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화
불량 식품이나 인스턴트 식품을 제한하시던 엄격한 부모님도 그날 먹는 초콜릿은 뭐라고 하지 않았다. 단것을 거의 먹지 못하다가 잠시나마 허락받는 그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맘속 한구석이 몽글몽글하고 따뜻해진다.
그녀는 작은 노랑 번개 조각에 포크를 가져갔다.
“이 초콜릿도 맛있군요.”
“그건 사실 맛보다는 모양으로 먹는 건데요.”
“그래도 맛있네요.”
진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약간 실망했다. 그는 정지숙의 미각에 약간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래도 손님 중에서는 제일 미각이 뛰어난 사람인데. 흠.’
정지숙은 오늘 케이크를 먹고서 ‘맛있네요. 이것도 맛있다. 저것도 맛있다.’라는 이야기밖에 하지 못했다. 그것은 진실이었지만 진혁에게 도움이 되는 종류의 피드백은 아니었다.
‘갈아버린 크랜베리는 양이 너무 적었나 보군. 맛을 거의 느끼지 못한 것 같아.’
방송의 마지막 부분이 방영되고 있었다. 패자부활전에서 두 사람이 모두 탈락하고, 안토니오가 뛰쳐나온다. 그리고 곧 안토니오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조금 전에 쇼에서 탈락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밝은 표정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어떤 것을 얻으셨습니까?”
사회자 이희주가 묻자 안토니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에 나보다 멋진 쉐프들이 많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따라잡아야 할 사람들이 많으니 신이 나는군요.”
그리고 그가 윙크를 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레시피도 얻었지요.”
“아주 특별한 레시피라면……?”
“보면 놀라실 겁니다.”
안토니오가 낯익은 종잇조각을 펄럭였다. 진혁이 적어 준 레시피였다.
“재능있는 쉐프가 개발한 위 절제한 개 환자식 레시피인데요……. 이걸 기반으로 레시피를 새로 개발할 겁니다.”
광대가 위로 올라가고 입술이 크게 벌어진다. 흐트러진 검은 곱슬머리를 긁적이며 안토니오는 쾌활하게 웃었다.
“개량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지금 벌써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는데, 좋은 효과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흠, 저런 인터뷰를 했단 말이지.’
특별히 비밀로 하라고 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주목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프로그램은 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진혁이 라운드 2에서 제일 잘했다는 평을 받자 손님들 모두가 기뻐하며 성대한 박수를 보냈다. 시식이 끝나고 손님들이 전부 돌아가고 나서, 특별 근무를 한 김가영과 서창덕, 백진영 모두 지쳐 있었다.
“76명의 손님은 쉽지 않네요.”
“빵은 정해진 한 가지밖에 없고 주문받은 건 음료밖에 없는데도 괜히 더 힘들었어.”
“창덕 오빠도 고생했어.”
김가영과 서창덕이 서로 위로하고 나서 백진영이 흰 봉투를 꺼냈다.
“두 사람 다 오늘 늦게까지 일하느라 고생했다. 이건 오늘 간식비야.”
“간식!”
“우와! 백 사장님 감사합니다!”
“두 사람. 고생했어.”
진혁 역시 격려하는 말을 건넸다. 아르바이트생 두 사람이 기뻐하면서 돌아가고 나서, 백진영이 임진혁에게 말했다.
“트위터에 네 팬클럽 생긴 거 알아?”
“팬클럽……?”
“완전히 파가 갈렸어. 유럽의 해외파 루이스 강하고 미국식 자유로운 빵을 선보이는 브라이언 신. 그리고 정통 일본식 제빵을 선보이는 유키코 김. 다들 한국계 성씨를 갖고 있지만 혼혈에 입양에, 진짜 국내파 한국인인 임진혁이 나이에 비해 엄청난 실력파라고, 다들 난리야.”
“진정한 한국인이라서 팬이 생긴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애초부터 국내파 절반을 선발했는데 그중에서 어떻게 나 혼자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지? 지금 남은 사람 중에 토종 한국인이 나만이 아니잖아. 전미완, 이용태. 임영웅. 황용선. 넷 다 한국인이고.”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키코 김은 한국계 혼혈이고, 브라이언 신은 핏줄이 한국이고. 루이스 강도 어머니인가 아버지인가 둘 중 하나가 프랑스인이고 하나는 한국인이잖아."
"너,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 꽤 잘 알고 있네."
"지금 눈앞에 서류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 말하는 토종은 교육을 말하는 거야."
"교육?"
"네가 생각하는 황용선은 르꼬르동 블루 파리 출신이고. 다른 사람들도 다 해외 유학파거나 해외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바다 너머로 안 나가본 건 진혁이 너밖에 없다던데?”
“그건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건데.”
기억나는 생애의 대부분을 압록강 너머 중원에서 보낸 진혁이 서늘하게 말했다. 백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운정 아저씨가 너는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어서 여권도 없다던데? 몰래 갔다 온 적 있어?”
“……없지.”
백진영이 방금 내린 아인슈페너 한 잔을 건넸다.
“자. 오늘 고생했다.”
언제나 마시는 대로다. 향긋한 향이 풍기는 따끈따끈한 커피를 받아쥐며 진혁이 말했다.
“고생은 뭘, 언제나 하던 건데.”
백진영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 베이킹 쇼, 확실히 돈은 됐는데 두 번은 못 하겠다.”
임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사람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행사 진행 자체가 쉽지만은 않았다.
“직원을 더 고용하든가, 더 넓은 공간에서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디 보자. 나중에 4강이나, 그렇게 좁혀졌을 때 아예 큰 곳을 빌려서 하자고.”
백진영이 손뼉을 쳤다.
“전에 삼촌 잔치할 때 했던 그 호텔 정도면 되려나.”
“사람이 500명이나 오겠냐고.”
“4강전이면 오지. 디저트 서바이벌 쇼가 얼마나 인기 있는 쇼 프로인데? 시청률도 수직 상승하고 있고, 해외파 국내파 나뉘어서 팬클럽들이 서로 싸워대는 통에 노이즈 마케팅도 만만치 않아.”
“팬클럽이 싸운다고?”
“이것 봐.”
백진영이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보여주었다.
Sar2019 : 원래 빵은 프랑스 빵 아니냐? 전통 빵을 만드는 루이스 강이 최고라고.
┗ 쏘빵 : 근거도 없는 이야기 집어치워. 지금 제일 훌륭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유키코 김이다!
DearSweet : 브라이언 신이 만드는 분자요리는 다른 사람들이 만드는 구식 요리들보다 100년은 앞서있다고. 프랑스 빵이라고 해봤자 구태의연하게 백년전 유행 따라가고 있는 거 아니냐?
┗ 라라란도 : 유키짱 조그맣고 예뻐! 150cm의 꿈! 내가 응원해!
┗ 쏘빵 : 아니 유키짱 좋지만 빵만드는 실력을 칭찬하라고. 키는 왜...?
소리바다가그립다 : 그래도 누가 봐도 제일 좋은 건 임진혁이 만든 비바람이 몰아치는 빵 아니야? 완전히 예술작품이던데.
┗ 진발하기 : 진혁♡군이 만든 케이크 한입만 먹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 옥빵상제 : 나는 먹어봤지롱.
┗ Sar2019 : 조금 맛있어 보이긴 했어. 예술적이면서 맛있어 보이기가 쉽지 않은데.
┗ 소리바다가그립다 : 심사위원들이 먹는 거 보니까 입에서 저절로 침이 고이더라. 그 케이크 돈 내도 좋으니까 팔았으면 좋겠는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네.”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쏘빵과 라라란도라는 사람의 글을 읽었다. 백진영이 킥킥대며 스크롤을 내렸다.
“유키코 김이 작고 귀엽고 미인이니까 팬이 꽤 있어. 실력도 나쁘지 않고.”
“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브라우니 케이크를 파는 건 문제가 아닌데. 방송 도중에는 팔 수가 없어.”
“아. 그런 계약이었지?”
“뭐…… 당장 메뉴에 추가할 이유는 없지만. 프로그램 전체 방영이 끝나고 메뉴에 추가하는 건 어렵지 않지.”
“좋아!”
백진영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의 손에 쥔 도자기 머그잔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커피 잔을 바라보던 백진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촬영, 꼭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음, 그거야 뭐.”
진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 ◈ ◈
“이번 라운드 3의 주제는, 패션입니다!”
게스트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패션모델, 바바라 커가 우아하게 말했다. 이희주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의미 있는 의상을 맛있게 만들어 주세요. 재료에는 제한이 없지만, 의상은 반드시 아름다워야만 합니다.”
바바라 커가 입은 검은 이브닝드레스는 한국의 방송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X자 형으로 가슴만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당당하게 등장했지만 곧 반짝이는 은빛 숄을 둘러 쇄골과 어깨를 가렸다. 방송 심의위원회를 염려한 PD의 조언이었다.
9cm 높이에 달하는 스틸레토 힐은 붉은 새틴으로 장식되었고 진주가 박혀있다. 또각또각 구두 울리는 소리를 내며 등장한 커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추억의 패션. 그리고 그 옷의 맛에 어울리는 케이크를 보여주세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맛도 좋아야 합니다.”
“맛, 맛 좋아야 하죠.“
아드레아노 존부가 유쾌하게 화답했다.
“케이크의 아름다움은?”
“맛입니다!”
방청객들이 일제히 외쳤다. 아드레아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제한 시간은 3시간입니다. 여러분의 실력을 보여주세요!”
‘그렇다면 그 옷을 만들어야겠군.’
진혁은 듣자마자 주제를 바로 정했다. 그는 선명한 붉은색을 낼 생각이었다. 인공색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색을 정하는 그의 스타일은 라운드 1과 2에서도 뚜렷이 드러난 바 있다. 그 스타일은 건강한 음식을 원하는 이들로부터 인터넷상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만 진혁 자신은 몰랐다.
그는 천천히 버터를 부드럽게 풀어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절한 속도로 계속해서 휘저어주면서 버터가 마요네즈처럼 부드러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이 버터는 버터밀크가 되어 그가 만들려는 케이크에서 기둥 역할을 할 것이다.
미리 골라둔 밀가루와 코코아 가루, 베이킹소다는 따로 체를 쳐서 걸러 두었다.
빵틀에는 크기에 맞는 유산지를 깔았다. 유산지를 깔았기 때문에 별도로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해서 빵틀에서 케이크가 쉽게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 처치를 할 필요가 없다. 다른 이들이 긴장해서 실수하는 동안에도 진혁은 실수 하나 없이 춤추는 무희처럼 유려하게 동작을 이어갔다.
“임진혁 쉐프를 보라고.”
주영모가 중얼거렸다.
“무서운 게, 쟤는 긴장이라는 게 없어. 실수를 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