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05화 (105/656)

제 105화

한동안 누나가 짜증 난다며 구박해서 귀찮고 번거로웠던 기억이 있다.

그는 부모님 찾기에 결국 실패하고 미국으로 바로 돌아갔으며 그대로 인연이 끊겼다.

태평양을 사이로 두고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 대회장에서 또 만날 줄이야.

이 세상이 참 좁다. 영찬은 나이가 한참 많은 형답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동생을 용서해줄 생각이었다.

‘입양아로 백인들 사이에서 고생하면서 자랐을 텐데. 한국까지 핏줄 찾아 왔으니 무정한 놈은 아닌데, 결국 부모님도 못 찾은 불쌍한 놈이잖아.’

그래도 제빵 실력 하나만큼은 알아주는 녀석이다.

다음 라운드에서 팀전을 한다면 이만큼 든든한 동료도 없을 것이다. 진영찬이 히죽 웃으며 브라이언에게 다가갔다.

“내 말대로만 하면 2라운드는 껌이라니까? 우리 둘이 완전히 찜쪄먹을 수 있어.”

“싫습니다.”

브라이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뒷걸음질 쳤다.

“당신이 싫습니다.”

“내가 왜 싫어? 잘해주고 있는데. 우리 누나도 너 도와주려고 휴가 내고 개인 시간에 뛰었잖아. 그러니까 너도 잘해줘야지.”

어린애 같은 논리에 브라이언이 얼굴을 찡그렸다.

“진영하씨는 영찬이를 무시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누나 진짜 인성 말아먹었네…….”

진영찬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했는데 상대방은 반가움이라곤 없이 바퀴벌레 보듯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내가 그때 너 때문에 몇만 원을 손해 봤는지 알어? 은혜를 모르면 한국인이라고 할 수 없지. 알아서 기어야 할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브라이언이 코웃음 쳤다.

“여기 카메라 있습니다.”

“뭐? 어디?”

진영찬이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브라이언은 잽싸게 무대로 다시 돌아갔다.

“이 새끼가 그렇게 안 봤는데 얍삽한 면이 있네. 형이 팀 좀 짜서 같이 해보자는데.”

진영찬은 도박하는 마음으로 이번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참여했다.

리츠칼턴호텔을 나와 오픈한 개인 빵집은 최근에는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그럭저럭 적자는 보지 않고 운영하고 있었지만 한 달 전부터 갑자기 매출이 뚝 떨어져 손익분기점이 간당간당한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번에 보조 PD에게 거금의 뒷돈을 주고 대회에 출전한 것이다.

‘라운드 3, 4까지만 올라가도 홍보는 충분히 될 거야.’

그는 자신이 우승할 만한 인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리가 있고 사람은 잘 다룬다고 생각했으며, 브라이언 같은 녀석과 짝을 이룬다면 팀전은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잘 얘기해 보면 내 말을 들을 거야.’

무대에 서 있는 대기자들 사이에서, 일부러 진영찬과 거리를 두려는 브라이언은 눈에 확 띄었다. 진영찬이 밝은 표정으로 브라이언의 곁에서 속삭였다.

‘그때 결국 부모님 못 찾지 않았어?’

브라이언은 못 들은 척 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브라이언 신은 눈가를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카메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소리지만 진혁에게는 잘 들렸다.

‘호오, 저런 사정이 있었나.’

32장

‘미국 토박이인 브라이언 신과 진영찬이 아는 사이라는 정보는 백정흠 사장이 조사해온 정보에는 없었는데…….’

진혁은 그들이 나눈 대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국계 입양아라는 이야기는 알려져 있었지만, 부모님을 찾고 있다는 정보도 없었고.’

자신의 부모님이 누군지 모르고 자라는 고아 훈련생들 사이에서, 자신의 부모에 대한 기억을 또렷하게 갖고 있는 진혁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가족의 따뜻함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녀석들은 가족이 어떤 존재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 브라이언 신이라는 쉐프에게는 양부모가 있어 가족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겠지만, 친부모는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일월신교의 고아 훈련생들은 부모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반면에 저기 있는 저 녀석은 혈육에 대한 마음이 있어 만리타국까지 와 있다.

‘어쩌면 나하고도 비슷할지도 모르겠군.’

진혁은 부모를 찾기 위해서 무공을 익히고 사람을 죽이며 날뛰었다.

다만 진혁과 브라이언 신의 차이점은, 진혁은 친부모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저 남자는 친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로 장님이 어둠 속을 더듬듯이 희미한 희망을 품고 부모를 찾고 있다.

진혁은 그 상황에 아주 희박한 동질감을 느꼈다.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는 다시 팔짱을 끼었고 곧 브라이언 신에 대한 생각을 중단했다. 진혁은 어제까지 재현했던 ‘치즈와 초콜릿, 그리고 밀가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치즈, 그리고 초콜릿.’

그가 좋아하기 때문에 먼저 분석했던 두 종류의 재료.

먼저 치즈.

보통 치즈라고 하면 흔히 햄버거 사이에 끼우는, 얇고 노란 미국식 가공치즈인 체다치즈를 떠올린다. 치즈를 좀 더 좋아하는 이들은 빵에 찍어 먹는 부드러운 크림치즈를 떠올린다. 하지만 세상에는 치즈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

경도에 따라 구분하면 에멘탈 치즈와 같은 단단한 경질 치즈, 모차렐라처럼 발효되지 않아 부드러운 생 치즈. 안쪽은 부드럽지만 겉은 딱딱한 치즈들로 나뉜다.

또한 숙성 과정에 따라서도 생 치즈와 가공 치즈로 구분할 수 있으며, 원재료로 구분하면 우유 치즈, 산양의 젖으로 만드는 산양유 치즈, 양의 젖으로 만드는 양유 치즈로 나뉜다.

그렇게 많은 종류의 치즈 중에서 진혁이 이번에 테스트한 치즈는 단 두 가지. 직접 받아온 우유 생 치즈와, 우유를 숙성시켜 만든 코티지 치즈다.

흔히 리코타 치즈라고 잘못 병기하는 치즈로, 우유에 레몬즙이나 식초를 첨가하여 끓여 만드는데 가정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다.

이전에 샐러드에 넣어서 만들 용도로 소량 만들어 보았다.

‘리코타 치즈는 브레드 푸딩에만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리코타 브레드, 리코타 팬케이크, 갈릭 브레드에 곁들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크림치즈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에는 시판하는 크림치즈를 섞어서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크림치즈 스타터라는 시판 균주를 이용해 가게에서 직접 크림치즈를 만든다.

직접 만든 크림치즈는 방부제가 들어있는 시판 크림치즈와 달리 유통기한이 짧지만 그만큼 더 신선하고 불순물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이번에 둘 중 하나가 나오면 좋겠지만, 다른 게 나와도 상관없지.’

진혁은 자신이 있었다.

“무대로 올라오세요!”

하나둘씩 쉐프들이 무대로 올라갔다. 무대 위에 올라간 쉐프는 한 명씩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회자가 과장된 어조로 쉐프를 한 명 한 명 일일이 소개했다. 진혁은 맨 마지막이었다.

“자! 그럼 이전 라운드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은, 임진혁 쉐프입니다. 강남의 H&J 베이커리에서 일하고 계시죠. 이 중 제일 젊은 만큼 특색있는 아이디어로 주방을 빛나게 해주실 분입니다!”

이희주의 짧은 소개가 끝나고, 다들 자신의 조리대 앞에 나란히 섰다. 이제 주영모 쉐프가 주제를 발표할 시간이다.

주영모는 봉투를 들고서 잠시 뜸을 들이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주제는 ‘하늘’입니다.”

진혁은 싱긋 웃었다. 그가 좋아하는 주제다. 그가 이전에 만들었던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 역시 황하의 황혼을 그려낸 케이크다. 그는 이번에는 다른 형태로 하늘을 묘사할 생각을 굳혔다.

스텔라 위스커스가 하얀 직육각형 통을 내밀었다. 손을 집어넣을 수 있을 만한 둥그런 구멍이 가운데에 뚫려있는 통이었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사용해야 할 재료는, 여기에서 제비뽑기로 하나씩 고르시면 됩니다.”

“……!”

“하지만 지난 라운드에서 제일 우수한 점수를 받은 단 한 명은,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를 수 있어요.”

그녀가 가볍게 윙크하며 말했다. 아드레아노 존부가 말했다.

“진혁 쉐프, 앞으로 나와주시죠.”

진혁은 단상 위로 걸어 나왔다. 구두 굽이 무대를 밟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앞으로 나왔다.

“자, 골라주시죠.”

12개의 재료가 죽 나열되어 있는 목록을 보고서 진혁이 웃었다.

초콜릿, 치즈, 사과, 배, 아몬드, 양파, 브로콜리, 아보카도, 아티초크, 캐비어, 베이컨, 사프란.

캐비어처럼 빵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재료가 섞여 있고, 아몬드처럼 향을 잘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재료 또한 있다.

‘짓궂군. 과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채소와 향신료를 아무거나 섞어 놨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출연자들을 골탕 먹이려는 속셈이 가득 보였다.

이 목록이라면 제일 먼저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 크나큰 이점일 수밖에 없다. 초콜릿과 치즈 중에서 잠시 고민하던 진혁은 곧 결론을 내렸다.

“초콜릿으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초콜릿!”

다음 순서는 브라이언 신이었다. 그는 주눅이 들어 움츠러든 상태로 무대 위를 걷다가 바닥에 그대로 미끄러져 넘어졌다.

-쿠당탕.

진혁은 혀를 차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까도 주눅 들어있긴 했는데, 이건 심한데.’

진영찬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훨씬 더 기가 죽어있다.

저렇게 손을 덜덜 떤다면 원래 실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진혁은 저렇게 기가 약한 녀석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 선 브라이언은 덜덜 떨리는 손을 집어넣어 재료를 꺼냈다. 재료를 본 브라이언의 눈동자가 커졌다.

“캐비어.”

‘저걸 누가 가져갈까 싶었는데, 쟤가 가져가네.’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음식을 고안해낼 수 있는 초콜릿이나 치즈와 달리, 캐비어는 만들 수 있는 제과류가 한정되어 있다.

‘기껏해야 스웨디쉬 캐비어 케이크 정도인가.’

진혁은 이전에 읽었던 제과 책에 나와 있었던 레시피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그걸 어떻게 하늘 형태로 만들어.’

아무리 디자인적인 감각이 뛰어난 브라이언 신이라고 해도, 스웨디시 캐비어 케이크를 하늘 모양으로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보통 블루베리 타르트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케이크다.

하지만 브라이언 신은 그 재료를 보고 눈빛이 변했다. 자신이 생긴 듯, 어깨를 펴고 살짝 미소까지 지었다. 그가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다음 사람이 불렸다.

“유키코 김, 나오세요.”

그녀는 당당한 태도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걸었다. 낮은 요리용 안전화 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제비뽑기 통에 손을 집어넣고 제비를 고른 후, 그녀가 뽑은 제비를 읽었다.

“치즈.”

‘운이 좋군.’

치즈라면 얼마든지 하늘을 묘사할 수 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는 누가 사프란을 가져갈지 궁금했다.

‘금보다 비싼 향신료인데, 용기 있게 내놓았군. 그 귀한 향신료를 엉망진창으로 다룬다면 정말 안타까울 거야. 실제 사프란을 다뤄본 사람은 이 중에서도 많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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