무뎌졌다.
‘이번 촬영이 끝나면 연습하는 시간을 좀 더 늘려야 해. 다양한 빵을 만드는 방법을 다시 연습하는 것만이 아니라 디자인 감각을 더 만들어야 해. 예쁜 걸 많이 보고 뭘 만들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녀는 여기에 있는 누구보다도 상금이 절실했다.
◈ ◈ ◈
평이 좋았던 2회에 이어 3회가 방영되고 난 후 방송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사회자 이희주는 입이 찢어지라 웃었다. 담당 피디 역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번 화 시청률 봤습니까? 국장님이 인센티브 준대요.”
“역대 최고죠.”
“우리가 NBC 드라마를 이겼다니까요? 특히 여기 보세요.”
담당 피디가 시청률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리의 디저트 킹, 아드레아노 존부가 임 쉐프 케이크가 자신보다 맛있다고 선언했다고 하는 시점에 솟구쳐 올랐습니다.“
“임진혁 쉐프를 데려오기를 잘했군요.”
주영모 쉐프가 말했다.
“패자부활전에서 한 번 탈락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임 쉐프는 창작보다 모방에 재능이 있는 것 같군요.”
“창작도 잘하는 거 아닙니까? 처음에 만들었던 제사상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