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104화 (104/656)

제 104화

병원 의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진혁을 아무도 막지 않았다. 그는 마음먹은 지 15분도 지나지 않아 곧 안과 의국을 발견했다.

진혁은 몰랐지만 그가 낮에 왔다면 안과 의사는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안과 전공의는 수술과 외래를 겸하기 때문에 낮에는 수술실과 외래 진료실을 오가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타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밤중에 응급 수술이 적기 때문에 밤에는 거의 확실히 당직실에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의국 앞, 벨을 누르고 진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박승범 님. 택배 왔습니다.”

잠겨 있던 의국 문이 달칵, 하고 열렸다.

◈          ◈          ◈

박승범은 세상이 싫었다. 키가 작고 살쪘고 안경을 낀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왕따로 놀림을 받았다.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바뀌어야 해.’

그는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공부해서 의대에 들어왔다.

공부 스트레스에 살이 빠졌으며 과 선배에게 라식 수술도 받았다.

갑자기 소개팅 자리가 많이 생겼다. 여자들은 놀랄 만큼 다정해졌고 그에게 양보하려 들었다. 그는 갑자기 태도가 변한 여자들을 경멸했다.

‘천박하고 조건만 보는 것들.’

병동에서 그는 묵묵히 성실하게 노력하는 점을 인정받았다.

우연히 교수님의 딸도 소개받았고, 그녀도 자신을 마음에 들어 했다. 이전에 가볍게 만났던 여자가 갑자기 임신을 했다느니 하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려고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거짓말쟁이에 나약하기까지 해.’

그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조건을 따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여자들도 하룻밤 자고 나면 손바닥 뒤집듯이 돌변해 교제나 결혼을 요구했다. 얼마 전에 클럽에서 만났던 여자도 그랬다.

‘직업을 얼버무리면서 숨기더니 실은 우리 병원 신규간호사였어. 날 미리 알고 접근한 게 틀림없어.’

술을 마시고 몇 번 만나다가 한 번 잤을 뿐인데, 사귀는 사이라고 착각해서 달려들었다.

이미 안과 교수님의 따님과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었기에 정중하게 위자료를 주고 돌려보냈는데, 찝찝하게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는 일부러 그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심지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음악 CD나 잠이 잘 온다는 라벤더 베개 따위의 쓸데없는 물건을 주문하기도 했다.

택배 기사가 상자를 내밀었다. 이번에 도착한 물건이 뭔지도 헷갈린다. 박승범은 눈을 깜빡이며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뭐야, 이거. 노끈……?”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논밭의 벼를 담을 때 사용하던, 샛노란 노끈이다.

최근 십여 년간은 다시 볼 일이 없던 싸구려 끈을 보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언가 잘못됐다. 박승범이 입을 열려고 하는데 택배 기사가 모자를 벗었다. 지옥이 그를 마주하며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치밀어올랐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은, 핏빛으로 붉게 물든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옥에서 내려온 선언이 승범을 옭아맸다.

“박승범?”

“아, 아니…나는….”

지금 와서 박승범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통하지 않는다. 모든 진실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악마가 말했다.

“일단 노끈을 들어 봐. 매듭부터 만들지.”

31장

사흘이 지나 두 번째 촬영 날이 되었다. 이전과 다른 점은 각자에게 대기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임 쉐프님, 제가 담당 스타일리스트인 김은영입니다.”

12명의 쉐프들에게 각자 스타일리스트들이 달라붙었다.

1편에서는 한 명의 스타일리스트가 두세 명을 한꺼번에 화장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1인당 한 명씩 붙어 있는 것이다.

진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그냥 후보, 이제는 비로소 출연자가 되는 건가.’

1편은 거의 편집하겠구나, 싶었다. 카메라를 통해서 보면 다들 칙칙한 얼굴색을 하고 있겠지.

“쉐프님, 피부가 너무 좋아서 화장을 할 필요가 전혀 없으세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스타일리스트가 감탄하며 붓을 내렸다. 그녀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진혁이 물었다.

“인상적인 얼굴로 만들어줄 수 있습니까.”

“인상적인 얼굴요?”

“카리스마가 있는 얼굴.”

스타일리스트와 보조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지금도 카리스마가 넘치시는데요.”

“원하시는 게 정확히 어떤 거죠?”

“지금은 아무래도 너무 기생오라비 같은 느낌이라. 좀 더 남자다운 얼굴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눈썹만 조금 더 진하게 하고 그림자를 조금만 줘도 될 거예요.”

“맡겨 주시라고요!”

의욕에 가득한 두 여자가 붓과 쉐도우 팔레트를 들고 달려들었다.

한 시간 정도 걸려서 화장이 전부 끝난 다음, 보조가 진혁을 다른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배경에 새하얀 색깔이 깔리고 의자만 하나 놓여 있는 방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아 조금 기다리자 곧 사회자인 이희주가 나타났다. 그는 작은 은빛 비늘처럼 스팽클이 수없이 칼라에 꿰매여 반짝반짝 빛나는 남색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다.

“임진혁 쉐프님! 이렇게 또 만나서 반갑습니다. 일주일만이지요?”

“반갑습니다.”

“지난번의 1라운드에서 만드신 케이크는 정말로 독특했습니다. 무덤을 케이크로 만드는 일은 흔한 건 아니죠. 그 안에 찹쌀떡이 들어가 있는 것도요.”

“예.”

긴장한 것도 아니고,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지극히 담담한 태도다. 이희주는 좀 더 진혁을 자극해 보기로 했다.

“이번 라운드에 남은 쉐프들 중 경력이 퍽 짧으신 편인데,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별생각 없습니다.”

진혁이 대답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아니요, 다른 이들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태도를 이희주가 곱씹어 보는 동안 진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부족한 만큼 더 노력해야죠.”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지.’

이희주는 진혁을 재평가했다.

‘빵을 잘 만들고, 재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기까지 한데. 이게 과연 이 사람의 본 모습일까? 나이에 비해서 지나치게 연륜이 깊고 여유가 있어. 언제 모델이나 배우 활동 같은 걸 했었나,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시선 처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데.’

이희주가 질문했다.

“우승 후보로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진혁은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제가 우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노력해야죠.”

“1라운드에서 제일 높은 점수로 통과한 만큼 다른 분들이 견제를 할 텐데요.”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어제의 저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해야 하는 거죠.”

이희주는 진혁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스타일리스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소년처럼 앳되어 보이는 잘생긴 모델 같은 얼굴이 지금은 남자답고 선이 굵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좀 더 진중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인상이 좀 달라 보이시는데, 그것도 잘 어울립니다.”

진혁이 씩 웃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또 대기실로 안내받았다.

한 사람씩 작은 방으로 안내되고 안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먼저 인터뷰를 끝낸 사람이 기다리는 구조로 보였다.

“임진혁 쉐프. 안녕하세요.”

진혁보다 머리 하나 작은 한국인 남자였다. 이전에 무대에서 본 적이 있었다.

‘브라이언 신.’

작은 목소리와 움츠린 어깨, 미국 억양이 섞인 한국말로 그를 평가하면 곤란하다. 스위스의 세계 10위 안에 드는 호텔 바렌에서 경력을 쌓은,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남자다.

“만나서 반가워요.”

교과서대로 인사하는 그는 쭈뼛쭈뼛하면서도 진혁에게 꿋꿋이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진혁보다 머리 두 개는 작아 보이는, 175cm 정도 되어 보일 키에 좁은 어깨다. 쉐프복의 왼쪽 팔의 주머니에는 펜과 노트가 들어있다. 그가 물었다.

“오늘은 뭐가 나올까요?”

“저도 모르죠.”

“그렇군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브라이언이 물었다.

“원래 시즌 1에서는 이번 라운드에서 단체전이 나왔죠. 만일 단체전을 한다면…… 저와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번에 만드신 케이크, 아이디어가 좋았어요.”

진혁이 대답했다.

“단체전이 아니라면요?”

“음, 그럴까요.”

“모르죠.”

진혁은 이번 라운드에서는 단체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이희주와 다른 쉐프들이 의논하는 소리를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공정한 승부를 겨루기 위해 단체전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부터 귀를 닫았기 때문에 그 이후는 모른다. 그가 피식 웃었다.

“만일 단체전이라면 같이 하죠.”

“예!”

브라이언 신이 아주 조금, 어깨를 폈다. 그리고 뒤에서 다가온 다른 남자가 브라이언의 어깨를 강하게 쳤다. 브라이언이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브라이언, 저런 애송이랑 같이 해서 뭘 어쩌려고 해? 차라리 나랑 같이 하자고.”

“너는…….”

브라이언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야, 나랑 같이 하자니까!”

말을 건 남자가 그 뒤를 쫓아갔다. 진영찬. 진혁과 마찬가지로 ‘찬 베이커리’라는 오너 베이커리를 경영하고 있는 남자다.

◈          ◈          ◈

진영찬, 그는 2년 전 브라이언을 만난 적이 있었다.

미국식 치즈케이크 대회에서 심사를 맡기 위해 방한한 브라이언은 대회가 끝나고 지방에 내려가고자 했다.

홀트 아동복지회에서 일하는 누나가 영찬에게 브라이언을 부탁한 것이다.

‘아버지를 찾아서 라스베이거스에서 온 입양아야. 너처럼 빵을 만드는 모양이니까, 내려가면서 통역도 해주고 좀 도와줘.’

영찬은 한국어는 할 수 있지만 문화에 서툴고 길을 잘 모르던 브라이언을 호의로 대했다. 누나가 특별히 잘해주라고 하기도 한 데다가 순하고 말 없는 브라이언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짜식 아직 경험 없지? 형이 가자는 데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아닌 것 같아요. 여기가 희망고아원이라고요?”

“고아원은 내일 간다니까? 여기가 아주 좋은 곳이야. 나랑 같이 가면 서비스도 잘 줘.”

“서비스?”

진영찬은 자신만만하게 브라이언을 영등포로 데려갔다.

순해 보이는 녀석은 단골 가게를 향하고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서 방에 들어갈 때까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하라는 대로 따라왔다.

하지만 여자와 한방에 들어간 후 뛰쳐나와 분노하며 영어로 쏘아붙이더니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아니. 자기도 좋아서 따라온 거 아니야. 그런데 나는 돈은 돈대로 쓰고, 누나한테 욕은 먹을 만큼 먹었지.’

다른 동생들은 데려가 달라고 해도 거절하고 혼자 가던 물 좋은 가게인데, 모처럼 데려가서 돈까지 썼는데도 날려 버렸다.

거기에다가 누나가 전화해서 도대체 순진한 애를 어디에 데려갔느냐고 쌍욕을 퍼부었다. 이후에는 누나가 알아서 데리고 다녀서 진영찬은 결국 브라이언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나이 가오는 살려 줘야지, 형도 아니고 누난데 유흥 주점 간 걸 불어버리면 내 체면이 뭐가 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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