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화
시선은 보고서를 향하나 그가 실제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민병철이었다. 심박이 얼마나 빠르게 뛰는지, 불안해하며 땀을 흘리고 있지는 않은지, 눈을 피하지는 않는지 확인한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군.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야.’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려면 거절하고 반응을 보는 것이 빠르다. 진혁이 말했다.
“공장을 세우는 건 당장 말씀드리기는 어렵군요. 너무 시기상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민병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불만스러움이나 불쾌함, 부정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렇지만 민병철 조합장님이 그리시는 큰 그림에는 항상 감탄하고 있습니다. 공장 설립 건은 섣불리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일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예, 임운정 사장님과 의논하신다고요!”
민병철이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웃었다. 그가 기운차게 손뼉을 쳤다.
“임 쉐프님이 임 사장님과 의논하신다는 건, 계획이 맘에 드신다는 거니까요.”
빠르게 뛰던 심장 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돌아왔다. 진혁은 자신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업은 아예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도 않았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민병철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흐뭇하게 말했다.
“임 사장님과 이야기하시고 알려 주세요. 투자하겠다는 투자자들도 붙어 있고 시공사도 알아본 상태입니다. 오케이 하시면 바로 진행하죠.”
민병철이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저희 종이 포장과 봉투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케이스로 바꾸는 문제는.”
“그건 안 됩니다.”
진혁이 손을 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환경 보호를 생각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생분해되는 플라스틱 따위의 자료를 주섬주섬 꺼내는 민병철을 보면서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환경 보호 따위가 아닙니다.”
민병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요?”
“맛이 없습니다.”
“예?”
“플라스틱 용기는 확실히 오래 두어도 야채 물이 새어 나오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죠. 하지만 종이보다 빵의 맛에 영향을 더 끼쳐요. 종이인 편이 낫습니다.”
민병철이 입을 살짝 벌렸다.
“저는 종이를 고집하시는 게 환경에 대한 철학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종이와 플라스틱에서 맛 차이가 나는 줄은 몰랐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맛이 아예 달라집니다. 혀가 예민한 사람들은 느낄 겁니다.”
“저는 모르겠지만요.”
이제는 더 이상 호리호리하다고는 할 수 없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테가 햇빛에 빛나 반짝였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맛, 에 관해서는 전부 임진혁 쉐프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으니까요. 포장재를 바꿀 수 없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면 알겠습니다.”
그는 플라스틱 용기의 가격이 얼마나 저렴하며 관리가 용이한지, 방수 종이 포장지와 비교되는 장점들을 정리한 서류를 다시 집어넣었다.
병철이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텔레비전 출연을 축하드립니다. 트레일러 영상에서도 꽤 비중 있게 나오시던데요?”
‘사업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가 보군.’
민병철은 사업 이야기와 개인사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인간으로, 이런 식으로 잡담을 꺼낸다는 건 사업적 제안이 전부 끝났다는 이야기다. 진혁이 웃었다.
“별거 아니죠.”
“저희 샌드위치에 모델 한 번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농담처럼 건넨 제안에 진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그때 가서 따로 의논해보죠.”
샌드위치가 잘 팔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못할 것은 아니지만 굳이 지금 장담할 이유도 없다.
“역시 쉽지 않다니까요. 하하하하!”
민병철이 크게 웃었다. 진혁이 말했다.
“그리고 더 말씀하실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잊었던 것을 생각해냈다는 듯 민병철이 다른 봉투를 꺼냈다. 얇은 서류 봉투에서 꺼낸 서류에는 타 회사의 유사한 샌드위치 제품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함께 살이 농사 조합에서 김봉식이라는 농부가 자체적으로 다른 쉐프님을 초빙해서 메뉴를 개발해서 유사한 샌드위치를 만들었습니다만, 당연히 쉐프님이 개발하신 것만큼 맛있지 않았습니다. 저희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는 있는데 곧 망할 겁니다.”
진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별일 아니로군요.”
“예, 처음에는 좀 긴장했지만요.”
“다음부터는 미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진혁은 상대를 면밀하게 살폈다. 이 사람이 진행하는 사업에 어머니와 아버지, 자신까지 한 발을 걸치고 있다. 그가 덧붙였다.
“저도 손을 써볼 방법이 있을 테니까요.”
경쟁사를 상대한 적은 없지만 경쟁하는 정파를 무찌른 적은 있다.
‘정보를 수집한 다음에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릴 수도 있고. 방법은 많지.’
순수하게 강한 무력을 통해 정면돌파하기보다 정보전을 통해서 미리 주춧돌을 무너뜨려 놓은 다음에 쳐들어가는 것이 도산검림 진혁의 방식이었다. 진혁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민병철이 밝게 웃었다.
“더 좋은 샌드위치를 개발한다든가요? 그건 환영입니다! 언제라도 부탁드립니다.”
“예,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지요.”
◈ ◈ ◈
진혁이 아버지, 어머니와 의논을 마치고 민병철에게 공장을 지어도 좋다고 이야기한 날로부터 2주가 지났다. 녹색 농부 조합은 총 회의를 마치고 회식을 시작했다.
까망돼지 농장을 경영하는 박정돈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플라스틱 포장을 하면 맛이 없다고? 임진혁 군 미각은 포장 맛까지 느낀다는 소린데.”
녹색 농부 조합도 벌써 제42회 회합이다. 이전에는 많지 않은 인원이 동호회처럼 모여 있었지만, 인원도 늘고 사업의 규모가 커진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농장 경영에 참여하는 가족들을 포함하면 거의 100여 명에 달한다. 전에는 병철이네 곱창집에서 간단하게 열 몇 명이 모여 회식을 했지만 지금은 그 식당에 사람이 전부 들어가지 않아, 3층짜리 고깃집을 통째로 빌려서 회식을 한다.
그중에서도 1회부터 참여했던 핵심 멤버들은 1층의 방 하나에 다 같이 모여 있다. 당시 이너서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샌드위치 사업 이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임운정 ? 임진혁의 아버지 역시 여기에 왔다.
“내 아들이 그런 소리를 했어? 하여튼, 미각 하나는 알아준다니까.”
임운정은 팔팔 끓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덜어 밥 옆에 놓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민병철은 자글자글하게 익고 있는 돼지갈비를 구웠다. 민병철이 웃으며 말했다.
“임진혁 쉐프님 말씀은 들어야죠.”
좋은 대학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것과 농사를 잘 짓는 것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책상물림으로 자라 귀농한 민병철은 처음에 벌레와 기후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해 농사를 망쳤다. 마을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농장을 꾸렸고, 아쿠아포닉스라는 신진 농사 기법을 쓰면서 정부의 투자를 받았다. 아쿠아포닉스 그린 워터 농장이 성공한 이후에 민병철은 다른 농부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녹색 농부 조합을 창립했다. 그는 핵심 멤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플라스틱이 아니고 그대로 종이로 쓰기로 했구만?”
조감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총무인 그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식 회의는 아니지만 마치 회의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종이 포장을 유지하자는 이야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임운정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럼 그렇게 해야지.”
부회장으로 재직 중인, 까망돼지 농장의 박정돈도 동의했다. 그는 까망돼지를 풀어 키우는 농장의 주인으로 이전에는 만성 적자 때문에 농장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까망돼지 베이컨을 이용한 샌드위치가 대박이 나면서 지금은 한숨 돌렸다. 그는 임진혁과 임운정 두 사람을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다.
“아무렴, 진혁 군 말대로 합시다.”
무말랭이를 집으며 조감경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감 씨처럼 퀭한 새까만 눈동자에 비쩍 마른 얼굴을 한 그는 웃는 일이 없었다. 500여 년간 키워온 강화 장군감을 보존하기 위해 식물 특허를 냈다가 반려당했고, 박정돈의 소개로 녹색 농부 조합에 들어왔다. 민병철의 도움을 얻어 강화 장군감의 특허를 받는 데 성공했고 지금은 누구보다도 강렬한 민병철의 지지자다.
까망돼지 농장의 박정돈, 강화장군감 농장의 조감경을 포함해 여기에 있는 열 명의 창립 멤버 전부가 임진혁 쉐프를 열렬히 지지한다. 임진혁은 이 녹색 농부 조합의 멤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두 그의 의견을 황제의 것처럼 받들어 모셨다. 모두 동의한 것을 눈여겨본 임운정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다들 우리 아들을 엄청 크게 봐주니까 내가 고맙네. 아직 어린 핏덩인데 여기 고문 같은 역할을 하고 있구만그래.”
지금은 성실하고 일 잘 하는 노력꾼 아들 녀석이지만, 어렸을때는 어디에 갖다놔도 부족함 없는 말썽쟁이였다. 아들의 변한 모습을 보는 것도 놀랍지만 외부에서 아들을 평가하는 것이 바뀐 것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 임운정은 녹색 농부 조합에서 진혁을 높게 평가할 때마다 놀랍고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어색했다.
“핏덩이는 무슨! 그렇게 큰 핏덩이가 어디에 있나. 우리 조합에 아주 일등 공신인데.”
박정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임운정은 민병철을 바라보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공장은 이제 공사 시작한다고 했지? 언제 완공이 되려나.”
“큰 사장님, 지금 이제 땅 고르고 있습니다. 반년은 기다려야죠. 건물이 올라와도 설비 받고 설치하는데 또 시간이 걸려요.”
아쿠아포닉스 농장을 설치하면서, 예상 완공 시간보다 3개월이 더 걸렸던 경험을 예로 들며 민병철이 설명했다. 손가락을 꼽아보던 임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정흠이가 화웅에서 최우선으로 설비를 갖다 준다고 했으니까, 설비 들여놓을 걱정은 안 해도 돼. 바로 주문 넣어도 2주 안에 갖다 줄 수 있다고 했으니.”
“다 큰 사장님 덕분이네요. 아 참, 이번에 허가도 엄청나게 빨리 났어요. 임 사장님 덕분 아닙니까?”
민병철이 묻자 임운정이 고개를 저었다.
“지역발전에 이바지하면서 여기 사람도 추가로 고용한다고 하니까 그렇지. 좋은 사업이니까 장 과장이 금방 허가 내준 것 아니겠나?”
‘그 까다로운 장수호 과장이 국민학교 동기라고 하셨지.’
이번 허가에도 임운정의 인맥이 효과를 발휘했다. 농사를 짓는 이들 대부분 이 지역 토박이지만 그중에서도 임운정은 특별하다.
그는 아주 옛날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으며 임운정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이 지역의 유지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증조부와 장남과 차남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임운정은 삼남의 후손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이 구역에서 꾸준히 빵집을 경영해오면서 고아원과 경로당에 남는 빵을 제공해 왔다. 평판이 좋고 모두가 좋아하는 인물이다.
민병철이 웃었다. 이 임씨 부자는 녹색 농부 조합과 민병철 자신에게 흥부의 박이나 다름없는 보물덩어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