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화
“안에 왕관이 들어있군요.”
진혁이 말했다. 진주처럼 흰 구슬들이 박혀 왕관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저 모양으로 미루어 보건대 케이크를 입안에 넣으면 구슬이 바삭하게 씹히는 구조로 보였다.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케이크 안에 일부러 왕관 모양으로 구슬을 짜 넣었군.’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고 수준의 디저트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자신의 디저트 가게에서 일반인들에게 판매하던 제품을 무공의 절정 고수 수준이라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신화경의 경지에 달한 음식이다.’
풍겨 나오는 복합적인 향기만으로도 어떤 맛이 날지 70% 이상은 확신할 수 있다. 경지에 달한 초감각으로 진혁은 욕심껏 향내를 들이마셨다.
‘첫 번째 향은 바닐라. 이건 전체적으로 바닐라 향을 입힌 케이크야. 아니다. 그냥 바닐라가 아니야…… 바닐라 시럽에 바닐라 샹티이 크림. 바닐라에 우유를 섞은 향이다. 이건 쉬폰 케이크…… 바닐라에 밀크 초콜릿? 이건 슈가 크럼블이군. 머랭에 바닐라 씨앗과 향이라. 이건 바닐라 다쿠아즈…… 그리고 설탕. 많지 않은 양이야.’
진혁은 끈기있게 향기를 하나씩 분석했다. 남궁가의 창궁무애검법을 분석하는 것처럼 집중해서 가느다란 향기 한 줄기 한 줄기를 분석했다. 내리치는 검의 궤적은 검이 그곳을 지났기에 생긴다. 그는 여덟 살배기 아이가 흉내 내는 초식의 극히 일부 파편만을 보고서도 검법의 원형을 추측해낼 수 있을 만큼 무의 천재였다.
‘아주 희미한 바닐라와 우유. 거기에 생크림. 아몬드도 조금 섞여 있는데?’
일반적인 케이크가 생크림과 과일 등 두세 가지 재료를 손질해 내놓는 단품 요리라고 하면 이 미니 케이크는 달콤하고 씁쓸한 향기의 연회라고 할 수 있다. 페이스트리 쉐프의 기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극한까지 보여주는 요리다.
‘단순히 욱여넣는 거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걸 맛있는 향기가 나게 할 수 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어린아이라도 검을 잡아서 휘두를 수 있다. 하지만 검을 쥐고 베어내는 초식에 세월을 담을 수 있는 것은 기나긴 시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경지에 이른 자들뿐이다. 아드레아노 존부의 케이크에서 진혁은 세월을 읽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지나치게 강한 특색 없이 잘 어울리는 여덟 가지 맛을 하나씩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층 한층 그 맛을 쌓아냈겠지.
‘일부러 미니 케이크로 한 거야.’
보통 사이즈의 케이크로 했다면 케이크를 맛보는 사람이 한 번에 여덟 개 층을 한꺼번에 먹기란 어렵다. 잘라낸 모든 케이크 조각이 8개 층을 전부 포함할 리도 없다. 바닐라 크럼블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그 층을 피하여 다른 부분만을 잘라 먹을 수도 있다. 쉐프가 직접 잘라 주더라도 일단 앞에 놓인 음식의 조각을 어떻게 먹는지는 손님의 재량 하에 놓인다. 하지만 아드레아노 존부는 8개 층을 전부 압축하여 아주 조그맣게 만듦으로써 그 선택권을 박탈했다.
열여섯 가지가 넘는 재료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여 쌓은 여덟 층. 이 견고한 맛의 궁전은 바닐라라는 벽돌로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궁전이다.
‘이걸 산산이 분해해서 전부 씹어 먹어 버리고 싶다.’
진혁은 케이크를 그대로 삼켜 버리기라도 할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씹어 삼키어 맛을 보면 그것을 다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사실에 단 한 점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아드레아노 존부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양팔을 벌리며 케이크를 다시 한 번 소개했다.
“시크릿 티아라 케이크입니다. 프러포즈용으로 주문받을 때는 안에 다이아몬드 반지 모양으로 크림을 넣는 경우도 있죠.”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겠는데요?”
황용선 역시 임진혁처럼 놀라고 있었다. 그는 진혁처럼 향을 느낄 능력은 없었으나. 정교한 모양과 엄청나게 작은 크기를 보고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저걸 우리가 만들어야 한단 말이죠.”
스텔라 위스커스가 거들었다.
“먼저 시식부터 해 보시죠. 맛을 봐야 모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장 기본적인 레시피를 빼고서 레시피를 받을 텐데 말이에요.”
먼저 케이크를 받은 것은 황용선이었다. 그는 흰 접시에 담긴 조그마한 케이크 절반을 먹먹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굳어버린 얼굴로 케이크를 바라보며 1, 2초 정도 망설인 후 그는 바로 케이크를 통째로 입에 집어넣었다.
“음……!”
그리고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웃지 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가 입가에 크림을 묻힌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맛있는데요?”
“당연히 맛있지. 누구 케이크인데.”
“저희가 먹을 샘플은 없습니까, 아드레아노?”
“직접 주문하면 됩니다. 스텔라.”
심사위원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황용선은 케이크를 다 먹었다. 먹는 동안 환했던 미소는 점점 더 지워졌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방금 먹은 케이크가 있었던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만들어?’
레이어 한 층이 1㎝가 되지 않는 두께다. 눈앞이 캄캄했다. 황용선이 넋을 놓고 서 있는 동안, 진혁 역시 케이크를 받았다. 그는 기대감에 휩싸여 눈앞의 케이크를 받았다.
‘명가의 무공 비급을 선물 받는 기분이군.’
그는 대단히 유쾌했다. 지옥에서 온 패션 센스라고 폄하 받은 것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즐거웠다. 손을 뻗어 케이크를 입안에 넣고 나서는 더욱더 그랬다.
“바닐라로 감쌌지만 포인트를 준 것은 아몬드로군요.”
아주 희미한 아몬드 오일의 향기가 전체적인 층을 감싸고 있다. 아드레아노가 눈을 들어 진혁을 보았다.
“미각이 뛰어나군. 좋은 쉐프가 되겠어.”
아드레아노 존부가 윙크했다. 사회자 이희주가 마이크를 들었다.
“이전 라운드와 마찬가지로, 이 케이크를 똑같이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윙크했다. 장난감이 주어진 어린아이처럼 신나 하며 그가 박수를 짝 쳤다.
“가능하다면 개량해도 좋아! 하지만, 좋은 쪽으로 개량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엉망진창으로 만들면 곤란하단 말이지. 멋진 실력을 기대한다고!”
벨이 울렸다.
◈ ◈ ◈
앞으로 세 시간. 케이크를 만들어야 할 시간이다. 패자부활전을 지켜보던 브라이언 신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바닐라로 된 걸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두라고 하더니. 이것 때문이었군.”
바닐라 글레이즈에 샹티이 크림. 바닐라 워터 젤에 바닐라 브륄레. 3라운드에 올라가는 모든 사람을 이틀 전에 불러서 만들게 했다. 케이크의 절반이 미리 만들어져 있는 셈이다. 오직 패자부활전에 들어간 이들만 그 재료를 사용해서 케이크를 만들게 된다.
“본편에서 못 쓰게 하더니 이런 이유일 줄이야.”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데 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저 시크릿 티아라 케이크, 한정판으로 잠깐 주문받았죠. 나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루이스 강이 어이없다는 듯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럼 떨어졌어야지.”
“돈 주고 정당하게 먹고 싶다는 거지, 저기 있고 싶다는 건 아니니까.”
유키코가 물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합격할 것 같아요?”
“흠…… 앞선 라운드에서는 임진혁이 승승장구하긴 했지만. 황용선 쉐프님도 만만치 않지.”
“호텔 조리 경력은 황 쉐프님이 훨씬 길죠. 데코레이션 같은 것도 더 잘하실 거고.”
“붉은 악마 티셔츠는 데코레이션 실력이 떨어져서 탈락한 게 아니잖아? 만들긴 잘 만들었어. 미적 감각이 별로라서 그렇지.”
“흠.”
“오히려 이렇게 모방하는 게 임진혁 쉐프의 가장 큰 재능일지도 모릅니다.”
브라이언 신이 말하자 루이스 강이 고개를 저었다.
“학생 대회에서 만든 걸 봤는데, 창작을 아주 잘해. 모방보다는 창작 쪽일걸?”
“흠…….”
그들은 조리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유키코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제가 저기에 서 있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에요. 저 케이크를 재현해서 3시간 만에 만들라니…….”
루이스 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브라이언 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저 시크릿 티아라 케이크의 레시피를 만들고 나서 아드레아노 존부에게 평가받는 기회라고도 볼 수 있으니까. 저 자리에 서고 싶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걸.”
진혁은 조리대 옆에 준비되어 있던 레시피 내역을 훑어보았다. 빠져 있는 레시피는 간단했다.
‘아몬드 바닐라 크런치 레시피를 빼놓았군.’
반면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것은 넘치도록 많았다.
‘주최 측에서 꽤 이것저것 고려했다는 점은 알겠어.’
1시간이라는 시간은 넘치도록 길었다. 진혁은 머릿속에서 레시피를 되짚었다.
“제일 먼저 바닐라 가나슈부터 만들어야겠군.”
바닐라 에센스를 넣은 크림이 희게 끓어오르자, 진혁은 그것을 보울 속 화이트 초콜릿 위에 부었다. 녹은 초콜릿과 크림이 한데 섞이도록 열양기공을 운용하였고, 식을 수 있게 급속 냉동고에 넣었다. 급속 냉동고에 넣으면서 열기를 빼앗아 빠르게 식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물론이다.
구경하던 브라이언 신이 중얼거렸다.
“임진혁 쉐프님 속도가…….”
“온도 조절을 엄청나게 잘하는데? 저렇게 빨리 가나슈를 만드는 건 처음 봤어. 평생동안 주방에 서 있었던 사람 같군.”
황용선이 아직 크림에 바닐라 빈과 에센스를 부으며 크림이 끓어오르는 온도를 재는 동안 진혁은 순식간에 바닐라 가나슈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는 작은 소스 팬에 설탕을 넣었다.
‘설탕 62g 물 125g 바닐라 추출액 소량……. 바닐라 빈은 빼자.’
바닐라 시럽이 끓어오르는 것 역시 순식간이었다. 놀랄 만큼 커다란 불꽃이 피어올랐지만 시럽은 끓어 넘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완성한 시럽을 두고 그는 달걀을 깨기 시작했다.
“H&J에서 머랭을 치던 때가 생각나는데.”
무대에 올라오기 전에도 했고, 오픈 키친에서 수없이 만들어왔던 그것이다. 이번에는 진혁 자신의 레시피가 아니라 아드레아노 존부의 레시피대로 한다는 것이 다르다.
“바닐라 마카롱인데 아몬드 가루를 넣어 향을 내는군.”
여태까지는 무공을 쓰지 않고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제빵에 임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시간이 최대한 많이 필요했다. 그는 스탠드 믹서가 아니라 손으로 순식간에 달걀흰자를 거품 쳐 머랭으로 만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출연자들은 말을 잃었다.
“머랭을 손으로 저렇게 빨리 친다고?”
“평생 머랭만 치고 살았나.”
“허어…….”
반면 심사위원인 아드레아노 존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을 뿐이다.
“근력은 대단하네. 속도가 빠르긴 한데 정확하게 해야 하는 작업에서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군.”
“머랭 거품이 올라오는 모양을 보면 완성도는 좋아요.”
“나중에 맛을 보면 알 수 있겠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임진혁과 황용선, 두 남자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