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7화
이번에 남은 12명 중에서 쇼콜라티에로 알려진 자는 아무도 없다.
루이스는 우승자의 선택권을 사용해 ‘초콜릿’을 가져간 임진혁이 견제를 위해서 초콜릿을 가져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초콜릿 모델링 드래곤으로 마리오를 이겼지. 마리오는 내가 제대로 가르친 녀석인데.“
눈치가 없고 다혈질인 동생 녀석이다. 얼굴이 잘생겼고 빵을 잘 만들고 성격이 밝다는 장점이 있어 한국에서는 SNS로 꽤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어설프고 허당인 막내로 귀여움을 받고 있을 뿐, 실제 그 실력은 루이스 자신에게 한참 못 미친다.
‘귀여운 것 외에는 장점이 없는, 바보 동생이지.’
아마 저 임진혁이라는 자는 초콜릿을 잘 다룰 자신이 있으니 가져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모델링 초콜릿으로 모양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푹신푹신한 케이크 반죽을 하면서 철사에 심을 감는다.
뭔가 모양을 만들려는 것 같은데, 저 심 철사로 어떻게 하늘을 만들지 상상이 안 된다.
그는 임진혁이 뭘 하는지는 도통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 놀라웠다.
‘마리오를 이길 만은 해.’
루이스는 임진혁에 대한 평가를 재조정했다. 동생이 했던 말처럼, 자신이 임진혁에 대한 평가를 재조정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다.
“2라운드 종료 10분 전입니다!”
이희주의 외침이 출연자들에게 남은 시간을 상기시켰다. 다들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빵을 전부 다 구워낸 진혁은 빵 위아래를 자르고, 그 위에 버터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루이스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는 오븐을 열어 빵틀 속에서 구워지는 빵을 찔러 보았다.
노오랗게 부풀어 오른 빵은 겉으로 보기에는 익은 것처럼 보였지만, 속에서 아직 익지 않은 빵이 묻어났다.
그는 다급해져서 다시 오븐 안에 빵을 밀어 넣었다.
“망할!”
빵에 바를 클로티드 크림은 이미 완성했다. 그렇지만 심사 위원에게 덜 익은 빵 반죽을 내놓을 수는 없다. 그건 루이스의 요리사 의식이 허용하지 않았다.
“빵 없이 크림만 내놓을 수도 없고!”
그는 초조하게 오븐 앞을 서성거리다가 손뼉을 딱 쳤다.
“좋아.”
루이스는 접시에 클로티드 크림과 빵에서 잘 익은 부분만을 잘라냈다.
“2라운드 종료 5분 전입니다!”
루이스 강이 부지런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는 ‘하늘’ 모양을 만들기 위해 클로티드 크림을 꾸덕꾸덕하게 바닥에 발랐다.
파도의 거품처럼 크림을 우아하게 얹고서, 그 옆에 아주 약간 공간을 띄고서 새하얀 버터를 깔았다.
노오란 사프란 케이크를 익은 부분만 동그랗게 잘라내어 그 위에 얹었다. 크림 섬 위에 샛노란 달이 떴다.
“2라운드 종료 3분 전입니다!”
“젠장!”
급속 냉동고에서 색색 젤리를 병째 꺼내던 안토니오가 투덜거렸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라틴계의 짙은 갈색 피부에 송골송골 땀이 솟는다.
그는 굵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프라이팬에 바게트를 굽기 시작했다. 얇게 조각난 바게트가 바삭바삭해지다가 순식간에 가장자리부터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쳇!”
그는 타버린 바게트를 골라내어 버리고, 비교적 덜 탄 것들을 골라내서 탄 부분을 가위로 잘라냈다.
이미 모든 것을 마친 진혁은 여유롭게 주변을 살폈다.
“2라운드 종료 3초, 2초, 1초 전입니다!”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뛴다. 다른 열한 명의 심장이 전쟁터에라도 나간 것처럼 거세게 박동하는 것을 느끼며 진혁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드라이아이스가 뿜어내는 서늘한 하얀 안개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며 폭죽이 터졌다. 요란한 소리와 동시에 사회자와 심사위원들이 즐겁게 소리쳤다.
“양손을 드세요!”
“양손을 들어요!”
은행 강도를 맞이한 은행원들처럼, 쉐프들이 머리 위로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진혁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하얀 안개가 사라지자 사회자 이희주가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우리 심사를 볼까요?”
그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주영모가 마이크를 들고서 한 명씩 호명하기 시작했다.
“유키코 김.”
이 순서는 재료 제비뽑기 순서도 아니었고, 가나다 이름 순서대로도 아니었다. 조리대가 나란히 서 있는 순서대로였다.
‘순서를 계속해서 바꾸는군.’
진혁은 왜 순서를 계속해서 바꾸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한 입씩만 맛보더라도 진한 맛을 가진 초콜릿 케이크를 먼저 먹으면 다음 심사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유키코 김이 작은 접시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였지만 진혁에게는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긴장했군.’
그녀가 내려놓은 케이크는 새하얗고 동그란 미니 치즈 케이크였다.
여자 손의 절반 크기, 하얗고 자그마한 그 케이크가 하나씩, 심사위원 앞에 놓였다. 그녀가 웃으며 사회자 앞에도 하나 더 놓았다.
“스카이 치즈 케이크입니다.”
“어디가 하늘인지 모르겠는데요?”
주영모 쉐프가 굵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물었다. 유키코 김이 차분하게 말했다.
“반 잘라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말없이 포크를 들어 미니 치즈 케이크를 반으로 갈랐다. 정확히 반으로 나뉜 케이크가 접시 위에 넘어지며 안쪽이 드러났다. 총 세 개의 층으로 구분되는 케이크였다.
0.5cm 두께의 얇은 갈색 층.
4cm 두께의 연하늘색 층. 여기에는 하얀 구름이 총총히 박혀있다.
0.5cm 두께의 연한 갈색 층. 자그마한 건포도가 띄엄띄엄, 솟은 산처럼 세심하게 골고루 놓여 있다.
“어머나?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하늘로 만들려고 했군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웃었다.
“특이한 아이디어네요. 나쁘지는 않습니다.”
“맨 위에는 갈색, 아래쪽은 연갈색이라. 주로 사용한 재료는 뭐죠?”
“티라미수 치즈케이크입니다. 대류권과 성층권까지 표현하고 맨 위에는 중간권의 일부를 표현했습니다.”
“하늘이라고 하면 보통 지구에서 올려다보는 걸 생각하는데, 지구과학적인 구조를 재현한 케이크라니 특이하네요.”
“맛이 어떤가 보지요.”
심사위원들이 스푼을 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다들 한마디씩 했다.
“흰색 구름을 표현한 건 치즈 크림이군요. 맛은 부드러워요.”
“구름의 맛이 지나치게 수수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구름의 모양 자체는 괜찮았어요.”
“촉촉한 케이크였습니다. 텍스쳐는 나쁘지 않아요.”
짧은 평이 끝나고 유키코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은 듯 뻣뻣하게 움직였다.
나쁘지 않다는 것은 좋다는 것과 다르다. 그녀가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다음에는 안토니오의 차례였다. 양쪽으로 30cm 정도, 목제 카누처럼 긴 접시 위에 유리병에 담긴 푸른 젤리가 나란히 놓였다.
하늘색 젤리가 가득 차 있는 유리병 안에는 마시맬로우처럼 희고 푹신푹신한 구름이 몽실몽실하게 담겨 있었다.
유리병에는 병뚜껑 대신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바게트가 세로로 꽂혀 있었다. 아드레아노가 손을 내저었다.
“이건 맛볼 필요가 없습니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혀를 찼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디저트를 만들었죠?”
안토니오의 사내다운 얼굴에 참혹한 빛이 스쳤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맛을 보셔야…….”
“프로 페이스트리 쉐프에게 3시간. 그 시간 동안 고작 젤리 하나 만들어 놓고. 지금 맛을 봐달라는 건가요?”
스텔라 위스커스가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젤리와 바게트라니, 어울릴 리가 없는 음식을 같이 갖고 나온 이유는 뭐냐고요.”
주영모가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사할 필요가 없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건 하늘을 표현하려고 했다고요!”
“모양뿐 아니라 맛도 심사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당신의 실력에 걸맞은 음식을 만들어내야지, 젤라틴과 설탕을 녹이기만 하면 되는 이런 30분짜리 요리를 내놓고서 뭘 잘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안토니오의 눈가가 실룩였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섰다.
다른 참가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가운데 유키코 김도 있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사위원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멍청한 놈. 짧은 시간에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생각을 해야지.’
열두 명 중에서 열 명 안에 드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자신이 사용할 줄 아는 기술은 전부 발휘하여 최상의 결과를 내서 1위를 차지하는 것이 좋다. 그러려면 평생 동안 갈고 닦은 기술 중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전부 보여주어야 한다.
진혁은 중양절에 추는 검무를 떠올렸다.
중양절은 중국의 큰 명절로, 음력 9월 9일이다.
그날에는 일월신교의 교인들이 모두 모여 산에 올라가 영혼들을 위로하는 큰 축제를 벌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볼만한 것은 일월신교의 신진 고수들이 추는, 영혼을 위로하는 검무(劍舞)였다.
진혁은 검무를 평가하면서 아름다움만을 보지 않았다.
초식의 실용성 또한 따졌으며, 일월신공의 1식 일출도래부터 18식 월하불영의 모든 초식이 전부 골고루 포함되는지를 보았다.
1식 일출도래는 산봉우리에 뜨는 해처럼 내려찍는 초식으로 느리지만 확실히 목표를 찾아가는 초식이다.
구식까지는 태양과 관련된 초식이지만 그 이후 십 식부터 십팔 식까지는 달과 달의 움직임, 달그림자가 주제다.
월하불영은 높이 뜬 달 아래에 그림자가 없다는 뜻으로 보이지 않는 사각에 숨은 검이 순식간에 찔러 들어오는 초식으로, 이 초식에 통달하려면 양팔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언제든지 검을 등 뒤나 허리 아래에 숨길 수 있어야 했다.
‘검무를 출 때도 모든 기술을 전부 익혀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 요리 심사 또한 비슷하겠지.’
그래서 진혁은 일부러 다섯 종류의 케이크를 만들어, 자신이 어떤 것들을 할 줄 아는지 전부 보여주었다. 그는 다음 사람이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진영찬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유리컵 안에 담겨 있는 케이크를 들고 나왔다.
초록색으로 한 줄, 검은색으로 한 줄, 층층이 나뉘어있는 케이크의 맨 위쪽에는 연하늘색 크림이 솟아 있다.
가득 담긴 하늘색 크림 사이사이에는 새하얀 슈가 파우더가 군데군데 뿌려졌고, 가운데에는 꿀에 절인 새빨간 체리가 하나씩 올라갔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보카도 초콜릿 하늘 케이크입니다.”
주영모 쉐프가 이마를 찌푸렸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팔짱을 끼면서, 스텔라 위스커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혁은 흥미진진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나갔나?”
“예?”
“이 케이크는 아예 맛볼 필요가 없네.”
“예?”
진영찬이 떡 벌어진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그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