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06화 (106/656)

제 106화

진혁 역시 사프란을 만져본 적은 없다.

바닷바람 향이 나며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뒷맛이 섞인 이 향신료는 영국 콘월의 전통적인 사프란 케이크나 아몬드 사프란 케이크 등 베이커리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나 비싼 나머지 실제로 사프란을 사용해서 케이크를 만드는 일은 거의 없고, 보통 강황, 홍화와 같은 다른 향신료를 넣어 유사한 맛을 내려고 한다.

물론 성공적으로 그 맛을 낼 수는 없지만 말이다.

진영찬이 제비를 뽑았다. 이희주가 제비를 받아 소리 높여 외쳤다.

“아보카도.”

진영찬이 절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곧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떨리는 주먹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삼류 무인보다도 못한 녀석. 저 재료엔 자신이 없나 보군.’

12명이 모두 재료를 배정받았다. 각자 자신의 조리대 앞에 서서 앞치마를 두른다. 주영모가 종을 울리고 이희주가 외쳤다.

“자, 시작합니다!”

진혁은 이미 케이크의 모양을 생각해 두었다. 그는 재료실에서 밀가루를 가져왔다.

낯익은 젤로스 사의 밀가루들이 종류별로 빼곡하게 쌓여있다.

‘역시, 2라운드에도 젤로스 사로군.’

똑같은 프랑스산 밀가루라고 해도 회사마다, 산지마다 밀가루가 다르기 때문에 회사의 브랜드는 중요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필요한 밀가루를 가져왔다.

곧 진혁은 바닥 역할을 할 타르트 셸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시작했다.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순식간에 타르트 셸과 ‘하늘 역할’을 할 얇디얇은 쇼트 브레드 반죽을 빚어냈다.

알맞게 동그란 크기로 만들어진 타르트 바닥 곁에는, 타르트 링 주변을 둘러쌀 얇은 타르트 링을 올려붙인다. 진혁은 그 위에 도자기로 된 작은 구슬들을 쏟아부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타르트 셸이 위쪽으로 부풀어 오르니까.’

이 구슬들은 타르트 밑바닥이 평평하게 구워지도록 도와줄 것이다. 하늘을 받쳐줄 기둥 역할을 할 철사 심지에 방수되는 노끈을 감고서, 그는 번개 모양이 되도록 철사를 세심하게 매만졌다.

‘여기에는 초콜릿 모델링을 해서 노오란 번개를.’

그는 설탕 비가 내리고 초콜릿 번개가 내리꽂히는 비구름 어린 하늘을 만들 셈이었다.

하늘 아래에는 섬세한 모양의 젤리 호수가 투명하게 찰랑이며 하늘을 그대로 비출 것이다.

첫 번째 레이어는 얇은 젤리층, 그다음 레이어는 버터크림, 그다음에는 레몬 커스터드 크림. 아래층의 파이지는 지극히 얇다.

그다음에는 버터크림 순서다. 진혁은 스테인리스 보울에 재료를 넣고, 보울의 안에 미세한 강기 그물을 둘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나는 아니까.’

그는 음식에 스테인리스 맛이 나는 것이 싫었다. 스탠딩 믹서의 버튼을 누르고 재료가 섞이는 동안 빗줄기가 될 설탕물을 끓인다.

진혁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다른 이들도 쉬고 있지만은 않았다.

유키코는 솜사탕 기계를 켜고 나무젓가락에 설탕을 감아 돌렸다. 달콤한 설탕 냄새가 조리대에 진동했다. 그녀의 손안에 희고 깨끗한 구름 송이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을 만들 식용 색소가 7종류 곱게 놓여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만들려는지는 색깔만 봐도 알 수 있다.

‘구름과 무지개라. 흔한 아이디어네.’

루이스 강은 옆자리의 유키코를 힐끔 살폈다. 색깔은 예쁘게 나오겠지만 맛은 그저 달기만 할 것이다. 유키코는 맛을 완전히 포기하고 디자인에 집중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을 힐긋힐긋 바라보았다. 안토니오는 냄비에서 끓고 있는 파란색 젤리를 얼음 통으로 옮겨 담았다. 스탠드 믹서기에서는 크림을 휘핑하는 중이다. 옆에 늘어서 있는 유리병을 보면 뭘 할지 알 수 있다. 병 안에 연 파란색 젤리를 가득 채우고 구름 역할을 할 휘핑크림을 드문드문 뿌려줄 것이다.

브라이언 신은 사이펀 건(Siphon gun)을 사용해 캐비어가 이미 올라간 타르트 위에 새하얀 크림을 올렸다.

‘아주 능숙하게 사이펀 건을 잡고 크림을 분사하는군.’

보통 휘핑기라고도 불리는 사이펀 건은 본래 생크림을 만들 때 쓰였다.

진공의 힘을 이용해 본래는 크림 형태가 될 수 없는 각종 재료를 크림 형태로 전환하는 데에 쓰인다.

현대 분자요리에서는 생크림을 넣지 않고도 각종 과일과 소스 크림을 만들어 요리에 사용한다.

흔히 사용하는 도구는 아니지만 브라이언은 노련하게 기구를 다루었다.

‘사이펀 건은 자주 사용하는 도구니까.’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서, 진부한 요리는 죄악이다.

디저트란 맛있으면서 아름다우며 손님들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향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젊은 나이의 동양인이 헤드 쉐프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그가 그만큼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캐비어는 브라이언이 매일같이 다루는 재료 중 하나였고, 사이펀 건은 그가 최소한 이틀에 한 번은 잡는 기구였다.

이 주방에 준비된 재료들은 최고급 호텔에서 사용하던 것보다 등급은 조금 뒤떨어졌으며 가짓수는 한참 부족했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최대한 카메라의 시선을 잡아끌 만한, 멋진 음식을 만들어야 해.’

브라이언은 캐비어를 이용한 애피타이저나 앙트레, 디저트를 최소한 여섯 가지 이상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만들 것은 하늘을 이미지화한 디저트로, 이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가 방문했을 때 축하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것을 개량한 것이다.

‘내 얼굴이 TV에 자주 클로즈업되는 만큼, 부모님이 날 알아볼 가능성이 늘어나.’

그는 이번에 우승해야 했다. 최대한 TV에 많이 나와서, 자주 얼굴을 노출해야 했다.

이번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우승하게 되면 다른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도 늘어날 것이었다.

‘내가 맡겨졌던 고아원이 어딘지 적혀 있는 서류가 사라졌으니까. 내 얼굴을 보고 우리 부모님이나 부모님을 아는 사람이 날 찾아오도록 할 수밖에 없어.’

홀트아동복지회의 직원인 진영하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도와주었으나, 분명히 있었던 서류가 어디에 갔는지 모르겠다며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홀트아동복지회의 관계자가 아닌 진영찬이 자신도 페이스트리 쉐프라며 친근한 척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백인들 사이에 낀 유일한 동양인으로 학교에 다녔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헤드 쉐프의 자리까지 오른 브라이언은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돕겠다는 사람에게 굳이 성질을 보일 필요가 없어 가만히 있었지만, 아주 중요한 곳이라서 꼭 가야 한다고 했던 곳이 사창가였을 때는 정말이지 경악했다.

‘사실 두려웠지. 전쟁 이후 사창가에서 버려진 고아들이 많았다고 했으니까…… 친모가 거리의 창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가 하고 무서웠어.’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 멍청한 개자식은 그냥 자신을 데리고 사창가에 온 것뿐이었다.

어머니를 아는 나이 든 포주라도 찾아낸 건가 하고 멍청하게 따라간 브라이언은 어이없는 상황을 겪어야 했다.

진하게 화장한 나이 든 여자가 빠른 사투리로 무어라 말하더니 문을 잠그고 그 앞에서 옷을 벗으려고 하는 것이다.

당황한 브라이언은 영어로 쏘아붙이고 그 방을 뛰쳐나왔다.

진영찬에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따졌지만 그는 실실 웃으며 ‘토끼’냐며 놀렸을 뿐이다.

결국 말이 통하는 진영하에게 전화하고 나서야 진영찬이 상황을 이해하고 꺼져 주었다.

진영하는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사죄했다. 남동생이 그런 녀석인 줄 몰랐다며, 알았으면 절대로 부탁하지 않았을 거라며 굽신거리며 빌었다. 그래서 이후 상종하지 않았을 뿐이지,

‘여자친구와 동거하고서 벌써 8년이 되어버렸다고. 아직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제시가 알았다면 나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그는 약혼자인 제시카를 생각했다. 제시카 린든이 결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했다.

결혼식에 양부모와 함께 친부모를 초청하고 싶다고 하자 착한 제시도 동의했다. 하지만 제시가 결혼식을 기다려 준 것도 벌써 3년이다.

‘올해 못 찾으면 그냥 식을 올려야 해……. 더 이상 그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친부모가 함께 있지 않아도 식을 올리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저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최소한…… 친부모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라도 알고 싶어.’

그 욕망은 또 다른 고민을 향해 흘러갔다. 아까 마지막으로 진영찬이 던진 말이 의미심장했다.

‘진영찬이라는 저 말만 많은 녀석이 정말로 고아원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팀제로 라운드를 통과한다면 한 번 정도 파트너를 같이 하는 것 따위야 전혀 문제는 되지 않는다. 브라이언은 파트너가 똥을 만들더라도 스테이지 하나 정도는 올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저런 놈하고 파트너를 하는 게 싫다는 게 문제지.’

그는 내장을 빼서 손질한 데친 메기에서 껍질과 뼈를 발라냈다. 메기가 진영찬이라고 생각하니 더 요리가 잘 되는 것 같다.

부드러운 흰 살이 적절하게 익은 것을 사이펀 건에 넣고 하얀 크림을 짜내었다.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일 뿐만 아니라, 구름 형태로 완벽하게 모양이 잡혀간다. 루이스 강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저 하얀 크림은 절대로 생크림일 리가 없는데? 캐비어와 어울리는 맛에 흰색이면, 흰살생선인가.’

그는 입맛을 다셨다. 해물 디저트의 왕으로 불리는 브라이언 신이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아름답고 맛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 강은 자신의 음식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다들 컨셉을 잘못 잡고 있어. 하늘을 표현하고자 할 때 반드시 하늘색 하늘과 하얀 구름 따위를 표현할 필요는 없지. 주제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 거야.’

경험이 풍부한 루이스 강은 다른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이 뭘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쟤는 뭘 만들려는 거야? 오징어 먹물 스파게티도 아니고. 블랙 푸드는 유행이 한참 지났다고.’

동생 마리오가 경고한 인물인 임진혁이다. 라운드 1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는 했지만, 루이스는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디자인적인 센스는 엉망진창이고, 색감도 지나치게 원색 위주로 써. 예술적인 감각이라는 것이 없다시피 하고. 조형력은 나쁘지 않아. 맛…… 은, 아드레아노 존부를 통과할 정도면 맛도 나쁘지 않다는 거겠지.’

시즌 1에서 1라운드 우승자였던 쇼콜라티에, 장 바티엔느는 2라운드에서 바로 탈락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기에 오히려 견제를 받았다. ‘초콜릿’이라는 메인 재료를 빼앗긴 그는 괴상한 음식을 만들었고 어이없이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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