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4화
‘처음에는 그런 줄 몰랐지만 말이지.’
민병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에 일봉이 처음 ‘작은 사장님’에 대해서 말했던 때에는 고작 애송이 한 명 가지고 뭐 그렇게 칭찬하나 싶었다.
이제 반년 전이다. 고등학교 후배인 유일봉 녀석은 진혁을 소개하면서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막 군대 갔다 온 형인데, 제빵의 천재인 데다가 사업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고 카리스마도 넘친다고 했지. 그 형이랑 같이 일하면 뭐든지 잘 된다고.’
당시 그는 일봉의 말을 믿지 않았다. 누군가 제빵의 천재일 수도 있고 사업의 천재일 수도 있지만, 그 두 가지를 전부 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도 꽤나 천재 소리를 들었다. 박사 과정을 밟으며 꼭 학교에 남아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안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그렇기에 ‘천재’라는 인간들이 얼마나 편향적이고 외골수적인지 안다. 자신이 그렇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임진혁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제빵이 아니라 뭘 했어도 잘했을걸.’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련하게 모든 것을 고려해서 상황을 평가했다.
사람을 잘 다룰 뿐만 아니라 돈이 될 만한 것을 골라내는 안목이 있다. 거기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빵과 과자를 구워내는 재능을 갖추었다.
처음 녹색 농부 조합은 200여 명의 구독자를 데리고 시작했다. ‘세 꾸러미’라는 아이템이었다.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있어 제일 어려운 점은 잘 자란 농작물이 판로가 없을 때다.
겨울이 되어 경작을 쉬어야 하는 것보다, 잘 자라난 작물을 팔 곳이 없어 썩어가는 상황이 더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종자를 심은 시점부터 고객을 모아서, 작물을 키우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이전에는 농사가 실패하면 감이나 고구마, 호박을 내다 파는 것이 오히려 손해인 적이 있었다. 그럼 팔지 못하고 그냥 썩히며 울어야 했다.
돈독이 오른 중간상인에게 넘기지 않아도 되는, 안정적인 판매 경로가 생기자 모두가 기뻐했다.
미리 받은 소액의 돈이 목적이 아니다. 농부뿐 아니라 고객도 즐거워했다.
고객은 주말에 원하는 때라면 언제라도 자신이 살 감자를 보러 농장에 올 수 있었다. 고객에게 신뢰감을 주자 그들은 늦게 감자를 받아도 기뻐했다.
주말농장에서 직접 감자를 캔 고객은 못생기고 울퉁불퉁한 녀석도 자기 것이라며 흥겨워했다.
민병철은 단순히 유기농 야채와 채소를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었기에 두 번째는 확실한 대안을 가지고 시작한다고 믿었다. 체험과 구독, 두 가지를 합쳐 식물 꾸러미를 배달하면서 사업이 커졌다.
유기농 야채를 골고루 집 앞까지 편하게 갖다 주는 사업 모델은 좋은 아이디어라는 평가를 받았고 20여 명이던 구독자 수를 200여 명으로 올렸다.
큰 성공은 아니었지만 열 명의 농부 전부가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당장 빚을 얻어야 할 처지였던 조감경이나 박정돈은 특히 더 그랬다.
그리고 임진혁의 냉동 샌드위치가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구독자 수가 두 배, 다섯 배, 열 배가 되는데 3개월이 안 걸렸어.’
구독자 수는 용이 날개를 단 것처럼 솟구쳐올랐다. 갑자기 매출 숫자 단위 수가 달라졌으며 샌드위치를 팔아달라고 하는 사람도 늘었다.
한정 메뉴로 홍시 타르트를 샌드위치와 함께 1주간 팔았을 때, 강화 장군감 홍시를 찾는 전화도 늘었다.
녹색 농부 조합은 가장 성공한 조합으로 일컬어지며 유기농 농사를 짓고자 하는 농부들이 몰렸다. 전에는 가입할 사람이 없던 모임이지만 지금은 다들 기를 쓰고 들어오려고 하는 조합이다.
‘전부 다 임진혁 은인 덕분이지.’
조감경은 임진혁을 은인이라 칭했다. 강화 장군감을 키운 것은 자신이지만, 홍시를 타르트로 만들어 다시 태어나게 만든 것은 임 쉐프님이라고 했다. 그 말에 민병철 역시 동의했다.
‘녹색 농부 조합을 만든 건 나지만, 그린 워터 샌드위치를 성공시킨 건 임진혁 군이야.’
녹색 농부 조합이 아니더라도 유기농 돼지고기나 야채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냉동 샌드위치를 임진혁처럼 맛있고 세련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 없다.
민병철이 멍하니 옛 생각을 하는 동안 임운정이 리모컨을 찾았다.
“이모, 여기 리모컨 없어? SBC를 보고 싶은데.”
“SBC요? 제가 틀어드릴게요.”
백여 명이 넘게 와 있는 큰 손님 무리다. 아주머니는 바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주었다. 박정돈이 물었다.
“임 사장님, 뭐 보시는 프로그램이 있으십니까?”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민병철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공중파에서 방송하는 디저트 쇼에 임 쉐프님이 나온답니다.”
그 말에 다른 아홉 명의 농부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린 워터 샌드위치를 광고하러 나오는 건가유?”
양봉 농가의 유봉인이 주름진 얼굴로 물었다. 이십 해 동안 벌을 쳐온 그는 100% 아카시아꿀과 밤꿀, 잡화꿀을 길러내는 꿀의 명인이다. 임운정의 빵집에 이어 H&J 카페 앤 베이커리에서도 유봉인의 꿀을 받는다. 진혁은 그 꿀이 자연의 정기를 받아 아주 좋은 꿀이라고 하면서 메이플 시럽과 설탕 대신 쓴다고 했다. 임 씨 부자는 유봉인의 양봉장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큰 고객이 되었고, 그는 항상 임 씨 집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칭찬을 입에 올렸다.
“아니, 얘가 텔레비전에서 빵을 만드는 쇼에 나온다고 하더라고. 디저트 서바이벌인가 서바이벌 디저트인가 뭔가인데.”
임운정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리 언뜻 이야기를 들었던 조감경이 손뼉을 쳤다.
“은인이 제빵사로 텔레비전에 나오신다니, 이제 전국에서 은인 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겠구만. 거 우리 광고도 되는 것 아닌가? 간접 광고.”
민병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저희도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나온 쉐프님이 우리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하고 이후 홍보에 활용할 계획입니다. TV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선전하시느냐에 따라서 홍보 효과는 달라지겠죠. 임 쉐프님한테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TV를 향했다.
“임 쉐프님이 만드는 빵이야, 뒤지게 맛있지. 전국의 누구를 데려와도 꿀리지 않을 거라고.”
박정돈이 튀어나온 배를 두들기며 호쾌하게 말했다. 민병철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임진혁 군이 어딜 가서 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어. 우승까지 올라간다면 샌드위치 홍보에는 더할 나위 없지만…….’
민병철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매운탕에 수저를 가져갔다. 촉촉한 아귀 매운탕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한 국자 떠놓은 아귀 매운탕을 맛보며 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린 워터 샌드위치 같은 맛이 나지 않아.’
샌드위치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담백하고 질리지 않으면서도, 먹고 나면 기운이 났다. 다른 음식들은 그런 맛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예전에 먹었던 다른 음식들을 점점 더 줄이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것을 느낀다면, 잘 팔릴 수밖에 없지.’
처음에는 진혁이 샌드위치에 마약이라도 넣은 게 아닌가 하고 성분 분석을 했다. 하지만 정밀 성분 분석을 끝낸 결과는 그냥 평범한 유기농 샌드위치라는 것이었다.
“후우.”
민병철에게서 불안한 기색을 읽은 임운정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우리 아들이 일찍 탈락할까 봐 걱정해 주는 건가? 걱정 마, 잘할 테니까.”
임운정은 아들을 믿었다. 아들이 우승하리라고 믿는 것이 아니다. 진혁이 녀석이 곧 탈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탈락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노력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쇼를 시청할 수 있었다.
‘지금쯤 마누라도 처가댁 식구들하고 같이 TV를 보고 있겠지?’
원래는 부부 동반으로 올 모임이었다. 하지만 직장에 휴가를 내고 TV에 나오는 조카를 보러 온다던 큰 처형과 작은 처형, 셋째 처형이 오기로 해서 운정만 이 자리에 오고 부인은 집에 머물기로 했다.
“아닙니다, 큰 사장님. 진혁 군이야 알아서 잘하겠죠.”
민병철은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임진혁이 텔레비전 쇼에서 일찌감치 탈락할 리가 없어. 쇼에서 1등을 하면 디저트 팩토리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던데. 우승한 임진혁이 더 이상 녹색 농부 조합과 함께 일하려 하지 않으면 어쩌냔 말이지.’
어느새 누구보다도 더 진혁의 실력을 믿게 된 민병철이었다.
시즌 1의 오프닝 화면이 떠오르며 호쾌한 음악이 순간적으로 가게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TV를 향했다.
34장
TV 화면 속의 임진혁은 긴장하지도 않았는지 태연하게 서 있었다. 못 보던 사이에 더 잘생겨진 조카를 보며 이모들이 신나 했다.
“어머, 어머, 저기 진혁이 좀 봐.”
큰언니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아는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해하는 소박한 시골 여인이다. 계절 되면 직접 기른 배추로 김장하고 묵힌 메주를 떠다가 장을 담그는 그녀는 진혁이 9시 뉴스에 나왔을 때만 해도 신나서 팔짝팔짝 뛰었다.
거기에 지금 정규 프로그램에서 진혁이 나오는 걸 보니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우리 귀한 조카 녀석! 은효 네가 진짜 잘 키웠다.”
진혁의 어머니인 장은효는 저절로 입이 벌어지며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아들, 잘한다!”
그녀 역시 손뼉을 치며 진혁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서 진혁이 차분하게 양손으로 반죽을 하는 동안, 옆에 있는 다른 이들 역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여자 한 명이 다 익은 빵이 빵틀에서 나오지 않아 비명을 질렀다.
“어떡해! 어떡해!”
공황을 일으켜 빵틀을 조리대에 부술 듯이 내리쳐도 빵은 나오지 않았다. 시계를 몇 번이고 확인하던 그녀는 결국 빵칼을 들어 틀과 빵 사이를 갈랐다. 하지만 단단하게 붙어버린 빵은 틀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빵을 떼어내려 했지만, 빵은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외국인 여자 심사위원이 차분히 말했다.
“스프레이를 뿌리지 않고 빵을 구웠군요.”
“저러면 틀에서 안 나오나 봐요.”
사회자 이희주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다시 구워야죠.”
“시간이 모자랄 텐데요.”
“당연히 모자라죠.”
스텔라 위스커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프로페셔널이라면 해서는 안 될 실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