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화
잠시 심사위원 세 명과 게스트 심사위원, 그리고 사회자 모두 케이크를 음미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케이크지요?”
“화이트 아몬드 케이크입니다.”
“사워크림으로 숨김맛을 내서 케이크 본연의 맛을 살렸군요. 좋습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브라이언이 어깨를 펴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고 난 후, 루이스 강이 나섰다. 펼쳐진 태권도복의 상하의 모양을 한 케이크 위에는 검은 허리띠가 풀어 놓여 있었다. 바바라 커가 물었다.
“이 동양적이고 특이한 의상은 무도복 아닌가요?”
주영모가 웃으며 대답했다.
“태권도복이군요. 태권도를 할 때 입는 옷입니다.“
이희주가 맞장구치며 말했다.
“무지개색이라고 해서 검은색과 잘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태권도복을 만들다니 대단합니다. 저 안쪽에 무지개가 숨어 있는 거죠?”
루이스 강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부모님 직장 문제로 초등학생 시절 프랑스로 이민을 갔습니다. 낯선 언어와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파리에서 한국인이 태권도장을 열었어요. 그때부터 도장을 꾸준히 다니면서 무술을 수련했죠. 결국 최고 레벨인 검은띠까지 딸 수 있었습니다. 페이스트리 쉐프라는 힘든 길을 밟으면서도 이전에 무술을 수련하던 때를 생각하며 견딜 수 있었죠.”
“와. 그런 일이 있었군요.”
“파리에도 태권도장이 있다니 놀랍네요.”
“미국에도 꽤 많이 있습니다.”
루이스 강이 케이크를 절반으로 자르자, 태권도복 상의가 잘리며 안쪽에 숨어 있던 무지갯빛 레이어가 드러났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맛보실까요, 여러분?”
“서빙하는 솜씨까지 프로네요.”
“좋아요, 좋아!”
바바라 커는 케이크를 맛보고 미소 지었다.
“맛있어요. 다 맛있어서 평가하기 힘들 정도네요. 아주 어려운 일이로군요. 이 맛있는 케이크 중에서 제일 맛있는 걸 골라야 한다니.”
흐뭇해하는 바바라 커와 달리 아드레아노 존부는 한 입 먹고 바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색깔이나 모양은 괜찮지만 맛은 좀 평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 입맛에는 지나치게 달군요.”
“저는 단것을 좋아해서 괜찮은데.”
“이렇게 단순한 단맛은 그냥 설탕 덩어리일 뿐이죠. 뭐, 아메리카노를 곁들이면 적절할지도 모르겠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진혁의 차례는 마지막이었다. 그가 케이크를 들고서 앞으로 나섰다.
“이 케이크는…….”
바바라 커가 입을 열었다.
35장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엄청나게 못생겼고, 대단히 올드한 감성이라고나 할까, 연도가 벌써 언제야. 십몇 년을 훌쩍 넘었는데요. 2002년 월드컵? 이라고 쓰여 있는 게 맞나요?”
바바라 커의 질문에 주영모가 대답했다.
“2002년에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렸습니다. 그때 이런 모양의 붉은색 티셔츠가 유행했죠. 국민 열 명 중 여덟 명은 입고 다녔을걸요.”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십몇 년 전 디자인이라 이렇게 촌스러운 거군.”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그가 바바라 커를 바라보았다.
“나는 패션모델은 아니지만 이 티셔츠가 촌스럽다는 것은 알겠어.”
스텔라 위스커스가 주영모와 이희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국적인 관점에서 이 티셔츠는 매력적인가요? 제가 너무 문화적인 고려를 하지 않고 바라보는 건 아닌지.”
주영모 쉐프가 단언했다.
“이런 걸 보고 우리가 패션 테러라고 합니다.”
“이 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닌다면 아무리 잘생겼어도 헌팅에 실패할걸요.”
이희주가 덧붙였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입을 열었다.
“겉모습은 겉모습일 뿐, 이제는 그 내면을 평가해야지. 임 쉐프, 한 조각씩 잘라 주시죠.”
진혁은 빵칼로 케이크를 잘랐다. 매끄럽게 잘린 케이크는 한 조각씩 심사위원에게 돌아갔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건 정말로 환상적인 맛이군요.”
바바라 커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 제일 맛있는지 모르겠다는 맛은 취소하죠. 저는 이 케이크가 제일 맛있다고 생각해요.”
아드레아노 존부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정말로 맛있는 음식이 어떤 음식인지 아십니까?”
“예?”
“싫어하는 사람이 먹어도 맛있는 음식입니다. 예를 들자면, 양파를 싫어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양파 타르트라면, 그건 정말 맛있는 음식인 거죠.”
“그러고 보니 미스터 존부는 아몬드를 싫어하셨죠.”
“심지어 레드벨벳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아몬드를 넣은 레드벨벳 케이크인데도 맛있네요. 허, 참.“
그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나는 내가 레드벨벳 케이크를 맛있다고 말하게 되는 날이 내 평생에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로 놀라운 맛이군요.”
주영모 쉐프가 말했다. 진혁은 칭찬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묘하게 불편한 기색을 발견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흠?’
그렇기에 조금 후에 나온 발표에서 진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스테이지에서 제일 멋진 케이크를 만들어 주신, 브라이언 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내 케이크가 아니었나?’
티셔츠의 디테일도 의도대로 재현했고, 맛에 대한 피드백도 최상급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사람까지 이름이 불리고 나서 남은 것은 진혁과 황용선, 두 명이었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말했다.
“남은 두 분은 지금부터 패자부활전을 하게 될 겁니다. 황용선, 임진혁 두 분은 앞으로 나와 주세요.”
아드레아노 존부가 두 사람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황용선, 당신은 붉은색과 흰색 사탕을 사용해서 어릿광대의 상반신을 조형한 케이크를 만들었죠. 열두 살 때 생일파티가 기억에 남았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바바라 커가 말했다.
“어릿광대라는 아이템은 할로윈에 어울리지요. 저희가 낸 주제를 잘못 생각했어요.”
“패션 그 센스를 만회할 만큼 맛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영모 쉐프가 말했다. 황용선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40대 중반, 해리어트 호텔의 페이스트리 키친에서 헤드 쉐프를 맡고 있는 그는 자신이 벌써 패자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사회자 이희주가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임진혁 쉐프의 케이크는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채점 항목은 추억과 관계있는 아름다운 패션 아이템이었죠. 그리고 이 붉은악마 티셔츠는…….”
“안타깝게도 패션적인 면에서는 0점을 줄 수밖에 없어요.”
바바라 커가 단호하게 말했다.
“맛이 있어도 이 티셔츠는…… 패션계의 악몽이죠. 저는 이 겉모습에는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동의했다.
“맛은 있지만 컨셉을 잘못 잡았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 정도입니까?”
진혁이 물었다. 그는 2002년 월드컵 티셔츠를 싫어하지 않았다.
‘귀환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나에게 현실을 일깨워 준 물건이지.’
선명한 빨간색 바탕에 검은색 악마 모양이 그려져 있고 노란색 이탤릭체로 2002 월드컵이라고 쓰여 있는 반팔 티셔츠다. 어머니가 사온 것은 월드컵 때가 아니라, 몇 년 후에 상자째 재고로 팔던 물건이었다. 잠옷으로 입으라고 아버지와 진혁에게 주었다. 진혁은 절대 입고 외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티셔츠가 편하고 부드럽다며 종종 입고서 집 앞 편의점에 가거나 했다.
‘그럼 어머니가 칠색 팔색을 하며 그 옷을 입고 나가면 자기는 모르는 사람 할 거라고 이야기하셨지.’
그래서 진혁은 그 티셔츠가 좋았다. 이것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어머니가 떠올라서 좋았다. 그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외출할 때 어떤 옷을 입는지, 오늘 점심엔 무엇을 먹을지- 그러한 아주 단순한 것이었던 시절을 연상하게 해 주었다.
진혁이 차분히 말했다.
“월드컵 때 사람들이 그 티셔츠를 많이 입었습니다. 공장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아주 많이 생산했죠. 어머니께서 남자 티셔츠를 박스 단위로 아주 싸게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분해서 옷을 사 오셨어요. 아버지 사이즈와 제 사이즈로 두 박스를 사 오신 건데, 박스를 열어보니 온통 붉은 악마 티셔츠인 겁니다. 가족 모두가 크게 웃었죠. 집에 그 티셔츠만 백 벌이 넘었는데, 어머니는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셨습니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는 일부 걸레로 쓰기도 했지만 결국 잠옷으로 입었죠. 입고 나갈 순 없는 옷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저희 가족들에게는 즐거운 추억 중 하나입니다.”
진혁이 씩 웃었다.
“그래서 저는 그 티셔츠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납니다. 그 기분 좋은 느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전달이 안 됐다니 안타깝군요. 저는 이 티셔츠를 자꾸 보니까 익숙하기도 하고, 계속 보니까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하거든요. 유행은 돌고 돌아서 복고풍이 다시 온다는데.”
바바라 커가 고개를 저었다.
“예. 어렸을 적 엉덩이를 따뜻하게 감쌌던 기저귀의 추억이라고 하면서 똥 기저귀를 내놓은 수준이에요. 어머니가 박스로 사 온 할인 티셔츠가 어째서 추억에 깊게 남아있다고 말하는지 공감하기도 어렵고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희주가 덧붙였다.
“정말로 맛있는데. 이번 채점 항목에서는 주제 연관성과 미적 측면이 각각 30퍼센트씩을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40%를 차지하는 맛에서 만점을 받아도, 너무 많이 깎였죠.”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인데 탈락이라니 안타깝군요.”
이희주가 한마디 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지옥에서 온 패션 센스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성공할만한 케이크였는데 아쉽게 됐지.”
‘뭐, 나름 지옥에서 돌아온 건 맞지만…… 패션 센스만 거기서 온 건 아닌데 말이지.’
진혁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아드레아노 존부는 밝은 미소를 띠며 웃었다.
“그러면 두 분이 모방해서 만들어야 할 디저트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드라이아이스가 피어오르며 바닥에서부터 자그마한 하얀 상자가 올라왔다. 일반적인 케이크 상자보다 한참 작은 상자였다.
“무슨 케이크 상자가 아이폰 정품 케이스만큼이나 작지?”
황용선이 작게 중얼거렸다. 바바라 커가 탄성을 질렀다.
“케이스도 아주 아름답군요.”
티아라 모양이 그려져 있는 케이스를 벗기자, 조그마한 케이크가 나타났다. 사각형 형태의 흰 케이크는 일반적인 반지 케이스 정도나 될 정도로 작았다.
“엄청나게 작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평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신나서 말했다. 좀처럼 미소 짓지 않는 그가 정말로 행복하게 웃을 때는, 디저트 계의 명품이라 일컬을만한 대작을 선보일 때뿐이다. 그는 자랑스럽게 칼을 들어 올렸다.
“작지만 안에 들어있을 것은 다 들어있죠. 안쪽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가 빵칼로 케이크를 절반으로 가르자, 세밀하게 쌓여있는 여덟 겹의 레이어가 드러났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켜켜이 쌓인 갈색과 흰색, 노란색과 분홍색, 잿빛과 검은색 등의 레이어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