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2화
진혁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많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 자라면 모를까.
하지만 군대에 있었던 시절, 같은 내무반 안 선임의 관물대 앞에 붙어있던 이 포스터는 선명하게 기억났다. 선임의 이름도 흐릿해지는 먼 옛날이지만, 개같이 훈련받고 돌아오는 거지 같은 날에 생활관에 돌아와서 이 포스터를 보면 신기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레드햇 제니와 미키였군.’
하지만 무림에서는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았다. 소교주의 직위를 부여받아 인정받았을 때도, 교주의 자리를 인정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직위가 높아질수록 더 칼끝을 걷는 느낌으로 조심해야 했다.
여자들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고 그는 그들과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마음은 더더욱 나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여자를 사귈 수도 있겠군.’
그리고 그 여자는 핸드폰이 무엇이며 지하철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한국의 일반적인 고등학교에 다녔을 것이며 대학에 다니거나 일을 할 것이다. 진혁이 군대를 갔다 왔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터다.
‘치킨과 콜라가 뭔지도 아는 여자를 말이지.’
무림에 있던 당시, 그가 여자를 만나지 않자 광안마는 크게 걱정했다. 동자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어째서 여자를 만나지 않는지 염려하는 광안마에게 진혁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치킨과 콜라가 뭔지 아는 여자를 데려오면 된다.”
그는 서른여섯 명의 여자를 데려왔지만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오래전 이야기다.
민병철이 노트북을 꺼내서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시는 대로 지금 매출이 수직 상승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말 할지 다 아시죠?”
처음 만나서 성공적으로 비즈니스 거래를 마친 후, 몇 차례 미팅을 가진 바 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문을 더 늘리고 싶다고 이야기하려는 것 아닙니까.”
“지금 소망시 본점과 H&J에서 하루 소화하는 주문량은 아시죠?”
“예.”
“현재 2배 이상의 수요가 있습니다. 지금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서 유사한 샌드위치들이 자꾸 팔리고 있는데, 우리만큼 맛있고 몸에 좋은 건 없다고 해서 품귀 현상에 이를 지경이에요.”
“H&J에서도 아침 일찍 다 팔려버리죠. 점심 건 점심에 다시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샌드위치 가게에 설치해놓은 오행진을 떠올렸다. 거기서 만든 샌드위치가 대자연의 기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 각자의 몸에 미량의 생기를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 이 민병철을 보아도 확실히 기의 순환이 이전보다 원활해지고 사람이 유해진 것이 보인다.
‘인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가?’
“이전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지신 것 같습니까?”
“예. 아마 사업이 잘되니까 그런 게 아닌가 한데…….”
진혁이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생각해본 민병철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샌드위치가 사람 마음도 편하게 합니까?”
“사찰음식만 봐도 알 수 있죠.”
진혁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일월신교의 경우 본래 채식을 중심으로 하는 교파와 육식도 허용하는 교파로 갈라져 싸워왔다. 하지만 진혁이 교주의 자리에 올라가면서 고기를 먹어 원기를 보충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채식파에게도 고기를 권유하였다.
“오신채는 마늘과 부추, 파와 달래, 흥거 다섯 개를 금지합니다. 향이 강하고 맵거나 짜거나 단 음식이 인간을 자극한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그렇군요.”
“제가 만드는 샌드위치들은 사찰음식처럼 엄격한 기준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농약이나 성장호르몬과 관계없는 좋은 재료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정제 설탕을 사용하지 않고 꿀을 씁니다. 몸에 좋을 수밖에 없죠.”
진혁이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하며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환골탈태 후 좋아진 몸 상태에 의아해하시는 어머니께 말씀드렸던 얘기지.’
일단 좋은 음식을 먹고 효과를 본 이들은 흔해 빠진 이야기에도 쉽게 수긍한다. 그리고 일월신교의 의약당에서 권고했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맵고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 열이 나죠. 좋은 음식을 먹으면 편안한 마음이 들고 장기적으로 몸이 좋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임진혁 쉐프를 알게 되어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민병철은 두꺼운 서류 봉투를 꺼냈다.
“제가 오늘 드릴 이야기는 총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게를 늘리는 것은 당장은 부담됩니다. 충분한 인력이 없거든요.”
“인력은 채용하면 되죠. 저희 인사팀에서 면접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호, 그동안 인사팀까지 생겼습니까?”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민병철이 흐뭇해하며 가방에서 잡지를 꺼냈다.
“이 기사는 보셨습니까? 먼슬리 뉴스 21에서 낸, 우리 녹색 농부 조합 기사입니다.”
4페이지 특집으로 실린 기사를 내보이며 민병철이 말했다.
“다 임진혁 쉐프님 덕분입니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우리 조합은 그전에 매출 규모가 사실 월 천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소규모 조합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5배 이상 사업 규모가 커졌습니다.”
임진혁이 합류하기 전, 녹색 농부 조합은 소망시에 소재한 유기농 산업을 하는 농부들이 모인 조그마한 조합이었다. 농부 열 명에 민병철까지, 스무 명이 안 되는 인원이 함께 일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영농과 농장 경영자 40여 명, 배달사원 50여 명을 포함해 120여 명의 직원이 생겼다. 민병철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진혁은 생각했다.
‘나를 속일 생각은 없군. 일봉이한테 전부 들은 대로야.’
녹색 농부 조합이 잘 되는지 걱정된다고 이야기하자, 일봉은 조합의 다른 농부들에게 물어보고 들은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진혁은 특별히 민병철을 의심해서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무도 믿지 않는 거지.’
가족을 제외하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백정흠 사장이 제시한 계약서는 확실히 진혁에게 유리한 것이었지만 그는 변호사를 통해 확인을 마친 후에야 서명을 했다. 그는 타인을 믿지 않았고, 믿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민병철과 계약한 내역에 대해서 동의한 것도 민병철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일 사기를 치려고 한다면 그 시점에서 손을 쓰면 되니까.’
무림 고수의 예민한 감각은 일반인보다 정보량을 압도적으로 많이 받아들인다. 임진혁은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심장 박동과 몸짓 언어를 통해 추측할 수 있었다. 민병철의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진혁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전에 먼저 이야기하고 싶으신 것이 있을 텐데요.”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민병철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가게를 늘려 달라는 거겠지.’
“말씀해 보십시오.”
◈ ◈ ◈
“공장을요?”
민병철이 부탁한 것은 진혁이 예상한 것보다 더 규모가 컸다.
“예. 샌드위치를 만드는 공장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생각보다 훨씬 큰 스케일의 이야기에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소망시 바로 옆에 붙어있는 희망시에 봐둔 부지가 있습니다. 200평 정도 되는 부지인데 도로변에 붙어 있고 가격도 매우 저렴합니다. 거기에 공장을 세우고, 냉동 탑차를 이용해 전국에 실어나르면 딱 좋습니다.”
민병철은 공장을 건설하는 비용과 냉동 탑차 업체를 고용하는 외주 비용, 그리고 앞으로 발생할 수익률에 대한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흥분해서 뺨이 붉게 상기된 그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당연히 자금은 녹색 농부 조합에서 댈 겁니다. 정부의 창업지원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부 융자를 받을 계획이고요.”
“창업지원 프로그램이요?”
“예, 공장을 별도 법인으로 따로 오픈할 계획입니다. 지원금도 주고 세금 혜택도 주거든요. 지원금도 도움이 되지만 더 좋은 건 세금 혜택입니다.”
생활혁신형 창업지원 프로그램은 고용노동부에서 진행하는 청년창업지원 프로그램이다. 가능성이 보이는 중소기업에 2억에서 3억 융자를 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이미 민병철은 기획지원서를 전부 작성한 상태다.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며 그가 기염을 토했다.
“임진혁 쉐프님의 샌드위치가 전국에 퍼지는 겁니다.”
진혁은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겨 보았다.
“공장에서 샌드위치를 만들 경우, 저희의 경우에는 오히려 가게에 손해가 아닌가 염려가 있습니다만.”
“임 쉐프님은 공장의 설립단계부터 고문 역할을 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당연히 진혁 쉐프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품질을 관리할 수 있도록 맞추겠습니다.”
민병철이 파워포인트 차트와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띄우며 열성적으로 말했다.
“당연히 지금 여기 가게와 지금처럼 사람이 일일이 만드는 라인은 프리미엄 라인으로 가고,”
어머니가 가게를 연 지 3개월, 지금까지 매출은 계속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공장이 열린 후 어머니 가게의 매출이 떨어지게 된다면 굳이 공장을 열 이유가 없지.’
하지만 민병철은 다른 아이템을 들고 나왔다.
“프리미엄 라인과 베이직 라인의 매출 예상도를 보십시오. 베이직 라인이 새로 생기면, 프리미엄 라인이 더 잘 팔리게 됩니다.”
진혁은 숫자가 꽉 찬 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한없이 치솟기만 하는 예상 매출 그래프를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예상하는 근거는 뭐죠?”
“처음부터 맛없는 걸 먹던 사람들은 나중에 맛있는 걸 먹으면 감탄하죠. 하지만 계속 맛있는 걸 먹어오던 사람들은 맛없는 걸 먹으면 그 차이를 압니다. 맛없는 걸 먹고 싶어 하지 않아요. 금액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면 원래 먹던 걸 먹을 겁니다.”
민병철이 씩 웃었다. 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신문도 그렇죠. 신문을 처음 구독하게 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구독한 신문을 끊는 사람은 적습니다. 지금 가격으로 구독하고 있는 학교와 연구실들은 계속 프리미엄 구독을 유지할 겁니다. 최소한 3개월 이상 주문해야 프리미엄 라인을 먹을 수 있게 할 겁니다.”
사업 모델을 설명하며 민병철이 열정적으로 양팔을 벌렸다.
“공장에서 만드는 샌드위치는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계산해 본 바에 따르면 최대 25%까지 가격을 낮출 수 있어요. 원자재는 그대로 유기농 채소와 고기를 사용하되 제작에 드는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겁니다.”
그는 자세한 계산 내역이 있는 시트를 스크롤해서 보여주며 어떤 전략으로 나갈지 설명했다.
“지금 문의하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판매처를 뽑아 보았습니다. 봄에서 가을까지 진행되는 일회성 행사 중심으로요. 먼저 주문을 받은 다음 제작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보관도 문제없습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바라보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