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8화
“다른 참가자가 사용하는 재료는 쓰면 안 된다는 규칙, 분명히 알려 주지 않았나?”
“예?!”
이번의 ‘예’는 비명처럼 꼬리가 길었다.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양손을 휘저었다.
“예, 아니, 그게.”
“임진혁 쉐프가 초콜릿을 뽑았지. 그러니까 자네는 초콜릿을 주재료로 사용하면 안 됐어.”
“아보카도하고 같이 쓸 거라면 카카오로 대체했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죠.”
스텔라 위스커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에서 규칙을 따르지 못하다니 어이가 없군요. 그러고도 프로페셔널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쉐프가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야. 채식주의자라고 말한 손님에게 베이컨을 내놓는 것과 똑같은 실수죠. 정말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패자부활전을 한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예요.”
물 젖은 솜처럼 기운 빠진 진영찬이 어깨를 움츠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참가자들이 눈에 띄게 안심하는 가운데, 진혁은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브라이언 신의 스웨디시 캐비어 스카이 케이크는 호평이었다.
흙 맛이 나지 않게 잘 손질한 메기를 크림화 해서 캐비어 위에 올린 미니 케이크는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점수를 얻었다.
최신 분자요리 기술 중 하나인 사이펀 건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는 데에 한몫했다.
루이스 강의 콘월 사프란 서니 케이크는 호평을 받았으나, 클로티드 크림의 양에 비해서 사프란 케이크가 양이 너무 적다는 비판을 받았다. 스텔라가 차갑게 말했다.
“애피타이저라고 해도 너무 적은 양이에요. 사프란 케이크가 주가 되어야 하는데, 클로티드 크림이 바다같이 많은 반면 사프란 케이크는 망망대해의 외딴 섬처럼 양이 적죠. 하지만 맛은 있었어요.”
루이스 강은 씁쓸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갔다.
하나씩 하나씩 순서가 지나가고 결국 진혁의 순서가 왔다.
그가 가장 마지막이었다.
“이건…… 대단한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감탄하며 진혁의 ‘폭풍이 몰아치는 밤하늘’을 응시했다.
“아름다움보다 비장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주영모 쉐프가 감탄했다. 아드레아노가 덧붙였다.
“겉모습이 중요하지만 맛도 중요하죠. 어디 맛이 이 훌륭한 겉모습만큼 좋은 결과를 낼지 봅시다. 임 쉐프, 이 케이크로 표현하고자 하는 맛이 뭐죠?”
진혁이 차분히 대답했다.
“마카다미아와 크랜베리를 넣은 촉촉한 초콜릿 브라우니입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밤하늘을 묘사했죠.”
“정말로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아요. 검은 산맥부터 회색 비구름, 내리치는 번개까지. 이 빗줄기를 표현한 투명한 건 뭐죠?”
“설탕 장식입니다. 굵은 빗줄기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무게감 있게 설탕 장식을 썼죠.”
진혁은 다른 이들이 노랗거나 주황색, 빨강 태양이 있는 파란 하늘을 묘사하는 동안 전혀 다른 주제를 골랐다.
그는 검은색과 회색과 흰색을 절묘하게 사용하여 십만대산을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번개 기둥을 세워 비구름 역할을 하는 푹신푹신한 케이크를 허공에 띄웠다.
“위쪽에 올라온 건 뭐죠? 번개 기둥이 가느다란데도 그 위에 있는 구름들이 용케 떨어지지 않고 잘 서 있네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궁금해했다. 그녀는 마음속 깊이 감탄하였다. 한때 각종 심지를 넣어 케이크의 일부를 허공에 띄우는 공중부양 케이크들이 유행했다.
하지만 케이크 일부의 무게를 지탱하여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무게를 감당할 기둥이 어느 정도 두께와 부피가 있어야 한다.
디자인 단계부터 세심하게 무게를 계산해야 하는 어려운 일인데, 지금 이 임진혁이라는 신인 쉐프는 놀랍게도 3시간 만에 공중부양 케이크를 만들어냈다.
‘1라운드에서 우승한 게 그냥 우연만은 아닌 모양이지?’
그녀는 진혁이 부린 만용이 마음에 들었다.
‘공중부양은 능숙한 쉐프라도 무게를 잘못 재면 얼마든지 망칠 수 있는 주제인데, 자신만만하게 도전해서 멋지게 성공했군. 기백은 나쁘지 않아. 결과물도 좋게 나왔고.’
진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보시는 대로 솜사탕입니다.”
“오.”
“아주 가벼운 재료를 써서 리스크를 줄였군.”
“맛을 볼 수 있도록 샘플 조각을 잘라 주게.”
진혁은 산맥 모양의 초콜릿 브라우니 케이크를 균등하게 잘라 세 사람에게 갖다 주었다. 주영모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젊은 놈이 케이크를 검도 하듯이 자르네.’
주영모는 건강을 위해 꾸준히 검도를 하고 있었는데, 눈앞의 이 쉐프가 빵칼로 케이크를 자르는 동작에서 마치 사범이 양손 베기를 하는 것처럼 기백이 있어 신기하게 느꼈다.
‘요상한 놈이란 말이지.’
아드레아노 존부는 케이크 조각을 받고 겉모습부터 살폈다.
위쪽에는 빗줄기 모양의 투명하거나 흰 설탕 조각이 드문드문 꽂혀 있다.
진한 초콜릿 향이 그윽하게 풍기는 브라우니는 흑갈색으로 보기 좋게 익어 있었다.
그는 포크를 들어 브라우니를 한 조각 입에 물었다.
“음!”
기분 좋은 탄성을 터트리며 그는 한 조각 더, 브라우니를 입에 가져갔다.
아주 작은 조각으로 잘게 섞인 마카다미아가 촉촉한 케이크 덩어리와 함께 기분 좋게 씹혔다.
그리고 아예 반죽 단위에서 갈아 넣은 것이 분명한 희미한 크랜베리 향이 초콜릿 맛이 너무 강하지 않게 잡아 주는 효과를 냈다.
“맛 조절을 잘하는군.”
“아주 맛있어요.”
“겉모습만큼이나 맛있는데.”
세 사람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케이크를 싹싹 비웠다.
심사위원이 케이크를 한 입만이 아니라 전부 먹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브라이언 신의 스웨디시 캐비어 케이크였다. 진혁은 만족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위해 회의실로 들어간 다음, 열두 명의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대기실로 안내받았다. 대기실에서 쉬는 동안, 안토니오와 진영찬 두 사람은 찌그러진 브리오슈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열 사람은 비교적 편안한 얼굴로 심사 결과를 기다렸다.
이미 두 사람이 떨어질 것이 너무나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어깨를 움츠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진영찬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씨펄, 거지 같은 놈의 규칙!“
그가 얼굴을 깊이 숙이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내 케이크가 얼마나 맛있는데, 먹어보지도 않고 탈락이라고 해! 고작 규칙 하나 헛갈린 것 가지고.”
다른 이들이 진영찬이 앉은 소파에서 거리를 두면서 멀어지자, 그가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진혁은 오른쪽 위에서 미세하게 들리는 전자음을 들었다. 그가 위를 올려다보자 스피커 밑에 숨겨져 있는 카메라가 보였다. 그는 아주 잠시 카메라를 보았다가 다시 진영찬을 바라보았다.
굳이 밟아줄 필요도 없이 하찮은 소인배였다. 카메라가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자는 지금 자신의 커리어를 스스로 흙발로 짓밟고 있는 셈이다.
“쉐프님들! 무대로 올라오세요!”
스태프가 나타나 다시 사람들을 불렀다. 그는 바닥에 있는 가래침은 쳐다보지도 않고 일행들을 인솔해 다시 무대로 향했다.
다들 각자 자리를 찾고 나서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럼, 이번에 제일 훌륭한 디저트를 만드신 분이 누군지 볼까요?”
“아슬아슬하게 브라이언 신의 스웨디시 캐비어 케이크가 되었습니다.”
“신기술을 교묘하게 사용한 점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죠.”
브라이언 신이 눈가를 실룩였다. 흑갈색 눈동자가 투명해지며 눈물이 또르륵 뺨 위에 흘러내렸다.
“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정진하세요.“
“아주 좋은 맛에, 좋은 아이디어에, 최고의 기술이었습니다.”
진혁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그는 자신의 케이크가 1등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 약간 놀랐다.
‘사이펀 건이라, 다음엔 그것을 나도 생각해볼까.’
“아슬아슬하게 임진혁 쉐프의 디저트가 2위를 했지요.”
“블랙 푸드는 딱 보기에 맛있어 보이기가 어려워요. 음식보다 오히려 품위 있는 예술작품에 가까워서, 그 점에서 약간 점수가 깎였죠.”
‘아, 그런 건가.’
스텔라 위스커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맛도 아주 좋았고 예술작품 같은 멋이 있었지만, 좀 더 먹음직스러운 겉모습을 가진 스웨디시 캐비어 케이크가 1등이 되었지요.”
다 함께 박수를 치며 브라이언 신을 축하해준 다음, 두 패배자를 위한 시간이 되었다.
“이번 2라운드에서 심사조차 받지 못하신 두 분, 앞으로 나오세요.”
안토니오와 진영찬이 앞으로 나섰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빙긋 웃었다.
“2라운드에서는 한 분을 구제해드리기 위해서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 알고 계시지요?”
“예!”
두 사람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제가 만든 하늘 케이크를 맛보시고, 재현하시면 됩니다. 반죽 레시피를 제외한 모든 레시피를 드릴 테니, 혀로 재료와 비율을 알아낸 다음에 직접 도전해 보세요!”
이것은 시즌 1과 달라진 점이었다.
시즌 1 때는 반죽 레시피도 함께 주었다. 안토니오의 갈색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진영찬은 무표정하게 그냥 서 있었다. 하지만 진영찬의 양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임진혁은 흥미롭게 구경했다.
‘맛보고 재료를 알아낼 수 없나?’
진혁은 의문을 가졌다. 그는 천안투마공을 사용해서 재료의 배합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탈태환골을 통해 향상된 미각과 후각으로 재료의 비율과 원재료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그는 이것이 오랜 경험을 가진 요리사들이라면 누구나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 어지간히 무능하군.’
아드레아노 존부가 자랑스럽게 케이크를 가지고 나왔다.
거의 1m 높이는 될 케이크 케이스를 보고 출연자들이 일제히 감탄을 터트렸다. 아직 케이크 케이스를 벗기기도 전이었다.
진혁은 케이크 케이스 안을 꿰뚫어보고서 휘파람을 불었다.
‘자석을 이용했군.’
진혁이 만든 케이크와 아이디어 면에서 유사한 점이 있는 하늘 케이크였다.
자석 밑판 위에 실린 파아란 케이크는 30cm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었고, 그 아래에는 파도치는 바다 모양의 쪽빛 케이크가 있었다.
엄연히 말하면 2단 케이크라고 할 수 있지만 중간에 허공이 있어 높이가 높아 보이는 것이다.
그 기이하고 신비로운 모양에 놀란 안토니오와 진영찬이 멍하니 케이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공중부양 케이크…….”
“4, 5년 전에 영국 왕실 웨딩 케이크에서 처음 사용한 기법…… 과연.”
안토니오가 중얼거렸다. 자석을 사용해 띄웠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반면 진영찬은 마법을 보는 듯한 얼굴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맛을 보자고.”
아드레아노 존부가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공중에 뜬 하늘 케이크를 조각조각 잘라냈다.
바닥에 있는 파도 케이크까지 잘라서 조금씩 내놓았다. 안토니오는 케이크를 입안에 넣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