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화
이희주가 물었다.
“원래 프로라면 다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아닌가요?”
“그렇지만 TV 무대, 첫 테이스팅 테스트 면접, 이런 걸 할 때는 누구나 당연히 긴장을 하지. 긴장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실수할만한 큰 무대 말이야. 그런데 저 녀석은 그런 긴장이 없어. 여기가 자기 집 앞마당이라도 되는 것처럼 편안하게 굴어. 그건 심리적인 여유가 있다는 건데…….”
“요리사에게 있어 아주 큰 재능이지.”
통역의 이야기를 들은 아드레아노 존부가 끼어들었다.
“갑자기 300인 예정의 연회에 400명의 손님이 몰려와도, 제정신인 페이스트리 쉐프는 주방에 있는 재료만을 사용해서 기적을 만들 수 있는 법이야. 저 청년이 그런 쉐프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라운드 3까지 긴장을 하는 법이 없어.”
“오. 아드레아노, 엄청난 호평인데요.”
“딸기를 통해서 내는 저 새빨간 색으로 뭘 하려는지 궁금하군. 설마 첫사랑이 신은 붉은 하이힐이라거나?”
“정열적인 탱고 드레스일지도 몰라요.”
“저 화려한 색감에 어울리는 멋진 케이크일 거야. 기대되는군.”
임진혁이 자아내는 산뜻하고 가벼운 붉은색을 바라보며 심사위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반면 미국파의 대표 주자인 브라이언 신이 만들고 있는 버터크림은 흰색 그대로였다.
아이보리색이나 상아색을 띠지 않은 순수한 흰색과, 약간 하늘색 톤이 들어간 연한 흰색, 그리고 희미하게 분홍색을 띤 흰색 등등 다양한 옅은 톤의 색깔 버터크림을 열 개가 넘게 따로 담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많은 것은 완전한 흰색이었다.
“브라이언 신은 버터크림을 이용한 케이크를 만들려고 하는군요. 확실한 건 색깔이 아주 옅을 거라는 겁니다.”
“진한 색을 만드는 것보다 연한 색을 만드는 게 더 어려운데 솜씨가 좋군요. 색깔의 마술사라고 할 만해요.”
컬러 매지션. 라스베이거스에서도 불리던 브라이언 신의 별명이다.
“흰색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신부의 웨딩드레스죠.”
“남자가 웨딩드레스를 추억으로 만들 일이 있을까? 브라이언 신이 기혼이던가요?”
그림자만큼이나 짙은 칠흑색 크림을 다시 섞기 시작하자 스텔라 위스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웨딩드레스 같습니다. 턱시도용 검은색을 따로 만들고 있잖아요?”
“흠.”
“임진혁이 레드, 브라이언 신이 화이트군요. 어디 다른 사람들은 어떤 테마로 음식을 만들고 있는지 볼까요?”
카메라는 초점을 바꾸어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말했다.
“루이스 강은 무지개색을 골랐군요. 저렇게 화려한 일곱 가지 색깔을 한꺼번에 쓰면…… 두세 가지 계열의 색감을 쓰는 것보다 통일감을 주기가 어려울 겁니다. 어지간히 감각이 좋지 않은 이상 촌스럽기 쉬울 텐데,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루이스 강이 마녀의 냄비처럼 새까만 액체를 정성 들여 젓고 있었다.
옆에 놓인 손바닥만 한 자기 접시에는 원색 식용색소로 만들어낸 붉은색과 주황색, 노란색과 녹색 등 무지개를 상징하는 일곱 가지 색깔이 담겼다.
언제 오븐 타이머가 울리는지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면서도 초콜릿을 젓는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초콜릿과 무지개색이 과연 어울릴까요? 한동안 강남에 저 레인보우 케이크가 유행했지만 보통 화이트 크림하고 같이 내놓았는데.”
주영모 쉐프가 말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강남에 유행하던 레인보우 케이크가 무엇인지 물었다.
사회자 이희주가 손을 들어 올렸고, 곧 거대한 스크린에 유명한 카페의 레인보우 케이크가 나타났다.
새하얀 크림으로 에워싸인 케이크는 단면이 잘려있어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겉은 희되 안쪽은 무지갯빛으로 화려하다. 그 케이크를 본 아드레아노 존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 케이크를 말하는 거군요.“
“보신 적이 있으시죠?”
“디저트 팩토리가 한국 진출하기 전에 살펴봤던 한국식 케이크 중 하나입니다. 시각적으로 보기 좋아서 눈길을 확 끌죠. 나쁜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붉은색 그리고 흰색. 검은색과 무지개색을 쓰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을 보고 계십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 색깔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이희주가 크게 외치며 사회자 석에서 내려갔다. 그는 제일 가까이에 있는 주방 앞으로 다가갔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올려 묶은 유키코 김이 고개를 들었다. 마이크를 갖다 대며 이희주가 질문했다.
“유키코 씨는 어떤 케이크를 만들고 계시지요?”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제누와즈에요.”
제누와즈는 스펀지케이크라고도 하는, 가장 기본적인 케이크 시트다.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유키코는 깨끗하게 씻은 무화과를 잘게 잘라 껍질을 벗기며 다듬는 손길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어떤 옷을 만드실 생각이신가요?”
“조화와 화합을 이루는 케이크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가 밝게 웃었다. 타이머가 삑 하고 울리고, 유키코는 끓는 설탕물의 온도를 줄여가며 면밀히 살폈다. 이희주가 마저 웃으며 말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진혁은 지금 이곳이 무대 위라는 사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만들어야 하는 케이크가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설탕 대신 꿀을 버터에 넣으면서 점도가 너무 끈적거리지 않도록 스탠드 믹서 대신 손을 사용해서 저었다. 기계처럼 정확하게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손목을 돌리는 그 모습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신선한 달걀을 톡 깨어 부어 넣으며 달걀이 완전히 반죽에 섞여들어 갈 때까지 쉬지 않고 젓는다.
미리 체 쳐 놓은 가루들을 순서대로 천천히 부어 넣다가 마지막에는 아까 만들어 둔 버터밀크를 섞었다. 꿀과 밀가루, 우유와 버터 향내가 섞이며 따뜻하고 달콤한 봄 향기가 났다.
진혁은 색깔을 내기 위한 특별한 재료를 넣은 다음, 12인치 케이크 틀 세 개에 반죽을 부었다.
반죽이 따라지는 광경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케이크가 구워지는 동안 진혁은 장식을 위한 재료를 준비했다.
‘단순히 장식이 아니라, 먹을 때 맛있게 어울리는 장식이었으면 좋겠어.’
그는 노란색 초콜릿 덩어리를 조물거리며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노란색 초콜릿으로 이탤릭체 글씨를 만들고 나서는 검은색 초콜릿 덩어리로 선을 빚어냈다. 숨김맛으로 넣을, 가루 낸 크림치즈까지 준비해둔 다음에는 할 일이 없었다. 이제 케이크가 구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진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키코 김은 나란히 누운 두 명의 남녀를 그렸다.
지극히 평면적인 도안으로, 납작한 케이크 위에 검은색으로 선을 따라 그려둔 것이다. 일본식 기모노를 입은 여성과 한국의 한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었다.
‘한일 교류를 상징한 뜻은 좋은데 디자인이 너무 안이한 건 아닌가.’
납작하고 평면적인 그 케이크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정말로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것은 브라이언 신이 만들고 있는 8단 웨딩 케이크였다.
‘8단? 거의 65센티미터 높이는 되겠는데.’
진주처럼 하얀 구슬이 촘촘히 박힌 케이크는 길게 퍼지는 머메이드 라인의 웨딩드레스 모양이었다.
아까 만들고 있었던 검은색은 어디로 갔는지, 케이크는 온통 희기만 했다.
목이 있어야 할 위치 위에는 희고 평평한 표면이 있었으며 그 위에 금색 고리가 있었다.
브라이언은 금색 고리 위에 조심스럽게 하얀 구슬을 올렸다. 아몬드를 넣어 굳힌 희고 둥근 초콜릿이 위에 올라가자, 일본산 최고급 진주 같은 모양이 되었다.
타이머가 울리기 직전, 진혁은 오븐에 다가가 타이머를 멈추었다.
사실 그는 타이머가 없이도 정확하게 케이크가 언제 구워질지 알 수 있었다.
젓가락으로 반죽 안쪽을 찔러보지 않아도, 온화하고 따뜻한 열기가 케이크 안쪽에 골고루 퍼져서 케이크는 촉촉하게 익어 있었다.
세 개의 케이크를 빵틀에서 분리해내고서 그는 케이크 중간중간에 크림을 바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한 겹은 희미한 치즈 향의 크림치즈, 다른 한 겹은 깔끔한 생크림. 그리고 다시 한 겹은 크림치즈로 마무리했다.
둥근 빵틀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빵틀을 사용한 이유는 여기서 케이크를 잘라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다.
진혁은 빵칼을 들어 대범하게 빵을 잘라냈다. 좌우측 하단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내고 윗부분과 가운데를 다듬자 반팔 티셔츠 모양이 되었다.
진혁은 빵칼을 쥐고 위쪽 모양을 조심스럽게 깎았다.
모서리는 날이 서지 않게 둥글어졌고, 목 모양이 생기게 둥글게 파냈다. 같은 납작한 타입 케이크지만 유키코 김의 것과 달리 입체적인 모양이었다.
‘잘 되고 있어.’
진혁은 미리 만들어둔 버터크림을 손끝에 묻혀 향을 맡았다. 상큼한 딸기향이 맡기에 좋았다. 색깔과 질감 또한 적절했다.
케이크의 겉에 바르는 버터크림은 생딸기의 겉 부분만 자르고 분리해서 섞어 넣어 색소 없이도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신경 써서 가장 맛좋게 농익은 딸기만 골라내어 섞은 덕분에 붉은 버터 딸기 크림은 진혁이 충분히 만족할만한 맛이었다.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새콤한 맛이다. 평온한 손길로 그는 케이크에 크림을 발랐다.
진한 붉은색 크림은 튀어나온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게 케이크 표면을 덮었다.
미리 만들어둔 노란색과 검은색 장식은 붉은 크림에 파묻혔고 종이에 인쇄된 글자처럼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진혁이 케이크를 완성하고 난 직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그는 빙긋 웃었다.
‘잘 됐어.’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 ◈ ◈
바바라 커는 케이크 앞에서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스카프를 넘겼다.
수십 가지의 원색이 정교하게 꼬여있는 스카프는 단정한 노란색 원피스에 잘 어울렸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달콤한 케이크들이 제 앞에 놓여 있다니 행복하군요. 다이어트는 잠시 잊어야 할 때가 왔어요.”
제일 먼저 심사받은 것은 브라이언 신이었다.
정교하고 우아한 머메이드 웨딩드레스를 본 바바라 커는 감탄을 계속했다.
“너무나 아름다워요. 이 케이크는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입고 싶을 정도예요.”
“8살짜리 아이라면 입을 수도 있겠는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농담을 던지자 바바라 커가 활짝 웃었다.
“특히 이 진주 반지, 이건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제시, 제 여자친구 제시카 린든에게 청혼할 때 진주 반지를 주었습니다. 저희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결혼할 계획이거든요.”
브라이언이 좁은 어깨를 애써 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저는 한국에 부모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제시와 저의 결혼식에 친부모님도 와 계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결심했죠.”
“너무나 아름다운 사연입니다.”
바바라 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녀가 포크를 들었다. 아드레아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 케이크가 사연만큼이나 맛도 아름다운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